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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처럼 마음도 왔다갔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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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처럼 마음도 왔다갔다 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22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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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점례는 몇 줄 읽다 그만두었다. 눈은 글자를 따라 갔으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전선의 유마는 안전할까. 만주를 떠나 태평양 어딘가로 떠난다고 했다. 굳이 더 힘든 곳으로 가는 이유를 그는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하긴 했다. 그냥, 전쟁을 확실히 느끼고 싶을 뿐이야. 이 정도였다. 그는 전투병과가 아닌 것에 대해 조금 심심하다고 토로한 적이 있었다. 여긴 후방이야 후방. 전방 사황이 궁금해. 전방에 간 그는 총을 들고 직접 싸우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안전이 걱정됐다. 

하루가 지났을 뿐 인데 점례는 한 달이 지난 것 같은 세월을 느꼈다. 다만 너와 같이 있을 수 없어, 그러니 경성으로 가서 나를 기다려. 어쩌면 나고 곧 갈지도 몰라. 아련한 그 말을 귓등에 남겨둔채 점례는 책갈피 속에 있는 사진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리고는 네 개의 눈과 차례로 마주치면서 아들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빌었다.

마음이 고요가 찾아왔고 이제 혼자가 된 그녀는 혼자된 삶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유마가 원하던 것만 하면 됐던 점례는 이제는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이것이 자유인가. 자유의 냄새는 이렇게 고요하게 찾아오나 보다. 이런 자유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점례는 기차처럼 긴 자유를 원하고 있는 내면을 인식했다. 

경성으로 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또다시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집에서 버려졌고 유마가 날 버렸다고 처음에는 생각했으나 그것은 나에게 찾아온 자유지 버려진 것이 아니었다.

나는 쓰다가 실증이 나서 누가 버려도 좋을 그런 물건이 아니다. 가도 좋다고 말한 주인을 원망하는 노예가 나일 수는 없다. 위태롭게 홀로 떠 있다고 해도 누군가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사방은 고요했다. 어디로 떠밀려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도착지가 어디든 그녀는 혼자서 닥쳐올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했다.  그것이 무겁든 가볍든 말이다.  

헤쳐나가야 하는 숲길은 무거운 돌과 무서운 가시 천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 역시 감당해야 할 것임을 알았다. 나 대신 누가 해준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에 없던 오기가 갑자기 생겼다. 노가 없으면 손으로 저어 나가면 된다는. 유마는 경성에 가면 삼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것은 큰 힘이 된다. 그러나 전적으로 삼촌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도움을 주면 받되 스스로 뿌리내려야 한다. 

거처가 마련되면 내 일거리를 찾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환경이 조성되면 게을리 하지 않겠다. 그녀는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삼촌은 나를 반겨줄까. 환하게 웃어줄까. 서천 장터에서 송아지 한 마리 사온 아버지를 향해 온 식구가 달려들듯이 그렇게 환영해 줄까. 

엄마가 천웅 오일 장에 가서 옷감 한 벌과 자수용 실을 사 왔을 때 짓던 웃음을 점례는 기억해 냈다. 내가 웃었지. 크게 웃었단 말이야. 정말로 기뻤고 그것은 행복이었다. 그런 행복을 삼촌을 통해 다시 받을 수 있을까. 거처는 인사동 근처가 되겠지. 구한 거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다시 오라고 삼촌은 또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배려해 줄까. 

아니면 집이 크고 빈 공간이 많으니 여기서 살라고 선뜻 인정을 베풀까. 내 집처럼 사용하라는 삼촌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화장대도 사주면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바꾸어도 좋다고 삼촌은 당연히 해야 할 말이라는 듯이 하고 있다. 그 옆에 있는 작고 아담한 숙모 또한 그렇게 하라고 거든다. 아가씨, 걱정마. 돈은 얼마든지 있어. 아닙니다.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과분하지요. 저에게는 이것도. 

그녀는 한꺼번에 많이 먹어 부른 배를 가볍게 치면서 더는 먹을 수 없다고 사양하는 자신의 겸손을 미리 체험했다. 점례는 어느 순간에도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처럼 언제든지 그들에게 매달릴 각오가 되 있었다. 삼촌의 그림 솜씨는 얼마나 될까. 그림을 보는 안목은? 삼촌은 그림을 원하는 점례의 소원에 따라 이것저것 가르치면서 조선의 유명화가로 키우는데 자식처럼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 드는 돈은 점례가 벌 것이다. 아니 다는 못 갚아도 일부는 변제해야 한다. 연필도 그것을 깎는 칼도, 물감을 담을 화구도 점례는 자신이 벌어서 살 자신이 있었다. 이것만큼은 그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지닌 최소한 자존심이라고 점례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는 혼자의 삶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기댈 언덕은 마련됐으니 이런 여유는 자연히 뒤따라 왔다. 두려움 없이 나아가자. 여차하면 조선청년이 준 다른 곳으로 가보지 뭐. 그 청년은 그 주소에 가서 나를 대면 큰 도움은 아니어도 임시방편으로는 써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점례는 거기까지는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왠지 마음에 걸렸고 혹 자신도 위험한 일을 하는 청년처엄 위험한 일에 엮어들까 하는 조심성이 발동했다. 조선청년을 제외하자 이번에는 사진 속의 유마 아버지가 떠올랐다. 

일본에 있는 유력 정치가인 유마 부친 또한 든든한 버팀목이 아닌가. 열심히 노력해서 그들의 눈에 드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점례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유마 호사카를 위해 마음만은 같이 있을 때 보다 더 가까이 있기 위해 여러번 그를 위해  살겠다고 빌고 또 빌었다.

그것이 그가 나에게 베풀어준 호의에 대한 보답이다. 그와 함께 소비했던 다정했던 순간들에 대한 감사였다. 검은 머리 짐승은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 가끔 있다. 그러나 점례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 어떻게 그를 배신할 수 있을까. 조선에 있다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고 헌신짝 버리듯이 유마를 잊을수는 없다.  점례의 마음은 흔들리는 갈대처럼 이리저리 마구 생각의 바람에 따라 왔다갔다 했다. 

그래, 지금은 비록 장마철의 날씨처럼 변덕이 심하지만 다잡을 날이 올거야. 나는 나의 예감을 믿어. 다른 건 몰라도 내 마음 만큼은 순전히 그의 것이지. 악착같이 일하고 밤새워 배우겠다. 한순간도 빈둥거리지 않을 자신감으로 점례는 뭉쳐 있었다.

군인처럼 철저하게 무장해서 크게 성공하는 조선 화가가 되겠다. 어느 순간 그녀는 홀로 우뚝섰다. 그래서 혼자였을 때 점례는 되레 당당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다음 역에 내려볼까. 이것저것 구경해 볼까. 역 주변에는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여기저기 쌓여 있다.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적당한 가격에 흥정한다.

그녀는 방금 사서 손에 든 것을 흔들면서 콧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내린 곳 주변의 경치가 좋은 여관에 들어 며칠 묵고 간다. 그리고 구경하다가, 구경하다가 지치면 다시 기차를 타는 거지. 그래도 되는 거야. 점례야 정신차려. 점례는 거기서 앞으로만 나가는 생각을 멈추었다.

행복하던 점례가 샛길로 빠진 생각을 갑자기 바꾼 것은 헤어진 조선 청년이 눈 앞을 가로막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점례는 청년을 보자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유마를 걱정하던 그녀는 만주 청년의 앞길에 거대한 산에 가로막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가 산을 넘을 수 있을까. 산 너머에는 그가 원하는 세상이 있을까. 그 너머에 혹시 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를 보러 그가 달려올 수 있을까.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을 쓰며 청년이 나를 부르고 있다.

그녀는 마주 달려나가다가 멈칫했다. 아니다. 그를 만나는 것은 유마를 배신하는 것이다. 그녀의 생각은 끝이 없었다. 느린 속도로 가는 기차는 그녀에게 무엇을 상상하든 자유라고 일깨워 주고 있었다. 드디어 점례는 생각의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자신이 다른 길로 가는 생각을 그만 두었다. 생각조차도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어려운 시기는 끝났고 지금은 만족하는데 또다른 어려움에 봉착하고 싶지 않았다.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자는 것이 점례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아. 암 옳고 말고. 점례는 이를 들러내지 않고 얼굴 표정을 감추고는 속으로만 웃음을 지었다.

봄이 오는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그러나 창밖으로 보이는 먼 산의 꼭대기에는 흰 눈이 덮여 있었고 초원은 회색의 때를 다 벗지는 못하고 있었다. 기차 안은 가득한 사람들이 내 뿜은 열기로 늘 후끈 거렸다.

이제는 춥기는커녕 되레 더울 지경이었다. 그럴 때는 창밖을 보면서 몸을 식히는 것이 좋았다. 간혹 흰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그 집에서 옹기종기 모여 식사하는 단란한 가족들이 슬쩍슬쩍 스쳐 지나갔다. 길고 긴 여행이었다. 기차는 경적음을 울리며 역마다 섰고 선 다음에는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일경들은 간혹 올라탔으나 만주에서와 같은 심한 검문은 없었다. 대개는 한 번 눈으로 훑어보고는 그냥 내렸다. 그런 것이 습관이 되자 이제는 순사를 보고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괜히 올라와 시간 낭비만 했다는 표정이 그들의 뒷모습에 고스란히 찍힐때면 이런 구경거리가 더는 없었으면 싶기도 했다.

승객들은 완장 찬 그들이 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고는 그들이 내리면 이내 안도하는 한숨을 내쉬고는 각자 떠들던 대화에 열중했다. 평양역에 내린 경찰들은 각자의 위치를 찾아가기 위해 왔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말하고 걷고 돌아서는 모습도 그랬다. 완용이 의심스러웠다. 점례는 그럴 리가 없다면서도 확인하기 위해 창가에 눈을 바짝 기댔다. 틀림없다는 확신이 서지는 않았지만 완용이 맞는 것 같다. 같은 것이 아니라 완용이었다. 도완용. 맞아. 그다. 그가 아니면 점례가 본 듯한 사람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그가 경찰이 됐나. 그럴 수 있다. 죽마을에서 순사의 하인 역할을 하면서 읍의 말단 서기였던 것이 완용이었다는 것을 독자들은 알 것이다. 점례는 그가 순사를 따라 여순네 집에 왔던 것을 상기했다. 그녀는 그때 이불 속에서 오금이 저렸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해 냈다. 발을 꼬면서 긴장으로 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었다.

완용이 일제 경찰이 됐구나. 점례는 순간 자신의 길을 찾아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완용이 그 목적을 이룬 것이 멋지게 보였다. 일본인 경찰에서 느꼈던 불안함이 조선인 경찰에서는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그래, 그라면 조선인에게 함부로 대하지는 않겠지. 

점례에게 조선인은 모두 같은 편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자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다는 그동안의 원한이 떠올랐다.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곳에 있을리 없다. 만주의 막사에서 죽었다 살아나는 경험도 없을 것이고.

치를 떨며 평생 기억속에 있어야할 치욕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결과가 좋다. 그러니 완용의 선택은 나에게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다. 점례는 또다시 홀가분했다. 완용은 몰랐을 것이다. 그런 곳으로 자신과 여순이 갈 것을 미리 알았을 리 없다. 그걸 미리 알고도 그랬을리 없다. 

착한 마음으로, 이웃을 위하는 마음으로 일본에 가서 돈 벌어 오라고 호의를 베풀었던 것이다. 그래서 떠나기 전날 부모님이 고맙다고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고개를 숙이기까지 하지 않았나. 선택받은 사람이 하필 자신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어려움에 처해 죽겠다고 자수를 뜬 천의 끈을 묶었을 때도 변하지 않았다. 저주하는 마음 대신 그가 죽마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순사의 횡포를 막아주고 조선인을 위해 많은 일을 할 거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너 때문에 돈도 많이 벌고 훌륭한 화가가 됐다. 고마움을 표시해야 옳지 않은가. 뒤따라 내려볼까, 그래야 겠지. 아는 체를 하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겠지. 나는 지금 경성으로 가는데 거기 인사동으로 찾아오면 답례를 하겠다고 전해야겠지.

점례가 이렇게 멈칫거리는 순간 기차는 출발하고 있었다. 긴 경적음을 올리면서 앞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완용은 휴의의 소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휴의는 어디 있는지 물어볼까. 점례는 갑자기 휴의가 보고 싶었다. 바다로 나가지 못하는 어부가 바람이 어서 잦아들기를 바라는 심정이 점례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내리자. 내려서 불러세우자. 

겨우 걷기 시작한 막 돌을 지난 아기처럼 아장거려서라도 완용에게 닿아야 했다. 점례는 아직 잡지도 않은 생선을 어디부터 손질해야 좋을지 몰라 안절 부절하는 어부의 부인처럼 몸이 달아올랐다.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이 점례는 미워지기 시작했다. 눈썰미 없음을 자책했다. 완용이라니. 여기서 완용을 보다니. 

기차가 더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점례는 그에게 아는 체를 하면서 다가갔을 것이다. 그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도 상관치 않겠다. 당황하든 말든 모른 척하든 휴의는 잘 있는지 묻고 싶었다. 완용오빠, 휴의 오빠는 잘 있지? 입속에서 그 말이 자꾸 맴돌았다. 

그러나 계산 착오라고 사람 잘못 봤다고 나는 완용아니라고 완용이 머리를 완강하게 젓고 있다. 이해 할 수 없는 말로 둘러대면서 나는 일본경찰이 아냐, 그런 말을 되풀을 하면서 완용이 점례가 볼 수 없는 곳까지 급하게 달려갔다.

종일 팔리지 않은 만주역의 쌓인 물건처럼 점례는 갑자기 축 처지는 느낌이 들었다. 심연 깊은 곳으로 자꾸 가라 앉고 있었다. 이유도 없이 자기 나라에서 추방된 비참한 인간의 기분으로 점례는 멍하니 눈길을 밖으로 주었다.

평야을 출발한 기차는 목적지인 경성을 향해 남으로 남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밤이 지난 지 한 참 이어서 밖은 이미 깊은 어둠에 잠겼을 때 점례는 깜박 졸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희미한 불빛 아래서 연필을 잡았다. 그리고는 엽서 크기만한 작은 크기의 노트를 펼치고 초상화를 그려 나갔다.

연필을 잡은 손이 흔들렸다. 그러나 점례는 쓱쓱 대충 대충 그려 나갔다. 어차피 어두워서 그리려고 했던 대상이 틀렸어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점례는 마음이 편했다. 날이 밝으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면서 점례는 잡은 연필을 빠르게 혹은 천천히 놀렸다.

그림을 그릴 때 점례는 행복했다. 만족한 마음은 이런 것이다. 밤은 점례의 마음을 이렇게 돌려 놓았다. 완용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가 다시 점례 앞에 나타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점례는 그를 정말로 깡그리 잊었다. 그를 뒤따라 내리려고 했던 좀 전의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유마 호사카 부모의 얼굴 형태를 떠올렸다. 사진으로 수도 없이 보았던 인자하게 웃던 두 분의 다정한 모습. 그 순간 휴의 또한 완용처럼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조선 청년의 얼굴이 감깐 보였으나 그도 그녀의 의식 속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대신 거기에 유마 호사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점례는 거기에서 그림 그리기를 중단했다. 그럴 마음이 갑자기 떠났던 것이다. 더 그리고 싶은 조금 남은 미련은 뒤로 미뤘다. 갑자기 유마 부모님께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기도는 이제 점례의 숨쉬기처럼 습관이 됐다.

신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었다. 유마 부모가 지금 순간 신이었고 그녀는 아들을 위해 부모이며 신이 힘을 모아달라고 간절한 염원을 담아 두 손을 모았다. 유마 호사카를 살려 주세요. 총알이 비켜가고 파편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그래서 유마가 다치지 않고 온전한 몸으로 나에게 오도록 해주세요.

그녀는 모은 손을 꼭 잡았다. 신의 기도는 어느 새 다짐으로 바뀌었다. 그럴거야. 그는 죽지도 다치지도 않아. 살아서 건강한 모습으로 경성에서 다시 만나는 거야. 그러나 잠시 후 이런 기도와 다짐도 시들해 졌다. 점례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해 눈을 감았다.

점례가 평양역에서 본 것은 완용이 맞았다. 그는 점례와 여순이 떠나고 나서 순사가 됐다. 순사 하인에서 부하가 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2 년이면 충분했다. 순사의 말 고삐를 잡았던 죽마을 청년이 어렷한 일제 순사가 된 것을 죽마을을 모두 축하했다. 마을 사람들이 보기에 좋았고 특히 완용 자신이 보기에 더 그랬다.

죽마을 사람들은 일본인 순사보다는 조선인 순사에 거는 기대가 컸다. 혹시 모를 외압을 막아주고 부당한 일이 생기면 억울함을 해결해 주면 이유없이 끌려가서 맞거나 감옥에 갇히는 일이 없을 것을 기대했다. 그런 마음으로 마을 사람들은 완용네 집을 찾아 축하인사를 건네면서 돼지를 잡고 잔치를 열었다. 

그러나 완용이 순사가 된 것은 마을 사람들의 이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잡아들이고 심문하는 것이 체질에 맞았던 것이다. 호통을 치고 위세를 부리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완용은 순사 일을 제대로 해내기 시작했다. 상관이 보기에 그는 탁월한 제국주의 순사였다. 

안에서는 굳은일을 도맡아 담당했고 밖에 나와서는 호랑이 두렵지 않을 기세로 민심을 사로 잡았다. 그가 가는 곳은 정말로 호랑이가 나타난 것처럼 사람들이 무서움에 떨었고 일제는 그런 그를 조센징치고는 제법이라고 추어 올렸다. 

마을 사람들의 기대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도 다른 일본인 순사와 다르지 않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되레 일본순사보다 더 악질적으로 나왔다. 무섭게 패고 거침없이 가두었다. 원하는 것을 알아서 스스로 하자 서의 책임자는 그를 눈여겨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재목으로 키워야할 인재로 점찍었다. 

마을 사람들은 저주했다. 완용이 왜놈보다 더 심하다고 잔치를 벌인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곧 동정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민심이 변하기 시작했다. 조선인이 일본인들 틈에서 버티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수군거렸다. 오죽하면 그러겠느냐고 우리가 더 좀 조심하자고 서로를 다독였다. 힘앞에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무렵 천웅 읍내는 연일 출병을 모집하고 독려하는 연설로 시끌벅적했다. 휴의도 장터 한 곳에서 서 있었다. 전날 완용이 너도 가보라고 그러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한 말 때문이었다.

서둘러 입대해라, 황국신민으로 전선에 나가 승리에 보탬이 되라. 사내 자식이 촌구석이라고 농사짓는 것이 말이 되느냐. 농사일 핑계 대지 말고 전선으로 떠나서 황국 신민의 자존심을 세우라고 다그쳤다.

그  말이 귓가를 울렸다. 가족의 생계 때문에, 자신이 떠나면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지을 인력이 없어 머뭇거리던 휴의는 완용의 이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또래들은 하나 둘씩 전선으로 나갔고 읍내에 남아 있는 청년들은 몇 사람 되지 않았다. 휴의는 막차라도 타야 한다는 심정으로 연단에 오른 백발노인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소학교 때 교장이었고 지금은 은퇴해 후학들에게 책 대신, 쟁기질 대신에 총을 잡으라고 독려하고 있었다. 가자, 조선의 젊은 청년들이여. 내선일체의 힘을 보여주자. 우리는 자랑스런 황국의 신민이다. 싸워서 조국의 명예를 드높이자. 

그의 말은 심장을 끊게 했고 젊은 피를 뜨겁게 달궜다. 구경하기 위해 모인 군중들이 모두 마음에 드는 사람인 것처럼 교장은 애정이 듬뿍 담긴 어조로 연단 아래의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의 입언저리는 연설에 열중하느라 닦지 못한 침이 소의 거품처럼 뭉쳐서 말을 할 때 마다 보글보글 끓어 올랐다.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마을지주도 연단에 올랐다. 그는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애국이라며 자신이 몇 년만 젊었어도 이 자리에 있지 않고 총을 들고 적과 싸우고 있을 거라며 탁자를 두드렸다. 워낙 큰 소리에 장터의 개들조차 짖기를 멈추고 꼬리만 흔들어댔다. 

이런 상황이니 귀를 기울이지 않고 딴청을 부리는 것은 죄가 된다는 듯이 모인 군중들은 서로에게 집중하자고 주의를 주면서 연단으로 기어 올라 갈 듯이 모두 앞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한 소리라도 놓치지 말겠다는 숙연함이 군중 사이를 감싸고 돌았다.

지주는 조선의 애국청년들이여, 황국 신민의 역할을 다하라. 지금은 농사짓는 때가 아니다. 책을 들고 허송세월을 보낸다면 조국은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당장 지원서에 서명하라. 여기에 지장을 붉은 지장을 꾹 눌러라. 

어디서 주어 들었는지 아니면 누가 대신 써준 것인지 그는 애국과 황국 신민을 강조하면서 싸우러 나가자, 지금이 적기다 라면서 또한번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사람들이 또다시 열렬한 박수로 화답했다. 환호성을 질렀다. 다 옳은 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딱 들어 맞는 말이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휴의는 당연히 그래야 하고 더 늦출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지주는 연설 막바지에서 자발적으로 영예롭게 가지 않으면 나중에 강제로 끌려 갈 수 있다는 식으로 협박했다. 네 다리로 기어 갈 수만 있다면 그런 성한 남자라면 당장 전선으로 가라, 꾸물대지 말고 달려가라고 재촉했다.

휴의가 빠져 나갈 구멍은 없었다. 그는 결심한 것을 털어 놓으려는 듯 얼굴을 굳히고 두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그래, 내가 간다. 적들아 숨지 말고 나타나라. 내가 한 방에 다 쓸어주마. 자랑스런 나는 황국의 군인이다. 

휴의는 그날 저녁 완용과 마주 앉았다. 한 시간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린 끝에 성사된 만남이었다. 완용은 휴의를 보고 조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바빠 너를 만날 수 없는데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느냐는 식이었다.

변해가는 완용에 휴의는 그가 예전의 완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믿을 구석은 친구밖에 없지 않은가. 상의할 사람도 완용밖에 없다. 설사 이제는 남보다 못한 친구가 됐다고 완용은 지금 휴의가 가장 믿고 기댈 친구였다. 

휴의는 지난 순사 채용에서 완용이 자신 대신 다른 사람을 추천한 것을 알고 있었다. 완용이 자신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모질게 먹었으나 아직은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순사가 된 이후 완용은 부족한 순사 인원을 충원하기 위해 재목감을 추천하라는 상부 지시를 받고 휴의 대신 다른이를 뽑도록 했다.

그 사실을  휴의가 알고 있다고 판단한 완용은 그때부터 노골적으로 휴의를 남처럼 대했다. 그런 완용을 보면서 휴의는 나중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지 완용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의 선택이 옳았고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 순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 일 이후로 완용은 휴의와 만나는 것도 피하고 어쩌다 만나서도 거드름을 피웠다.

이제 너와는 다른 나라는 거만함이 얼굴 가득 묻어났다. 순사와 농군이 같을 수가 없다. 언제든지 완용은 이유없이 동휴를 체포할 수 있다. 그리고 차고 있는 권총으로 죽일 수도 있다. 네 생명은 내 손안에 있다는 식의 완용 태도에 휴의는 절망했다. 도피처는 전쟁터 밖에 없었다.

아직도 결정을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태도에 불만을 품었던 완용은 다짜고짜 휴의를 몰아세웠다. 어쩌자고 너만 이러고 있니, 그러고도 네가 내 친구냐고 닦달했다. 너 당장 지원하지 않으면 내 친구 아니다. 완용이 무섭게 노려봤다.

노려보는 눈빛보다 휴의는 그가 친구를 들먹인 사실이 아니꼬왔다. 친구라고. 나쁜 놈. 그래 나는 너보다 앞서겠다. 휴의는 속마음을 이렇게 감추면서 자신이 오늘 면에서 들은 연설과 그에 따른 자신의 결심을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완용은 눈치채지 몫하고 경찰서에서 내가 챙피해 죽겠다. 너 때문에 내가 순사질에 지장을 받는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트렸다. 친구 잘 못 둔 죄지. 완용이 침을 뱉었다. 

그러다가 휴의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는 너무 심했다고 느꼈는지 달래는 투로 농사는 어떻게 될 것이다, 산 입에 거미줄 치겠니. 아무렴 내가 네 집 식구하나 건사하지 못하겠니. 간혹 살펴 주마. 그러니 걱정말고 결심해라. 

그는 친구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푼다는 듯이 떠벌였다. 옆구리에 찬 칼집을 만지작 거리며 그는 당장 내일이라고 여기를 벗어나라고 위협했다.

언제까지 빈둥 거리고 있을래. 그는 날이 선 제복의 어깨선을 게슴츠레 한 눈으로 따라 내려오면서 흘낏 친구를 노려봤다. 이래도 네가 내 말을 들지 않고 배길 것이냐 하는 노골적인 경고였다.

빈둥거린다는 말에 휴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맞다. 자신은 빈둥거리고 있다. 그는 눈을 들어 완용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을 순순히 따르겠다는 동의의 표시였다.

완용은 알았다는 듯이 내일 서에 가서 네가 자진 입대하겠다고 그것도 최전선으로 가겠다고 보고 하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설득해서 그를 끌어 들였고 그것이 순사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보증으로 보여지기를 완용은 바랐다.

조국을 위해 애쓰는 나와는 다른 완용이 휴의는 부러웠다. 신민된 처지에 대일본 제국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그는 이미 친구 이상의 그 무엇이 되어 있었다.

그 옆에 나란히 서서 서로에게 자랑 거리가 돼고 싶다는 계획은 틀어졌다. 휴의는 처음으로 술에 취했다. 그 김에 그는 점례와 여순의 소식을 아느냐고 물었다. 꾹 참았던 하려고 했던 말이었다.

정보에 빠른 너라면 그들이 일본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않느냐고 아는 것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다. 벌써 일년 째 그녀들은 편지 한 장 없어 부모는 속을 태우고 있었고 그것을 완용이 모를리 없었다.

어쩌다 발 발굽 소리가 나면 그들은 먼발치에서 보고 버선발로 쫓아와 우리 점례 소식 아는가, 여순 소식 들었는가 하고 완용에게 매달렸다. 완용은 그러면 노친네들이 망령 들렸다는 듯이 깔보는 표정을 지으면서 차마 하대는 하지 못하고 잘 있겠죠 라는 간단한 대답을 한 후 매몰차게 그들을 따돌렸다.

완용의 눈에는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재촉하는 그들이 불쌍하기보다 한심스럽게 보였다. 설사 잘못됐다고 해도 그것이 다 신민의 역할을 하다 그런 것인데 그것 하나 참지 못하는 아둔함을 을 질타했다.

애국심 같은 건 하나도 없는 촌사람들이라고 완용은 그들을 무시했다. 나도 몰라. 잘 있겠지. 완용은 남의 일처럼 지나가듯이 말했다. 휴의는 주먹질이라도하고 싶었다. 네 놈이 끌고 가서는 뒤도 봐주지 않고 생사 조차 알려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신을 내려 놓았기 때문에 생각은 전선에 가 있었다.

휴의는 보란 듯이 싸우고 싶었다. 그래서 전과를 올리고 훌륭한 제국의 군인이 돼서 훈장을 달고 금의환양해 완용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는 굳힌 결심을 확고히 하기 위해 혀를 가볍게 깨물었다.

너보다 나은 내가 돼서 돌아오리라. 다른 사람의 방식이 아닌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이기겠다는 각오가 휴의의 마음을 불살랐다. 신민 가운데 우뚝 서고 싶은 젊은 피는 조국을 위해 끊어올랐다. 청년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그러기에 충분한 나이였다.

가장 앞서 나가고 가장 먼저 승리의 깃발을 꼽겠다는 각오로 휴의는 술집을 박차고 나왔다. 더 있다가는 속마음을 들킬 것 같았다. 괜히 털어 놓았나. 말없이 갔어도 됐는데 무슨 미련이 남아서 완용에게 추태를 부렸는지 모른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점례와 여순의 안부를 물은 것은 실수였다.

그래 너는 순사로 성공해라. 난 군인의 길을 간다. 휴의는 그 말을 남기고 경찰서 옆의 장터를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여기서 죽마을까지는 대략 시오리가 조금 넘었다. 휴의는 한 시간 정도 걷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이곳에는 인가가 없다. 깊은 골의 초입에는 대신 묘 두 개가 나란히 섰다. 길 옆에 있어 오고 가던 사람들은 눈 짓이나 손 짓으로 늘 쌍묘라고 불렀다. 이 곳을 지났느냐로 장터가 가까워지고 집으로 가는 길의 시작점 정도로 여겼으므로 대화를 할 때면 쌍묘가 기준이 되기도 했다.

쌍묘를 벗어나면 장터가 멀리서 아른거렸다. 반대쪽에서 보면 가파른 길이 겨우 한 사람 지나갈 정도로 나 있었다. 길에 접어 들면서 휴의는 조금 비틀거렸다. 일부러 넘어지려는 흉내를 내 보이기 까지 했다. 빡 고꾸라질까. 그런데 정말로 몸이 쌍묘 쪽으로 쓰러졌다. 술취한 사람들처럼 그대로 폭싹 가라앉고 싶었는데 생각대로 그대로 됐다.

오월의 흙은 춥지도 덥지도 않고 적당했다. 언제나 손질이 잘 된 쌍묘의 표면에 잔디가 자라고 있었다. 살갛에 닿아도 아프지 않은 것이 막 나온 연한 새싹이었다. 새싹은 보드랍게 꺾였고 쓰러진 자리에서는 풀 냄새를 풍겼다. 그는 쓰러진 채로 한 동안 그대로 있었다.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쌍묘 앞을 지날 때면 몸이 오싹한 것은 죽은 귀신이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서늘한 기운은 그래서 느끼는 것이라고 했다. 죽은 자의 원혼이 왜 방황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불효라고 저질렀나. 억울한 죽음이었을까. 

아무튼 그래서 거기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멈추지 않고 고갯마루 까지 와서야 사람들은 쉬었다. 지게에 무거운 짐을 진 농군들도 그렇게 했다. 힘든 것보다 귀신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휴의는 그런 것을 믿지 않았다. 죽은 귀신이 산 귀신을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다 말 뿐이라는 것을 알만큼 그는 성숙해 있었다.

대신 그는 쌍묘의 자손들이 참으로 효자구나 생각했다. 언제나 다듬어져 있는 묘가 보기 좋았다.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열심히 살았고 그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나쁜 기운이 든다면 그것은 그 사람 탓이다.

나에게는 서늘한 기운은 커녕 따뜻하게 몸을 감싸고 도는 것이 억울하게 죽은 원혼의 망령이 아니라 곱게 살다 제명에 죽은 혼백이 산 사람을 위로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을 느끼면 효의는 자신은 어떤 자식이 되고 싶은지 궁금했다. 궁금한 것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일이면 이곳을 떠난 다는 사실 뿐이었다.

자칫 두 번 다시 쌍묘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희미한 달빛이 동쪽에서 떠오르기 시작해 산정을 어스푸레 하게 밝히고 있었다. 휴의는 일어나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자신의 운명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그려 보았다. 훈장을 달고 당당하게 대문간으로 들어 서기도 했고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모습도 떠올랐다.

아예 죽어서 누군가가 흙으로 자신을 덮고 있기도 했다. 그런 모습들이 어떤 때는 꼭 자신과 같기도 했고 어떤 때는 엇비슷하지도 않은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사라졌다.

물들어 올 때 노 저어 가자. 지금 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하면서 산다. 순사 못됐으나 군인은 될 수 있다. 어떤 것이든 그것은 자신의 운명이고 닥쳐올 것은 닥쳐 오기 때문에 피할 수 없었다. 달을 벗 삼아 한티재를 오르기 위해 휴의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는 군인처럼 딱 소리가 나게 손을 이마에 갖다 붙였다.

지금 부터 나는 멋진 군인이다. 충성. 덴노 반자이. 그는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그러자 정말 그는 총든 군인이었다. 이 총으로 적들을 죽여야지. 사정없이 그렇게 할거야. 그는 총이 옆에 있다고 생각하자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팔을 위아래로 휘두르면 제식에 나선 멋진 군인이 된 것이다. 

앞으로 일 킬로 정도 산길을 타면 고개에 닿고 다시 그 정도 내렸갔다가 그보다 작은 산을 한 개 더 넘어야 한다. 그,러나 휴의는 서두르지 않았다. 급할 것도 없었다. 술이라는 것은 이렇게 좋구나. 휴의는 털고 일어나야 할 때를 정확히 알려주니.

그러나 걸음은 제대로 걸어지지 않았다. 비적댔다. 자신이 생각해도 가고 싶은 방향으로 제대로 나가지 못했다. 경례 할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발 길을 서너 발 떼고 나서 휴의는 무슨 생각에서 인지 다시 무덤가로 갔다. 그리고 무덤의 주인이 부모인양 두 번 절을 하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잘 있거라 쌍묘야. 나는 간다, 피터지는 전쟁터로. 그는 이렇게 흥얼거렸다. 기분이 좋았고 그런 기분으로 입대하면 부상당하지 않고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올 것 같았다. 휴의가 어깨춤을 추는 모습을 달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달은 그의 안전까지는 책임질 수 없다는 듯이 구름 속으로 이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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