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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살인의 추억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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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살인의 추억 (2003)
  • 의약뉴스
  • 승인 2015.12.07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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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상한 얼굴, 우수어린 눈빛의 젊은 남자가 있다. 배우 이름은 박해일.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 후반부에 등장하는 연쇄 살인범인지 아닌지 헛갈리게 만드는 인물.

마치 알프레도 히치콕 감독의 <싸이코> (1960)의 주인공 안소니 퍼킨스 같은 예쁘고 섬뜩하고 어느 한가지로 분석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봉감독은 어찌도 이리 거의 같은 느낌의 인물로 박해일을 꼽았을까.

아마도 박해일이 아니었으면 소름끼치는 형사와 살인마의 막바지 추격전은 살이 덜 떨렸을 지도 모른다.범인 비스무리한 인물의 박해일은 마지막까지 영화를 살리는 핵심중의 핵심이다.

경기도의 화성이라고 치자. 영화에서는 경기도나 화성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이 영화가 사건이 발생한 시점을 1986년이라고 설정한 사실을 보면 화성 연쇄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했음은 자명하다.

때는 가을이다. 들판은 황금물결로 일렁이고 아이들은 경운기를 뒤따르며 메뚜기 잡는데 열중이다. 뚜껑이 덥힌 수로를 형사 박두만(송강호)이 조심스럽게 살핀다. 깨진 유리조각 반사빛에 선명하게 드러난 젊은 여자의 시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눈을 뜨고 손은 뒤로 묶이고 옷가지로 물린 입 주변엔 벌레들이 기어 다닌다. 따지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자살이 아닌 타살이다.

그것도 현장에서 살해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죽이고 이곳에 유기한 것이 맞다. 수사본부가 꾸려지고 사건 해결을 위해 분주한데 또다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범인의 단서도 잡지 못했는데 살인이 비슷한 장소에서 연속으로 벌어진다. 다급한 경찰은 주변 지역의 불량배 리스트를 작성하고 좀 모자란 인간 백광호( 박노식)를 범인으로 붙잡는다.

기자들과 마을 주민들이 현장검증을 위해 마구섞여 들판으로 몰려드는데 제법 연습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광호의 살인 재현은 영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제대로 검증도 못하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형사반장( 변희봉)은 갈린다. 서울에서 자원한 형사 서태윤( 김상경)이 오고 새로운 반장(송재호)이 사건을 지휘한다.

자세히 살피니 공통점이 있다. 빨간 옷을 입고 비오는 날에 살해됐다. 특히 우울한 음악을 틀어 달라는 엽서가 라디오에 나올 때면 좀 전까지 살아있던 여자들은 여지없이 시체로 변한다. 방송국을 수배해 엽서를 보낸 인물을 찾아낸다.

앞서 말한 박현규다. 죽을 위기를 넘긴 여자로부터 범인의 특징을 알아낸 서울 형사는 현규의 손을 만져본다. 여자처럼 곱고 부드럽다. 그는 범인으로 현규를 찍는다.

결정적 증거인 정액만 검출되면 지긋지긋한 연쇄살인 사건은 종료된다. 하지만 미국에서 온 검증 결과는 유전자 불일치다. 밴드를 붙여준 어린 여학생까지 죽었는데.

아, 허탈감. 그럼 살인자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유일한 목격자인 광호마저 기차에 치어 죽자 형사들은 물론 관객들도 허탈하다. 영화는 끝내 살인자를 지목하지 않는다. 참으로 불친절한 영화다.

형사를 그만두고 외판 사원으로 생계를 꾸리는 박두만은 어느 날 살인사건 현장을 지나다 잠시 그 곳을 가본다. 전처럼 수로를 살피던 두만에게 어린 여자애는 말한다.

얼마 전에도 어떤 아저씨가 구멍 속을 들여다봤다고. 그 아저씨는 옛날에 자기가 했던 일이 생각나서 진짜 오랜만에 와 봤다고. 추억할게 없어 어디 살인을 추억할까. 뻔한 얼굴, 평범한 얼굴의 내 이웃집 남자는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서 활개치고 있다. 살인자는, 밥은 먹고 다닐까.

국가: 한국
감독: 봉준호
출연: 송강호, 김상경, 박노식, 박해일, 김뇌하
평점:

 

팁: 지금은 많이 사라진 용의자들에 대한 아무런 죄의식 없이 행해지던 누명과 사건조작이 적나라하다.

더구나 자백을 위한 고문과 폭력이 난무하는데 조금 모자란 광호나 다른 용의자를 무자비하게 작살내는 장면은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음습한 취조실에서 이단 옆차기로 가슴팍을 갈기거나 군화에 덧신을 신고서 짓이기는 장면들은 지난 시절의 어둡고 우울한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폭력을 주도하는 조용구 역의 김뢰하가 제대로 연기를 해냈다.

<살인의 추억>의 또 다른 볼거리는 유머다. 마치 코엔형제의 걸작 스릴러 <파고> (1996)를 연상시킨다. 폭력경찰을 혐오하다가도 사건해결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직업의식에 측은한 동정심을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강간하고 죽이는데 사건의 단서가 하나도 없자 송강호는 이렇게 내뱉는다. “애초부터 여기에 털이 하나도 없는 놈입니다. 무모증, 백다가리.” 그러자 형사반장 송재호가 천연덕스럽게 맞받는다. “현장에 흘린 터러끼 같은 기 애초부터 없는 놈이다 이거지.”

근처의 절을 뒤지자 거나 실제로 목욕탕에서 털 없는 남자를 찾기 위해 거시기를 관찰하는 강호의 표정은 웃다 못해 배꼽이 빠질 지경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당시 사회를 까는 영화라고도 한다. 전두환의 폭압으로 질식할 것 같던 사회 분위기를 잘 포착했다는 평가도 뒤따른다. 실제로 영화는 전투경찰을 지원 요청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시위를 막으러 다 가고 없다는 대사가 나온다.

직감과 관상 등으로 사건을 해결하려는 송강호와 서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과학수사를 통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해 가는 김상경의 연기대결도 볼 만하다.

한국영화가 거둔 괄목한 만한 성과로 기록될만하다. <저수지의 개들> (1992)을 만든 세계적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영화에 대해 “20년 동안 내가 본 영화중 최고”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돈은 많이 들이고도 너무 아쉬운 <설국열차> (2013) 같은 좀 처지는 영화 말고 리얼리티가 있는 이런 영화가 두 세 개 정도 더 나왔으면 좋겠다. 신중현이 부른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노래 선정은 기가 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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