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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장밖은 쌀쌀했고 먼 산은 눈으로 덮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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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장밖은 쌀쌀했고 먼 산은 눈으로 덮여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5.30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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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과는 달리 차창 밖은 쌀쌀했다. 먼 산마다 눈이 쌓였다. 위로 올라갈수록 눈은 낮은 평지에도 보였고 더 올라가서는 기차 옆으로 눈들이 쓸려 날아다녔다. 신의주의 삼월은 봄과는 거리가 멀었다. 밤이 지나 해가 떠도 눈은 녹지 않았다. 달리고 또 달리고 또 달려서 기차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출입구에 기대앉은 군인들이 몸을 세워 일어났고 그들은 풀었던 눈을 다시 부릅떴다. 순서대로 내려라. 어서, 어서. 말은 혀가 짧았다. 점례는 몸을 구부려서 겨우 일어섰다. 다리가 우지끈하고 풀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 귀에 소리가 들려. 멀미와 졸음과 배고픔이 뒤섞인 채로 기차에서 내린 점례 일행은 다시 트럭을 타고 한참을 달렸다.

경성역에서 보았던 그 검은 트럭이었다. 트럭은 멈추지 않고 계속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다. 오로지 앞으로만 간 결과 어느 순간 국경을 넘었고 드넓은 만주 벌판 깊숙이 들어갔다. 조선 땅은 이제 돌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좋은 길이 나왔고 어떤 길은 바퀴가 부서질 정도로 울퉁불퉁한 길을 가야했다. 그럴 때마다 트럭은 쓰러질 듯이 옆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몸을 똑바로 했다.

점례는 트럭을 따라 넘어졌다가 다시 세웠고 다시 넘어졌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똑바로 차려야지 마음을 먹었으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서 점례는 울음이 나올것 만 같았다. 트럭은 사람만의 무게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덜컹거리는 것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도로는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다. 눈이 없는 곳은 먼지가 일었고 눈이 있는 곳은 미끄러웠고 일부가 녹아서 웅덩이가 됐다.

그런 곳은 패였고 패인 곳을 지날 때는 트럭은 요동을 쳤다. 소녀들의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애초에는 있었으나 사라진지 오래인 핏기 대신에 얼굴에는 드러난 공포가 가운데로 자리 잡았다.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넋이 나갔다는 표현은 이런 때 써야 한다. 귀신들린 사람처럼 아니면 미친 여자들처럼 소녀들은 자신의 본 모습 대신 새로운 모습을 한 채 어디론가 자꾸만 깊숙히 끌려 들어갔다. 그럴수록 몸은 떨렸다. 영하의 날씨에 트럭 뒤켠에 매달린 소녀들은 차라리 숨쉬기가 어려웠어도 기차안이 좋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추웠다. 천으로 뚜껑을 덮기는 했지만 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무명의 옷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두 사람 당 군용모포 한 장이 따로 지급됐다. 그것을 뒤집어쓰고 소녀들은 서로 껴안고 두려움과 추위에 맞섰다. 점례는 자신도 힘들었으나 더 힘든 소녀가 자신의 짝이 된 것을 알았다. 평양역에서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소녀였다.

자리에 앉으라고 양보했어도 소녀는 한 번도 점례의 제의를 받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소녀는 몸을 심하게 떨었다. 점례는 자신의 몸이 드러나도 그녀를 위해 모포를 파리한 소녀 쪽으로 더 넘겨주었다. 하지만 소녀는 체온이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온기라고는 전혀 없이 사람의 몸이 아닌 얼음 덩어리를 옆에 끼고 있는 것 같았다. 점례는 자신의 팔로 안았을 때 소녀는 가뿐숨을 몰아쉬었다.

조금만 참아. 곧 목적지에 올 거야. 따뜻한 밥과 폭신한 이불도 있고. 그리고.점 례는 돈이야기를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이제 그것으로도 소녀를 안심 시킬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돈 벌러 왔다가 돈은 만져보지도 못하고 이게 무슨 꼴이람, 허탈한 마음이 점례의 마음속에서 돈을 눌러버렸다. 돈이고 뭐고 일단 다리 좀 뻗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군인들은 소녀들에게 무관심했다. 어떤 말을 묻거나 떠들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임무가 가만히 있는 것이라도 되는 양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침묵은 오래갔다. 소녀 가운데 누구도 군인들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물을 좀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면 알아서 해주겠지, 소녀들은 그런 마음이었다. 아무 짓도 않고 가만히 있을 테니 하라는 대로 할 테니 처분만 내려 달라는 심정이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겠다고. 그것 말고 다른 것이 뭐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명천지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 그것은 자포자기 바로 그것이었다. 숲은 끝이 없었다. 세상의 끝이 이보다 더 길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목적지에 대한 불안감은 너무 깊었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멀미가 왔고 어지러움은 점례 일행의 혼을 쏙 빼놓았다. 살다 살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속이 울렁거렸고 먹은 것은 다 토해냈다. 트럭 바닥에서 쉰 냄새가 올라왔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다. 점례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이러지 않아. 여기에 일본은 없다고. 난 일본으로 가야해, 그래야만 한다고. 그러나 점례는 그것을 바로 잡을수 있는 힘이 없었다. 힘이 없다고 생각하자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될 대로 되는 거다.

그녀는 자신이 홀로 아닌 것이 다행이다 싶었으나 비참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이것은 함께 있다고 해서 이겨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여럿인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때 불안은 극도에 달했다. 옆자리의 마른 소녀는 자신보다 멀미가 더 심한지 아예 안색이 없다 못해 파리하기까지 했다. 살다 살다 파란색의 얼굴은 처음 보았다. 파란 요정이 힘들어하고 있다. 눈에서는 눈물도 마른 지 오래였다. 초점 없는 눈에서 절망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조금만 참아보자. 트럭에서 내리면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돈도 줄 거야. 점례는 돈이라는 말에 반응을 보이는 소녀에게 그래, 많이 돈 벌 거야. 조금만 참자, 하고 달랬다.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돈에 잠깐 눈을 빛냈던 소녀는 다시 흰 눈동자를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넌 어떻게 견뎌내고 있어. 마른 소녀가 이렇게 묻고 있었다. 난 더는 못 참아. 소녀는 입을 달싹였다.

갈라진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물이라고 좀 먹었으면. 그러나 지급받은 물은 벌써 바닥이 났고 새로운 물은 지급되지 않았다. 소년의 입안에서 검은 혀가 어렵게 나와 입술의 피를 핧았다. 그만, 그만해. 점례는 차마 그 광경을 목격할 수 없었다. 보고 있는 것은 보지 않는 것보다 더 고욕이었다. 참을 수 없는 괴로움에 점례는 몸을 떨었다. 다른 소녀들도 하나 둘씩 지쳐갔고 곧 쓰러질 듯 심하게 흔들렸다. 자기 몸하나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지친 그들을 데리고 트럭은 자꾸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산을 타고 들을 지나 계속 앞으로가기만 하는 트럭은 멈춘다는 것을 잊은 듯했다. 멈추면 바퀴가 빠지고 엔진이 고장나서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트럭은 앞으로만 내달렸다. 지옥의 문은 멀고도 멀었다. 그냥 여기서 낭떨어지로 떨어지면 오죽 좋을까. 참을 만큼 참았던 소녀들은 창피한 것인지 아닌지도 모른 체 뱃속에 남은 것은 다 토해냈다.

여기저기서 욱욱 하는 토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것은 트럭이 뿜는 엔진음에 비하면 아주 작은 소음에 불과했다. 점례는 가까스로 손을 입에 댔으나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부끄러움이 있었다. 손에서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고 점례는 뒤쪽의 군인을 슬쩍 봤다. 군인들은 그런 소녀들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이 무심하게 총에 몸을 기댄 채 미동이 없었다. 점례는 보자기에 손을 쓱쓱 문질렀으나 점액질의 흔적을 다 지울 수는 없었다.

옆자리의 마른 소녀는 더 토할 것이 없는데도 자꾸 컥컥거리면서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붉게 충혈된 두 눈이 얼굴에서 빠져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점례는 했다. 저러다 눈알이 빠져나오면. 소녀는 장님이 되는 건가. 검은 물 한 모금까지 다 기워 냈을때 마른 소녀의 입에서 정말로 모기 만한 소리가 들렸다. 아니 소리는 없었다. 입모양을 보니 그랬다. 살려 주세요. 나 죽어요. 소리는 옆으로 퍼지지 않고 자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살려주세요.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소녀의 말에 반응은 없었다. 달리는 트럭 위에서 그 소녀의 말을 듣고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스로 살아야 한다. 아우성을 치든지 아니면 가만 있던지 알아서 처신해야 한다. 그래, 잘하고 있어. 더 큰 소리로 질러봐. 점례는 마른 소녀를 응원했다. 그러나 응원은 힘이 없었고 선수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그것을 신호로 여기저기서 웅성대지도 않았다. 그것뿐이었다.

살려 주세요. 저 죽어요. 아픈 소녀는 이제는 입술을 달싹이지도 못하고 눈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점례는 정신줄을 놓지 풀지 않았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틴 결과였다. 그러나 더는 무리였다. 점례 역시 죽음의 깊은 고랑으로 빠져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트럭의 맨 뒤에 타고 있던 두 명의 군인 가운데 한 명이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 살피기 위한 것이 귀찮은 태도였다.

그러나 군인은 제 할일을 뒤로 미루지 않고 앞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확인하기 위해 일어서야 했다. 군인은 그러면서 쓰러지지 않으려고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트럭에 매달린 고리를 잡았다. 여러 번 해본 솜씨였다. 그러나 일어섰다고는 하나 허리를 다 편 것은 아니었다. 공간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차는 계속해서 덜컹거렸기 때문에 일어선 것만 해도 대단한 중심 잡기였다. 겨우 그가 몸을 세웠다고 생각했을 때 차가 막 웅덩이를 통과했고 그 바람에 군인은 발을 헛디디면서 오물더미에 군홧발이 미끄러졌다.

넘어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난간을 잡은 손을 놓친 군인은 아픈 소녀 쪽으로 쓰러졌다. 강한 충격에 소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 군인은 심하게 화가 나 있었다.

군화의 한쪽에 밥풀이 묻어 있는 것을 그는 성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자기 자리로 가기 전에 군인은 힘을 주면서 애꿎은 아픈 소녀를 밀쳤다. 화풀이 대상이 된 것은 순전히 소녀가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소녀를 아랑곳하지 않고는 자신의 분풀이 대상으로 삼았다.

에이, 저리 꺼져. 더러운 것. 나직한 비명이 들렸다. 소녀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 소리는 그러나 너무 작아 옆에 있는 점례만이 겨우 그 소리를 들었다. 점례는 소녀를 보았다. 이제는 파란 얼굴이 검은빛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소녀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내지를 소리는 아파, 였다. 아파. 군인이 그 소리를 들었다. 아프다고. 네가 아프면 나는 이미 죽었다. 제자리로 가려던 군인은 밥풀 묻은 군홧발을 파리한 여자의 치마에 대고 씻었다. 에이, 더러워. 점례는 군인이 군홧발을 검정치마에 씻을 때 검정치마가 더러워지는 것을 보았다.

점례는 저도 모르고 윽하는 신음과 함께 남은 찌꺼기를 토해냈다. 토사물의 일부가 군인의 바짓가랑이가 가서 붙었다. 군인은 뒤돌아봤다. 그리고 흑빛 소녀가 이번에도 그랬다고 확신하면서 무서운 얼굴을 한 채 소녀의 따귀를 때렸다. 점례는 자신이 맞은 것처럼 오른쪽 뺨에 손을 갔다 댔다. 소녀는 그러지 못했다. 대신 충격으로 인해 점례 쪽으로 고개를 푹 꺾었다.

운전석 쪽에서는 뒤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유리창으로 운전자 옆자리의 장교가 고개를 돌려 간혹 뒤쪽을 살폈으나 지금은 꾸벅거리느라고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한바탕 소동 끝에 제자리로 간 군인은 소총을 가랑이 사이에 끼고는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겼다. 점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흑빛 소녀는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점례는 한 손으로 소녀의 어깨를 감싸고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안았다.

소녀는 점례가 아닌 군인으로 알고는 그와 몸이 닿지 않게 몸을 더 웅크렸다. 꾸벅거리던 군인은 자기의 한 행동 때문인지 다시 고개를 들어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녀 나이 또래인 그도 이들이 조금은 불쌍하게 보였다. 그러나 자신의 코가 석자인 만큼 호의를 베풀 만큼 인정이 많지는 않았다. 더구나 이번 길은 초행이 아니다. 처음에는 안쓰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한 여러 감정 때문에 소녀들을 조심스럽게 대했으나 계속 이런 일이 반복되자 시끈둥해진 것이다.

군인이 더이상 소녀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자 점례는 안도했다. 그래서인지 또 토가 올라왔다. 이번에도 자신의 차례가 왔음을 느꼈다. 토할 것 같다고 여기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의 깊은 안쪽에서 토사물이 다시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자신의 통제밖에 있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남의 토는 그런대로 참았으나 자신의 토만큼은 참기 어려웠다. 점례는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는 것에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분은 곧 풀렸다. 앞이 어질거리고 자꾸 어질거리다가 옆에 있는 사람이 하나로 보였다가 둘이었다가 자꾸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점례는 쓰러졌다. 고개를 기댄 소녀도 같이 쓰러졌다. 점례는 그러나 다 쓰러지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의자에 손을 짚었다. 그러나 제 몸무게를 못 이긴 파리한 소녀는 그만 좁은 바닥에 엎어졌다. 양쪽의 다리들이 엎어져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소년의 몸을 가운데로 밀어 댔다. 발길질했던 군인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앞쪽으로 다가와 유리문을 두드렸다. 잠에서 깬 장교가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따지는 눈치였다.

잠시 후 차가 멈췄다. 모두 내려. 좀 쉬었다 가자. 차에서 내린 여자들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쓰러질 듯하다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지는가 하면 그때까지 참았던 구토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잡을 수 있는 것은 뭐든 잡겠다는 듯이 작은 나무에도 자신의 온몸을 기대고는 윽윽, 거렸다. 이번 애들은 저번 애들보다 더 심하네. 어디서 들 온 애들이야. 장교가 물었고 군인이 충남 지역에서 온 애들이라고 말했다. 그쪽 애들이 몸이 허약한가. 장교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여전히 윽윽 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숲속에는 새들만 우는 것이 아니네. 인간들의 소리가 새 울음 소리보다 더 듣기가 좋아. 그래, 그렇게 좋아. 오케스트라처럼 연주를 해봐. 어이, 너. 장교가 군인을 불렀다. 그리고는 박자에 맞춰 노래불러봐. 군인은 그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했다. 그리고 아는 노래도 없었다. 그렇다고 명령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비장의 카드를 빼들었다. 그는 군가를 불렀다. 숲속에서 솔로로 부르는 젊은 남성의 돼지 멱따는 소리가 산위로 퍼져 나갔다.

장교는 그런 모습을 보고 웃겨 죽겠다는 듯이 아까보다 더 크게 웃었다. 숲속에 웃음소리가 봄 꿩이 우는 것처럼 꿩꿩하고 들렸다. 점례는 이게 무슨 일인가. 무슨 날벼락인가 생각했다. 세상에, 이게 무슨 꼴이람. 도저히 볼 수 없는 꼴을 당하면서 점례는 일이 점점 더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무엇이 우습다고 웃는가. 웃다가 지친 장교는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인 그가 옆에 있는 커다란 돌을 적당한 자리로 생각하고 그 위에 앉자 운전수와 뒷자석에 있던 군인 둘도 호위하듯이 그 주위에 따라 앉았다. 장교는 선심 쓰듯이 군인들에게 너희들도 피워, 하고는 담배 하나씩을 나눠줬다. 군인들은 벌떡 일어나서 충성을 올려붙이고는 콧구멍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나무를 잡고 있던 소녀들이 정신이 들쯤해서 군인은 인원 파악을 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부족했다.

이거 왜 이래. 분명히 19명이었는데 왜 18명뿐이야. 그리고는 주변을 옮겨 다녔다. 그리고는 죽었나, 하고 땅에 대고 워커발을 툭툭찼다. 점례는 거기로 눈을 돌렸다. 파리한 소녀는 일어나지 못했다. 군인은 두어번 더 걷어 차다가 장교에게 말했다. 못 일어나는데요. 장교가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도 부하처럼 군홧발로 툭툭찼다. 에, 재수없어. 죽었나 보다.

장교는 다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부하들에게 권하지 않고 혼자 연기를 내 뿜다가 묻어야지, 한마디 했다. 십 분 후 다시 트럭이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점례 일행은 한 곳에 도착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요새였다. 공장이라고는 눈에 띄지 않았다. 점례는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단단히 틀어져 버린 거야. 이를 어째, 난 어쩌면 좋아. 점례는 눈물이 핑 돌았다. 몸이 덜덜 떨렸다. 이가 서로 부딪쳐 딱딱 소리가 났다.

이런 일이 익숙한 군인들은 작은 막사 앞에 여자들을 억지로 줄 세웠다. 그리고 잠시 후 한 명씩 호명했고 호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씩 앞으로 나갔다. 그들은 거기서 자기 방을 배정받았다. 점례는 18번 방으로 들어갔다. 일인 일 실이었다. 그곳이 점례가 생활할 공간이었다. 점례는 여기가 내 집인가? 하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점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겨우 사람 하나가 들락거릴 정도로 작은 문을 앞으로 살짝 밀었다. 밖의 풍경이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창문 없는 방안이 너무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학교 운동장보다 서너 배는 더 큼직한 넓은 연병장을 사이에 두고 검은 막사들이 원의 형태로 두세 개씩 모여 있었다.

막사와 막사 사이는 간격이 있었고 병사들이 간혹 이 막사에서 저 막사로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하루가 지났다. 점례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알았다. 경성역에서, 신의주역에서 들었던 군홧발 소리가 바로 문 앞에서 들렸다. 그 소리는 경성역에서 신의주역에서 들었던 소리보다 더 컸고 더 무서웠다. 황급히 문을 닫았다. 군홧발 소리가 점점 약해졌다. 작은 문틈으로 점례는 다시 밖을 관찰했다. 누런 군복이 보였다. 처음에는 하나였으나 나중에는 줄로 이어졌다. 줄의 끝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래비를 섰군. 나래비야. 점례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눈을 돌리고 뒤로 물러섰다. 피할 수 있는 구석 쪽으로 뒷걸음질 친 점례는 보따리를 가슴에 안았다. 자신을 지켜줄 것은 이것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정작 그 일이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어 더 답답했다.닥쳐올 일은 점례의 가슴을 터져나가게 만들었다. 이것은 좋지 않은 것이었다. 급하게 뛰는 가슴 때문에 점례는 트럭에서 했던 것처럼 토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급하게 그녀는 입을 자기 손으로 틀어막았다.

돈을 버는 일이 이런 것인가. 논을 사는 꿈은 긴 줄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무서움이 몰려왔다. 그때 밖의 군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제자리에 서서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먹이를 다투는 사자의 것처럼 날카로웠다. 문이 열렸다. 자신이 열지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밖에서 잡아당긴 것이다. 고리를 걸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아니다. 애초에 고리는 없었다. 점례는 그런 생각을 했으나 곧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기절했다.

저녁이 되어서 점례는 깨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벌어졌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다. 다만 무거운 것이 몸 전체를 크게 누르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꿈을 꾸는 듯했다. 점례는 겨우 앉았던 몸을 쉽게 쓰러트렸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러다가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러기를 얼마를 되풀이했는지 모른다. 눈을 뜨고 눈을 감고 그런 영원의 시간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날은 바뀌었고 달은 지나갔다. 그러나 긴 줄은 날마다 이어졌다. 그것이 어제보다 긴지 짧은지 점례는 알지 못했다. 가늠할 수 없어 점례는 답답했다. 그러다가 군가를 부르는 소리와 문 앞에서 구르는 발소리가 멈추었을 때 점례는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이것이 내가 해야 할 내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여기에 공장은 없다. 기계도 없고 연기를 뿜어낼 높은 굴뚝도 없다. 다만 일렬로 늘어선 군인들만 있을 뿐이었다.

자다 깨다 다시 자기를 반복했다. 오늘이 며칠인지 이곳에 온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제대로 알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됐다. 기절하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대신 배가 고팠다. 허기가 졌다. 간혹 그들이 가져오는 군용 음식으로 요기를 했다. 음식을 가져오는 군인들이 고마웠다. 점례는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느껴 보면서 그런 고마운 군인들이 더 많았으면 싶었다.

먹고 자는 일 외에 점례는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과거의 기억이 사라졌다. 엄마의 얼굴도 생각나지 않았다. 고향이 죽마을인지도 모르겠다. 나이도 이름도 모른다. 그녀는 그저 하나의 짐승이었고 먹는 것과 자는 것 외에는 생각이라는 것도 없었다. 깜깜한 밤이었다. 낮은 없었고 밤만 있었다. 이곳은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가, 점례는 그것이 궁금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하루가 길었다. 또 어떤 날은 짧기도 했다. 길고 짧은 날들이 가고 어느 날 점례는 자신이 여기 온 지 팔개월이 지났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했던 점례는 이제는 군인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점례는 때로는 생각했다.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빠져나가게 해달라고 누군가에게 빌어야 했다. 그러나 냉수를 떠놓고 기도할 뒷간의 장독대는 없었다. 언덕 위 서낭당에 쌀 한 줌 놓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점례는 그렇게 간절히 기도를 원했다. 기도를 할 수 없게 되자 점례는 어릴 적 엄마가 들려주던 호랑이 이야기, 전설의 소금장수, 학교에서 배웠던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 등을 떠올리면서 군인들을 기다렸다.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어떤 지혜를 발휘해 위기를 벗어났는지 이따금 떠올렸다.

자신과 처지가 같은 옆방의 소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까. 점례는 그것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주쳐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누군가에 드러내는 것이 싫었다. 그냥 자신은 여기 있으나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조선 천지에 아니 만주 천지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도 아니고 산속의 짐승도 아니고 우리의 소도 아니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아무것도 아닌 것, 살아 있으나 죽은 목숨이 바로 나였다. 그러나 무심한 것은 세월이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면서 이것도 일상이라고 제법 익숙해졌다.

그러자 자신이 떠나 올 때 어떤 과정이었는지 뒤돌아보는 여유가 생겼다. 종이를 흔드는 순사와 벌써 논을 사기라도 한 듯이 흐뭇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와 옆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던 완용이 떠올랐다. 옆집 오빠였고 한 때 혼사까지 진지하게 오갔던 사이였다. 아버지는 완용이 순사를 따라다니면 순사가 될 것이라며 완용과의 혼사를 서둘렀다. 완용을 통해 팔자를 고쳐보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점례는 완용이 싫었다. 싫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조금 더 커서 혼례하겠다고 뒤로 미뤘다. 어머니도 거들었다. 순사가 된 다음에 혼례를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일 년 전이었다. 혼삿말이 난후 완용은 틈만 나면 점례에게 집적거렸다. 동네에는 내 여자가 됐다고 소문을 냈다. 그러나 점례는 완용보다는 윗마을 휴의 오빠에게 더 마음이 있었다. 혼사를 미룬 이유였다. 휴의는 완용과 달리 눈도 짝짝이가 아니었고 하는 행동도 미더웠다.

점례는 그 오빠 생각에 완용을 밀쳐냈던 것이다. 점례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부터 완용은 태도를 바꿨다. 트집을 잡거나 집안에 문제를 일으켜 아버지를 괴롭혔다. 그리고는 여순에게 호감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 일도 완용이 꾸민 것이라고 점례는 짐작했다. 하고 많은 처녀 가운데 자신과 여순을 꼭 찍어서 온 것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점례는 모든 것이 점차 선명해지자 일본군보다 완용이 더 미웠다. 그러나 미워할 대상은 멀리 있었다.

달나라만큼이나 멀고도 멀었다. 설사 가까이 있다고 치자. 그래봤자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래도 점례는 멀기보다는 가까이 있기를 원했다. 그랬다면 두 손으로 할퀴어 줄 수도 있다. 네가 원한 것이 정말로 이런 것이냐고 따져 물을 수 있다. 내 수치를 고스란히 그놈에게 먹여주고 싶었다. 내가 왜 사는지 아니? 네 놈에게 복수할 거야. 점례는 작은 주먹을 꼭쥐었다. 원한 가득한 말을 쏟아부어 살아 있어도 죽은 몸으로 만들고 싶었다. 내 인생은 이런 것이 아냐. 내가 원하지 안았다고. 네 놈 몸에 찢어 놓을 거야. 갈가리 찢어서 젖을 담을 거야. 점례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러나 눈물이 나왔다. 분노는 곧 체념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대로 죽는 건가. 숲속에 버려진 아픈 소녀가 차라리 부러웠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점례는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그러나 좀 자고 나면 어디서 생겨났는지 기운이 조금 붙어 있었다. 그러면 다시 저주를 퍼부었다. 겨우 숨만 쉴수 있는 힘만 붙어 있어도 점례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제는. 이제 다 필요없다. 저주도 분노도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 하늘의 달조차도 어머니가 떠놓고 기도하는 성황당의 약수도 효과가 없다. 좋아라, 하고 따라 다녔던 휴의와도 끝났다. 다 끝났다고 여기자 되레 몸이 편해졌다. 완용은 이제 분노의 대상도 돼주지 못했다. 그만큼 점례는 생명 없는 존재였다. 이미 죽은 몸이 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했다. 죽은 것은 몸뚱이뿐만이 아니라 정신까지였다. 육체에서 빠져나간 혼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낮도 밤이었고 밤은 하나의 커다란 암흑 덩어리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도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소총의 격렬한 반동도 점례는 애써 무시했다. 귀 기울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대는 대로 물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자. 대명천지 하늘 아래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이미 죽은 육신이 사라진들 아쉬울 것도 아까울 것도 없었다. 그러다가도 혹간 정신이 들면 눈물이 나왔다. 저도 모르게 볼을 타고 입가로 흘러들었다. 마를 것 같지 않은 눈물은 점례의 슬픔이었다.

깊은 슬픔 속에서 그녀는 되레 완용을 동정했다. 용서하고 잊으려고 했다. 네가 나를 죽여 살수 있다면 내가 죽어주마. 그것이 점례의 마음이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세상이 조금 태평해졌다. 미워하는 자를 용서해 주자 뜻밖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완용의 용서와 사과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그래 여기도 사람 사는 곳 아닌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을 거야. 그래 끝날 때까지 기다려보자.

인간의 눈이 아닌 짐승의 눈도 아닌 이상한 외계인의 눈으로 들이닥치는 군인들이 무섭지가 않았다. 무섭지 않은 것이 되레 무서울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무서움보다는 동정심이 일었다.

이런 내 마음을 하나님은 알고 있을까. 바다보다 넓고 하늘보다 높은 점례의 마음을. 하지만 이렇게 점례가 변했어도 그들은 한결같았다. 목 뒤에 총구의 끝이 닿기라고 하는 듯이 급하고 초조했다. 죽음의 모습을 점례는 산 자들을 통해 보았다. 죽어서 들어왔다가 살아서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점례는 그들이 나로 인해 위안을 받는다면 이것은 좋은 일인가? 자문해 보았다. 어림없고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게 준 것이 없다고 해도 내가 그들을 위 한하는 것은 내 마음이지 그들의 마음은 아니었다. 문열 열고 들어오는 그들은 인간이 아닌 하나의 물체였다. 그림자였다. 해를 따라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렇게 점례는 그들을 대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그 순간이면 점례도 인간이 아닌 하나의 물체였다. 눈을 감고도 눈뜬 자처럼 걸을 수 있는 눈먼 물체였다.

혼자 힘으로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다. 수호신의 도움이 필요했다. 밝은 불빛을 들고 나를 따라오라고, 간혹 뒤를 보면서 걷는 앞서가는 사람이 그리웠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넓고 포근한 등을 가진 수호신은 안 보였다. 보일 리가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녀 앞에 단 한 번도 나타날 수 없었다. 수호신이 사라진 날, 점례는 굳은 날에 깊은 바다를 건너는 어부처럼 이리저리 쓸리다 마침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정신을 잃는 순간이었다. 그러면 점례는 오늘을 기억 속에서 지우고 또 지웠다.

시간은 정지됐다. 아예 멈춰 서서 돌아가지 않았다. 고장 난 시계 속에서 점례는 한없는 잠 속에 빠져들었다. 막사 밖은 꽃이 피었을까. 눈이 내렸을까. 점례는 도통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 수 없어 괴로웠다. 그러다가 다시 깨어났다. 군인들이 사람의 눈이 아닌 짐승의 눈도 아닌 이상한 외계인의 눈으로 점례를 노려봤다. 점례가 눈을 뜨면 서로는 서로의 눈을 보고 놀랐다.

그러면 점례는 눈을 감았다. 먼 훗날 내가 이것을 회상할 수 있을까, 살아난다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이전의 점례가 될 수 있을까. 점례는 움직이지 않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중얼거렸다. 진저리나는 나날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굴복은 이미 오래전에 했다.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었다.

새장에 갇힌 새도 이보다는 나았다. 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을 찾았다. 금 나와라 뚝딱, 외치면 나오는 도깨비방망이가 필요했다. 순식간에 자신을 고향 죽마을로 데려갈 도깨비를 점례는 생각했다. 천장의 대들보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던 도깨비. 그가 나와서 방망이를 내리쳐 주었으면, 문을 열고 차례대로 들어오는 번뜩이는 두 개의 눈, 그 눈을 세게 쳐 주었으면.
 

호랑이를 타고 다니는 신선이 하얀 수염을 날리며 호통이라도 쳐 주었으면. 점례는 그런 것을 기다렸다. 사람이 아닌 도깨비와 호랑이.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날 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런 생각으로 점례는 거칠고 난폭한 호흡과 맞서 싸웠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한 떼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제자리 걷는 발자국 소리. 군가 소리가 일시에 멈췄다. 숨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도망가기 좋은 시간은 없었다.

그물을 빠져나갈 수 없을 때 물고는 버둥거리다 살점이 뜯겨나갔다. 살갛이 벗겨지고 허물어지고 마침내 뼈마저 사라져 버렸다. 나 스스로에게 말한다. 점례는 사람이 아니다. 짐승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먼지일 뿐이다. 왁자지껄한 저 소리는 적어도 일개 소대 병력은 될 것이다. 떠드는 소리로, 군홧발 울리는 발자국으로 점례는 줄지어 선 병사들의 숫자를 어림짐작했다.

그러면 그것은 대개 들어맞았다. 덜컥 문이 열리고 두 개의 눈이 발보다 먼저 방으로 들어왔다. 어쩔 수 없는 것에 점례는 다시 굴복했다. 아니 그냥 내버려 두었다. 정신을 어디로 모으고 버리고 할 형편이 못됐다. 간혹 바람이 불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사월이 멀지 않았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봄의 들판에서 점례는 아지랑이가 안개처럼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환영이 아니었다. 이른 민들레는 벌써 노란꽃을 피웠고 더 이른 것은 하얀 왕관을 쓰고 더 센 바람을 기다렸다. 나 날아가리라. 내가 바라는 곳으로. 점례는 민들레 씨앗이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점례는 들꽃이 환하게 핀 마을 들판으로 껑충껑충 달려나갔다. 보자기에 수를 놓기 위해서였다. 여순도 따라왔다. 둘은 언제나 같이 다녔다. 황토배기 언덕이 올려다보이는 느티나무 아래서 둘은 자리를 잡고 멀리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느꼈다.

한 땀 한 땀 뜨면서 점례는 점차 완성돼 가는 한 쌍의 학에 눈길을 주었다. 휴의와 완용이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무언가 뜨겁고 가느다란 것이 볼을 타고 스쳐 지나갔다. 휴의가 민들레 씨앗을 들고 점례 쪽으로 불었다. 점례는 뒤돌아보았다. 함지박만큼 큰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휴의. 점례는 휴의와 눈을 마주쳤다. 그 모습을 완용이 보았다. 속이 좁은 완용은 소여물을 줘야 한다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그러라고 눈치를 준 것도 아닌데 점례는 휴의의 장난이 미웠다.

여순은 속으로는 웃으면서 알면서도 모른 척했고 휴의는 나도 한 번 수를 한번 떠보자고 점례 쪽으로 달려들듯 하면서 말했다. 네가 하는 것이면 나도 하고 싶어. 다 할수는 없지만 수는 그럴 수 있을 거야. 그 말과 동시에 점례의 손에서 보자기를 받아들고 휴의는 서투른 솜씨로 바느질을 했다. 어 왜, 안되지. 수는 내 일이 아냐. 난 달릴거야. 저 들판으로. 휴의는 다시 보자기를 점례의 손에 들려주고 바람을 따라 달려나갔다. 비뚤어진 솜씨를 점례는 바로 잡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살려보자. 그렇지. 해보니 되네. 점례는 혼자 말을 하면서 휴의가 뜨다 만 수를 다시 놓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점례는 일어나 앉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벌써 군인들이 오는 소리가 들려. 달려오고 있어. 그들은 휴의보다 더 빨리 달렸다. 어깨에 멘 총의 개머리판이 철컥철컥 박자를 맞추면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환청이었다. 아직 군인들은 전선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점례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 차리자, 점례야. 점례는 자신에게 이런 다짐을 했다. 점례가 있는 방은 뒤로 나가는 문이 하나 있었다. 그것이 창문의 역할을 했다. 점례는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막사 옆에 딸린 화장실 앞에서 그녀는 자신 또래의 조선 여자 셋이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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