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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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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1947)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9.04.18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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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다. 블랑시에게 이 말은 딱 들어맞는다. 기둥이 하얀 남부의 저택에서 자랐다. 조금 커서는 결혼도 했고 영어 선생을 직업으로 선택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는 것들이다. 집은 넘어갔으며 연인과 헤어졌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녀는 갈 곳이 없다. 달랑 트렁크 하나 들고 동생 스텔라가 있는 뉴올리언스행 기차에 올라탈 수밖에 없는 신세다.

5월 초 그러니까 지금과 비슷한 어느 봄날, 블랑시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극락이라는 곳에 내렸다. 퇴락한 곳의 모퉁이 이층집이 그녀가 도착한 곳이다.

그곳에 스탠리와 결혼한 스텔라가 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몹시 초라한 집구석에 그녀는 실망한다. 겨우 커튼 하나로 방과 방이 가려진 비좁은 곳에 동생이 살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실망도 잠시 더 큰 난관이 그녀 앞에 다가왔다. 그러니까 동생의 남편 스탠리의 짐승성과 맞닥트린 것이다. 과거 화려했던 추억을 먹고 사는 언니와 동물 같은 제부 그리고 여동생 셋이 겪게 될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이들의 희극이 아닌 비극을 그려냈다. 추억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대개 과거는 좋았으나 현재는 불운한 처지에 있는 경우가 많다. 블랑시가 그렇다.

그녀가 집도 절도 없이 동생에게 얹혀살기 위해 보잘것없는 작은 집에 도착해서 처음 한 일은 찬장에서 위스키병을 꺼내는 일이었다. 큰 컵에 한 잔 따라 마시고는 기운을 차려야 된다고 중얼거린다.

사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핑계에 불과하다. 그녀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생 앞에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되레 끔찍한 곳에 사는 동생을 불쌍하게 여긴다. 스텔라는 여기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변명한다. 언니가 생각하는 동생은 그렇게 불행하지도 그렇게 비참하지도 않다는 것. 이 말은 전적으로 맞다.

별처럼 빛나는 스텔라라는 말 그대로 스탠리와 육욕을 불태우면서 시쳇말로 ‘재미진’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한 가정에 불청객이 뛰어 든 것이다.

시끌벅적 소음을 내면서 스탠리가 자기 집에 들어왔다. 편하게 살자는 것이 좌우명인 스탠리는 풀지 못한 채 방 한가운데 있는 그녀의 옷가방에 눈길을 돌린다.

그리고 누구의 허락도 없이 들춰 보고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모피, 깃털 모자, 진주 목걸이 등 사치품이 어지럽다.

교사 월급으로는 살 수 없는 고가품 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스탠리는 블랑시가 어떤 여자인지를 간파했다. 위선에 찌들고 겉멋에 들떠 현실을 보지 못하고 망상 속에 사는 여자.

스탠리는 그런 블랑시의 과거가 의심스럽다. 의심은 곧 풀린다. 그녀가 그렇고 그런 여자라는 것을, 고상하고 얌전하고 새침한 것과는 달리 정숙하지 못하고 헤프며 제멋대로인 과거를 안고 있다는 것을.

스탠리는 저택을 판 돈의 행방을 궁금해하면서 그녀가 무일푼으로 자신의 집에 식객하고 있는 것을 노골적으로 불평한다.

중간에 낀 스텔라만 괴롭다. 언니가 받을 상처가 걱정이다. 예쁘고, 착하고, 교양있다는 말만 들어도 부족한 언니에게 스탠리의 거친 언사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만든다.

블랑시도 지지 않고 대든다. 돼지, 유인원, 폴란드 놈이라도 악다구니를 쓴다. 그런다고 진짜 남자 스탠리가 기가 죽을 리 없다.

11장으로 막을 내리는 3장에 이르면 세 사람의 성격이 다 나와 있는 가운데 갈등은 점점 심해지고 파국으로 치닫는다.

좁은 집에 스탠리의 공장 친구인 스티브, 미치, 파블로 등이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며 포커를 친다. 이들이 입고 있는 옷은 원색이다. 청색, 자주색, 빨간색, 흰색의 체크 무늬 그리고 연한 녹색으로 치장했다. 육체적으로 정점에 있고 직선적이며 힘이 넘쳐나는 패션이다.

스탠리는 친구들 앞이라고 해서 조심 떨 인간이 아니다. 블랑시를 모욕하고 아내의 허벅지를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치는 것은 예사다. 그에게서 예의나 도덕을 기대하는 것은 블랑시가 위스키 없이 사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그런 가운데 블랑시는 스탠리의 친구 미치와 눈이 맞았다. 곧 죽을 늙은 부모를 모시는 미치는 효성이 대단하고 친구들과는 달리 조금 내성적이다. 미치도 그녀를 좋아한다.

블랑시는 미치와 결혼해 이 지긋지긋한 곳을 빠져나가고 싶다. 하지만 스탠리가 둘을 방해한다. 블랑시의 창녀 기질과 그런 과거를 미치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친다.

스탠리의 수준을 논하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다. 애초 그렇게 생겨 먹은 인간이다.

처형의 행복을 빌어주기보다는 방해하는 인간. 여자의 과거를 이해 못 하는 별 볼 일 없는 미치는 그러나 그런 여자를 겁탈하려고 시도하는 어처구니 없는 행실을 보이고 블랑시는 보기 좋게 걷어찬다.

하지만 스탠리는 미치처럼 실수하지 않는다. 아내가 출산을 위해 병원에 간 사이 짐승의 본능을 드러낸다. 블랑시가 깨진 병을 들고 저항해 보지만 스탠리를 당해낼 수 없다.

이제 블랑시는 미쳐가고 있다. 아니 실제로 미쳤다. 스탠리는 생일선물로 돌아갈 버스표를 주면서 조롱하고 마침내 정신병원과 같은 요양원에 그녀를 강제 입원시킨다.

그런 줄도 모르고 블랑시는 잡으러 온 의사와 간호사를 마이애미 해변으로 초대하는 자신의 백만장자 친구로 착각한다. 블랑시가 떠난 자리는 이제 스탠리와 스텔라만 남았다.

둘은 생고기를 집어 던지면서 예전처럼 육체를 불사르고 행복한 순간으로 돌아왔다. 그들에게 그것을 뺀 다른 모든 것은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 빌리 와일더 감독이 1950년에 만든 <선셋 대로>의 주인공 노마(글로리아 스완슨)는 과거의 추억을 먹고 산다.

무성영화 시대의 화려한 스타였던 그녀는 이제는 한물간 노배우 취급을 받는다. 테크니컬 컬러 시대에 그녀를 찾는 감독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최고의 여배우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됐다는 소식을 듣는 환상에 빠져 산다.

마치 블랑시가 남부의 저택에 살면서 자기 앞에 존경하기 위해 모여선 사람들을 대하는 여왕과 같은 어린 시절의 착각에 빠진 것처럼.

노마가 2층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무언가 잡기 위해 손을 내뻗는 모습은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블랑시의 모습과 겹쳐진다.

언제나 소녀의 순수한 감정과 대접받고 싶어 하는 어린 여자 블랑시와 노마. 두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알전구에 갓등을 씌울 때 블랑시는 행복했고 스탠리가 그것을 파괴할 때 가슴이 찢어져 내렸다. 카메라 셔터가 자신을 촬영하는 것이 아님에도 눈부신 연기를 하는 노마는 처절했다.

뉴올리언스에 간다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콜라를 섞은 위스키를 마시고 재즈를 들으면서 블랑시와 노마의 추억에 흠뻑 빠져보고 싶다.

한편 엘리아 카잔 감독은 1951년 말론 브란도와 비비안 리를 남녀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동명의 영화를 만들었다. 두 남녀의 연기 대결이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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