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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올 때 붉은 해가 막 솟아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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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올 때 붉은 해가 막 솟아 오르고 있었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3.09.21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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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휴의가 숙소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을 깨끗했다. 그런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는 것이 휴의의 장점이었다. 어린애들처럼 그러고 싶지 않아. 손이 더러우면 바로 씻어야지. 휴의는 해를 정면으로 받으면서 파리 시내를 조금 걸었다. 건물이 가리면 그늘이 크게 졌다면 광장으로 나오면 혼자서 해를 맞는 기분이었다. 기런 기분은 오랜만이군. 해를 본지도 그렇고. 그동안은 해가 떴어도 의식하지 못했는데 오늘은 해가 모처럼 해처럼 보인단 말이야. 다른 사물도 그렇네. 모서리에 있는 육각형의 육층 건물도 그 앞에서 장식품처럼 길게 늘어선 가로수도 그렇고. 부지런해. 의자를 내놓고 있는 저 늙수레한 사람은 점원일까, 주인일까. 하루 일과를 저렇게 시작한다면 무슨 근심 걱정이 있겠어. 맥주 한 잔. 무슨 소리. 밤새다 시피 바셔놓고서는. 그래도 속이 편안한게 한 두 잔 쯤은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어. 내 몸을 나보다 더 잘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봐, 걷은 걸음이 바르잖아. 가능하다면 딱 한 잔만 하자. 비둘기 들에 줄 가벼운 안주 하나 시켜 놓고. 낯선 동양인에게 그 늙은 남자는 친절하지도 무뚝뚝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표정으로 신선한 드래프트 비어 한잔을 내왔다. 비둘기들이 광장에서 휴의가 앉은 노상 의자 주변으로 걸어서 조금씩 다가왔다. 시원해. 한국으로 돌아가 이런 맥주를 팔면 금방 부자가 되겠어. 무슨 소리. 이걸 사먹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 어제 포도주와는 다른 맛이야. 목으로 넘어가는 이 묵직함. 죽마을 보리가 살랑거려. 그 냄새, 푸릇한 그 냄새가 코를 잔지럽히고 난 이대로 한 잠 자고 싶네. 그렇다고 피곤하다는 말은 아냐. 그냥 가볍게 눈을 감고 세상 가장 편한 상태로 있는 거야. 할 일이 없어. 전혀 할 일이 없어. 완벽한 홀가분함. 엣다 이놈들아, 이거나 먹어라. 휴의는 막 나온 과자 부스러기를 잘게 쪼개 발 밑에 있는 비둘기에게 던졌다. 놈들이 달려 들었고 순식간에 검은 보도를 얇게 덮었던 밀가루 조각들은 원래처럼 없던 것이 됐다. 이건 기쁨도 비애도 아닌 그거 홀가분함이야. 이런 일상. 평범한 하루. 차분해지려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휴의는 자신이 매우 침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인지 걷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파리의 공기는 상쾌했다. 며칠 전에 비까지 내렸다. 강둑까지 차오른 센강이 발자국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나란히 아래로 흘러갔다. 

보름 후 여순은 상하이에 있었다. 그녀는 박군에게 맡긴 병원 일을 핑계 삼았다. 말수는 같이 가지 못하는 심정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 워낙 국사가 분주해. 나랏일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 그랬더라면 애초에 맡지 않았을 텐데. 좀 다른 곳에 가서 이야기 할까. 괜찮아요. 여기서도 충분해요. 내가 곧 따라갈게. 혹 시간이 늘어지면 당신이 오고. 말수는 떠나는 여순을 배웅했다. 여순은 남편의 눈에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 것을 직감했다. 병원일은 당신이 알아서 해. 난 한국에서 할 일이 많아. 말수는 이렇게 말했다. 여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나 믿지. 그럼요. 세상에 믿을 사람 당신 뿐인 거 알죠. 아 참, 이거 가져가야지. 그렇군요. 유마가 사인한 책인데 놓고 갈 뻔 했네. 마음에 들면 독후감 좀 보내줘. 그럴게요. 병원은 그대로였다. 어디가지 않고 그대로 거기 있었다. 박군은 말수 부부가 떠난 후 병원을 착실히 운영했다. 동료 의사와 함께 명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오후에 여순이 병원에 도착하자 박군은 놀랐다. 왜 연락하지 않았으냐고 항의했다. 마중갔을 텐데요.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박군의 깊은 눈이 여순을 향했다. 병원은 한시도 비우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여순이 싫지 않은 소리로 대답했다. 삼층 방은 여순이 떠나기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계단을 올라오면서 그녀는 이곳에서 많은 일이 있었지. 방에 도착하자 그녀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았다. 그전에도 이렇게 내다 보고 있었지. 여순은 창밖을 보면서 이곳이 고향이라는 것을 느꼈다. 냄새가 나. 고향 냄새. 그녀는 대각선으로 보이는 도쿄여관을 응시했다. 건물은 을씨년스러웠다. 병사들이 떠난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곳을 보면서 바늘로 찔러댔던 고통이 있었음을 기억했다. 더는 울부짖지 않을거야. 내 고통은 너무 길고 오래갔어. 이젠 아니야. 저곳에서 우는 여자는 없어. 대신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해야지. 여순은 울컥했으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고개를 돌렸을 때 피아노 옆에 기타가 눈에 띄었다. 여순은 기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줄을 맞춰 사공의 뱃노래 가물 거리니~ 하고 장단을 맞춰 노래 불렀다. 얼마나 열중이었는지 박군이 올라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기타를 놓고 피아노를 치려다 박군과 마주쳤다. 기타를 배우고 싶어요. 공짜로는 안 되요. 물론 입니다. 여순은 다시 창가로 갔다. 저기 도쿄여관 건물 보이지요. 아, 그 건물은 이제 폐허가 됐어요. 군인들이 가고 나서 여자들도 사라지고 이제는 인적이 끊겼어요. 저 건물을 알아보세요. 사겠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음악학원을 만들까 해요. 좋은 생각이네요. 어느새 가까이 온 박군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여순은 깊게 호흡을 한번했다. 아이들을 위한 학원을 만들 거에요. 음악학원, 그리고 미술학원. 부모 없는 아이들은 공짜로 하고요. 좋은 생각입니다. 박군이 화답했다. 그리고 뭐 있더라. 그래 하지 못했던 거. 병원 앞에 세워둘 상징물. 왼쪽에는 점례의 얼굴을 새겨 넣을 거야. 그리고 오른쪽에는 내 남편 말수. 그가 힘차게 곡괭이질을 하는 얼굴을 세울거야. 여기 오는 환자들은 저 남자처럼 모두 활력이 있으라고. 점례처럼 험란한 인생이 와도 좌절하지 말고 끝내 이려내라고. 그런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정과 망치좀 챙겨줘요. 오시자 마자 일이시군요. 사모님 떠나고 나서 잘 보관해 뒀어요. 돌아오시면 제일 먼저 그걸 찾을 줄 알았어요. 완성품이 보고 싶어요.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요. 조각은 내게 너무 어렵고 서투른 일이에요. 어느 정도나 걸릴까요. 뭐가 말이지요. 아 조각요. 그게 아마도. 대중 없어요. 올해까지는 마치고 싶은데. 죽마을에는 오석이 많이 났어요. 오석이 뭔지 알아요. 네 들었어요. 까마귀처럼 까만 돌. 아니가 얘기가 쉽겠네요. 아버지가 석공장에 나가셨어요. 어느 날 벼루를 들고 왔는데 벼루 보다는 벼루 덮개를 보고 놀란 기억이 있어요. 용호쌍박이라. 어떠냐, 여순아. 네가 보기에도 용과 호랑이가 싸우는 것처럼 보이니. 누가 이길것 같니. 용을 앞발로 호랑이를 치려하고 호랑이는 벌린 입으로 용의 비늘을 물려도 달려들었는데. 모르지요. 아버지는 알아요. 나도 모른다. 그래서 용호쌍박인거야. 그날 이후 한동안 벼루는 방구석에 방치돼 있었어요. 내가 죽마을을 떠나 올때 그게 눈에 띄었어요. 그리고 다시 덥개의 그림을 보았는데 입을 다물 수 없었어요. 연필로 종이에 그린 것보다 더 선명하고 실감이 났으니까요. 내가 없는 솜씨를 조금 부려 본다면 다 아버지 피를 물려 받은 덕분입니다. 그런 사연이 있었네요. 응원할게요. 그래요. 나도 박군이 남편처럼 훌륭한 외과의사가 되기를 도울게요. 그리고 여기 책한권. 틈 나면 읽어봐요. 프랑스에서 발간된 것인데. 일본어로 나와 있어요.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조각을 마치면 조선어로 번역을 해 보려고요.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거 같아요. 사모님은 대체 못하시는 게 뭔지 궁금해요. 너무 띄우지 말아요. 사람이 사는 것은 한시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면 살 수 있어요. 아, 그런데 이 책 작가가 돌연사 했어요. 젊은 분인데 안 됐어요. 박선생도 늘 운동 열심히 하고요. 아, 참 박선생, 오후 수술이 없으면 환자는 내가 볼테니 저 도쿄여관 건물이 나왔는지 복덕방에 한 번 가봐요. 그리고 가격이 맞으면 계약하겠다고 하세요. 박군의 나가는 뒷모습이 흥에겹다. 아저씨, 저도 같이가요. 언제 왔는지 아들 녀석이 달려나갔다. 뒤돌아서 박군이 그런 아들을 덥석 안아들고는 목마를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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