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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한 결정을 내리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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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한 결정을 내리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17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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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은 언제나 기어이 온다. 가지 말았으면 하는 시간이 가는 것처럼. 여순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이 편했다. 다른 방도가 없을 때는 인정하는 것이다.지금도 마찬가지다.

선택지가 없는데 버텨봤자 자신만 더 손해인 것이다. 그래, 인정하자. 나에게는 숱한 일들이 일어났어.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간호사 일을 하다니. 그래 이런 것이 기적 아니고 뭐겠어. 한 번 온 기적은 다시 올지 몰라. 기대라고 해보지 뭐. 후회할 정도가 아닌선에서. 

여순은일어섰다. 조금전만 해도 오물을 뒤집어 썼는데 지금은 조금은 털어낸 기분이었다. 그러나 냄새는 빠지지 않고 있다. 그것까지는 무리인가. 좋다. 갈데까지 가보는 것지 뭐. 냄새에 몸을 한 번 털면 되지.

그녀는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강아지가 온 몸을 흔들어 물기를 제거하듯이 그렇게 자신도 흉내를 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니 정말 냄새마저 떠난 것 같았다. 할 일을 마친 여순은 자신에게 닥쳐 온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 지휘관 숙소로 향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오 분여 거리를 가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다시 버려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렇게 억울했다. 겨우 진창에서 벗어났는데 다시 그곳에 빠지고 있다. 다른 사람은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보기에는 그랬다. 그럼 그렇지, 내가 오죽하겠어. 그렇게 자학하는 길은 길고 길었다.

병사를 치료하고 그들에게서 때로는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 죽어가는 그들의 손을 잡고 마지막을 배웅할 때 여순은 막사의 일은 까마득히 잊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자신이 고마웠다. 어떤 때는 자신이 정말 세상에서 쓰임새 있는 존재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나, 이런 사람이야. 혹은 나도 괜찮은 사람이지. 

그럴 때 여순은 살아 있다는 생동감이 들었고 그것은 남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났다. 손을 내밀면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도움을 받아서 고마운 사람 그러니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다시 누구나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드나무 신세로 전락했다.

누구 책임인가. 말수나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일부러 여순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궁지에 몰아넣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득이 오지 않는다. 그렇다. 나의 이 길은 지휘관이 선택한 것이다. 그에게서는 혐오의 느낌 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그녀는 주머니 속의 약병을 손에 꼭 쥐면서 자신의 운명이 여기서 끝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문은 열려 있었고 지휘관은 등을 보이고 있었다. 앞으로 조금 구부정하게 숙인 뒷모습 에서는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열린 문을 두드리는 노크에 반응이 없었고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도, 거의 등이 닿을 정도로 바로 뒤에 섰을 때도 움직이지 않았다. 늦게 온 것에 대한 불만인가. 자신의 권위가 상처를 입어 화를 내려다 잠깐 멈춘 동작인가. 

순간 여순은 준비한 주사기를 전투복 깃 사이로 드러난 목 뒤에 깊이 찔러 넣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이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아프지도 않을 것이다.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몸 속에 넘쳐나는 알코올은 마취약과 혼합된 약물이 빠르게 뻐질 것이다. 그것은 몸을 돌고 돌아 마침내 피를 멈추게 한다. 그러면 끝이다. 

옷 속에 쥔 주사기를 잡고 부들거리는 심정으로 여순은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아니 반발 정도다. 이제 옆 모습이 보인다. 지휘관은 왼손으로 술병을, 오른 손으로는 식탁을 모서리를 잡고 균형을 잡은채 채 미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아까와 같은 동작이었다. 옆 얼굴은 붉게 상기됐고 턱에는 깎지 않은 수염이 더부룩하게 자라 있었다. 

어디 한 군데 흠잡을 수 없는 완벽한 군인의 모습은 아니어도 그런데로 군인정신은 살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은 불과 몇 초 사이에 사라졌다. 그는 몸은 지탱했으나 정신은 놓치고 있었다. 눈을 들어 들어온 누군가를 확인하지도 않았고 그럴 수도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여순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려고 온 여순의 존재도 당연히 알지 못했다. 여순은 그런 상태를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한 것은 지휘관이나 여순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순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그러나 빈손이었다. 여순이 빈손으로 무엇을 하겨고 하지 않았다. 대신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려나왔다. 

왔습니다, 지휘관님. 어디서 그런 첫 말이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다. 왔다니, 내가 왔다니, 그래 이것은 보고다. 지휘선상에 있는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하는 보고다. 여순은 자신이 불려온 하급자라는 신분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명령만 내려주세요. 왔으니 하라면 하라는대로 따르지요. 이건가. 이것을 여순이 바란 건가. 

제가 왔습니다. 병동에서 일하는 조선 간호사 여순이가요. 

그러나 이번에도 지휘관은 대꾸가 없었다. 단정한 그의 몸이 옆으로 조금 움직였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을 때 누구나 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그가 앉은 채로 잠에 빠졌다. 잠을 자는 자는 지휘관이든 부하든 다를 것이 없었다. 여순은 혼란에 빠졌다. 이것은 절호의 기회인가, 아닌가. 

기회라면 기회고 아니라면 아니었다. 무방비 상태의 그와 위험한 물건을 소지한 그녀. 그러나 여순은 자신의 몸에서 혼내 주려는 생각이 사라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술에 취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을 그녀가 확실히 인식한 순간 그가 어이 없이 옆으로 쓰러지면서 몸을 길게 뻗었다. 다행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것은 의자의 폭이 넓었고 길었기 때문이었다. 

여순은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다시 몸을 원래 자리로 돌려 그를 보았다.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네가 내 명령을 어기고 도망치려고 그러느냐고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기 때문이다. 여순은 그가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다가가 가볍게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면서 그의 눈을 보았다. 떠졌던 눈이 반쯤 위로 올라갔고 입에서는 심한 술냄새가 풍겨왔다. 그는 인사불성으로 취해있었다. 여순은 다시 주머니 속의 주사기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코를 골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역겨운 알코올 냄새가 밑에서부터 올라왔다. 여순은 에, 더러워, 더러워 속으로 외치면서 어찌해야 좋을지 잠시 망설였다. 그냥 이곳을 이 상태로 남겨두고 떠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결정의 순간은 여기를 걸어 올 때 느꼈던 그 시간 만큼이나 느리게 지나갔다.

그녀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기로 했던 마음을 돌려먹었다. 어차피 이자와는 당분간 떨어져 있다. 곧 날이 밝으면 나는 군함에 올라탄다. 뒤늦게 술이 깼다고 해도 자신의 무슨 명령을 내렸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하려고 했던 목적이 사라지자 여순은 긴장이 풀렸는지 사방을 둘러 보는 여유를 찾았다.

한 면 벽을 꽉 채운 주변 지도와 지도 옆에 걸린 긴 환도가 눈에 띄었다. 환도, 그렇다. 내가 이곳으로 올 때 그것이 말에 매달려 절거덕 거렸지. 여순은 칼을 떠올릴 때마다 죽마을 순사가 절거덕거리면서 다가왔던 환영에 시달렸다.

이제는 그것에서 벗어났나 싶었는데 다시 그것을 보자 여순은 움찔했다. 고정된 그것이 살아서 움직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 정신을 수습했다. 사쿠라 꽃이 활짝 핀 다른 쪽 벽의 위쪽에 걸린 커다란 시계의 바늘이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더 둘러볼 것이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몇 발짝 걸으면서 등 뒤에서 어떤 기운이 오는지 살폈다. 오싹하지도 그렇다고 따뜻한 전송의 느낌도 없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그녀는 들어갈 때 보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것을 알았다. 넘을 수 없는 벽을 넘어서는 기분이 이런 걸까. 그녀는 발길을 빠르게 움직였다. 

한시바삐 여기서 달아나자. 남은 시간은 푹 자자. 그래야 준비된 계획을 실천할 수 있다. 몽유병 환자가 아침이슬을 맞고 정신이 깨어나서 자기 방을 찾아 들듯이 서둘러 자기 자리를 향해 여순은 움직였다. 등 뒤에서는 어떤 따까움도 없었다. 

갑판은 생각보다 넓었다. 마치 학교 운동장처럼. 이렇게 넓은 것이 바다에 떠서 움직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작은 보트를 타고 동아줄 사다리에 의지해 어렵게 올라온 군함의 갑판에는 여기저기 전투의 흔적들이 아직 치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급박했던 상황이 얼마전에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굴러다니는 탄피와 주변에 맞은 총알 자국들이 어지러웠다. 여순은 심하지는 않지만 구토를 느꼈다. 끌려올 때 가졌던 그 느낌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었다. 여순은 침착하자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설사 멀미가 와도 그 때의 그런 처참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내가 아니지 않는가. 새 옷을 처음으로 입은 아이처럼 실수로 더러워져서는 안 된다는 강한 압박이 그녀를 지배했다.

스스로 참아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정신으로 그것을 이겨내려고 열중했다. 당장 치료해야 할 환자는 보이지 않았다. 여순은 옆에 있는 군복을 입고 팔뚝에 의사를 표시하는 붉은 십자가 완장을 찬 말수로 보았다.

그는 진짜 일본 의사처럼 보였다. 갑판 위에서 호통치고 쌍욕을 하던 말수의 그림자가 어른 거렸다. 그래. 갑판에 섰을 때가 진짜 그 모습이지. 그에게 칼 잡은 의사의 모습이 어울릴까. 여순은 그런 생각으로 자신의 멀미를 밀어내고 있었다. 

갑판위는 그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병사들은 전투가 멈추었어도 전투를 중단하지 않았다. 그들은 줄지어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왔다 갔다를 되풀이했다. 저것이 전쟁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잠시 그들은 멈춰서 군가를 부르더니 십분간 휴식을 취했다. 그 틈을 타서 구령을 붙였던 장교에게 말수가 다가갔다.

그는 능숙한 일본어로 돌봐야 할 환자가 있는지 물었고 없다는 대답을 듣고는 조금 머쓱했는지 함장실로 가서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안내를 부탁했다. 함장의 건강을 살핀다는 이유에서였다. 의사가 탑승했으니 필요하면 이용하라고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는 듯한 행동에 장교는 그렇게 하겠다고 따라 오라는 시늉을 했다. 

여순도 그 옆에 달라붙었다. 한 사람이 빠져나가기도 힘든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여순은 막 해내고자 했던 일을 마친 것처럼 홀쭉한 기분을 느꼈다. 실제로 그녀는 홀쭉했다. 그래서 남자들이 어렵게 몸을 옆으로 비킬 때도 똑바로 걸어나갔다. 그래, 난 날씬해.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혼자 웃던 그 시절로 한발 다가서고 있다고 여순은 생각했다.

배가 속도를 냈다. 엔진음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함장은 들어온 이들의 기분은 아랑곳없이 하기 싫은 일을 마지 못해 한다는 듯이 팔을 들어 손을 뻗었다. 이리로 오지 말고 거기 의자에 앉아 있으라는 신호였다. 그는 들어온 사람은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할 일을 마저했다. 

그리고는 가슴을 앞으로 내밀면서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많이 해본 절차라서 익숙한 행동이었다. 그에게는 늘 하던 형식적인 절차였으나 말수에게는 처음 보는 행동이나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수는 다가갔다. 그리고 가방에서 꺼낸 청진기를 댔다. 한 참 후 뗀 말수는 걱정 없다는 투로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건강 이상무’를 군인처럼 외쳤다.

정말 건강하시군요. 함장님.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말수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요. 군인에게 건강은 필수요. 아픈 사람은 전투할 자격이 없어요. 국가에 대한 충성심도 없고요.  함장이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응수했다.

여순은 그가 제복에 어울리는 군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휘관이 입은 것과는 사뭇 다른 함장의 제복은 위엄이 서려 있었다. 이게 진짜 군인이지. 술 먹고 댓자로 뻗어서 누가 왔는지도 모르면서 지독한 술냄새나 풍기는 자가 군인은 아니지. 

여순은 각종 기계 장치로 어지러운 좁은 함장실을 지휘관을 방문했을 때처럼 둘러 보았다. 눈은 함장을 향했지만 시선은 이곳저곳을 훝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함장에게도 시선을 모았다.

훈장인지 계급인지 앞가슴에 달린 것들이 전등 아래 반짝였다. 그가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인지 모자를 벗었다. 마치 염색한 것처럼 머리칼이 모두 흰색이었다. 빠지지 않은 머리칼이 하얗게 빛났다. 백두. 함장은 이제부터 나에게 백두다. 

백발노인이었으나 그 아래 눈썹은 검고 짙었다. 그리고 두 눈은 붉고 강렬했다. 그가 자신을 쳐다보는 여순을 내려다봤다. 여순이 그를 평가했듯이 자신도 그를 평가하려는 태도였다. 그런 모습에서 여순은 그가 이래 봬도 나는 아무 까닭 없이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자신감이 넘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윗옷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어린애를 대하는 듯한 눈길이 영 꺼림칙했다. 함장은 형식적으로 몇 마디 묻고는 쉴 수 있을 때 쉬워 두라고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언제 포사격이 있을지 몰라요. 지금은 부상병이 없지만 감당 못할 수도 있으니. 눈 좀 부치고. 의사 양반. 이 분도 의사신가? 말수는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간호 업무가 주 지만 의사 일도 척척해낸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군요. 내가 다치면 이 분이 나를 치료하도록.

그는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뒷말을 끈었다. 그리고는 싸울 인원이 부족해. 부족하다고. 너무 많이 죽었어. 하고 혼잣말 하듯이 중얼 거렸다. 필리핀에 도착하면 병사들을 태울 수 있는 한 태우시오. 말수 옆에 있는 장교에게 함장은 이렇게 지시했다.

적어도 대대병력이 필요해요. 대포 쏜 인원도 없다니 참, 이래가기고서는 전쟁을 할 수 가 없단 말이오. 본국에서는 왜 증원을 미적거리는지. 원. 육군이 문제야. 우리 해군은 이렇게 잘 싸우는데.

함장은 말수나 여순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조금 더 했다. 그리고는 군인답지 않게 길게 말했다는 것을 알고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말수는 이제는 가봐야 겠다면 자시 자리로 가기 위해 일어섰다. 인사를 받은 함장은 형식적으로라도 한 마디 더 물어야 한다는 듯히 말수에게 의대 시절 전공이 뭐였냐고 물었다. 말수는 당황했다.

이런 질문은 처음 받아 봤고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입학하고 바로 자원입대했다고 얼버무리듯이 말했다. 옆에 있던 여순이 거들었다. 칼잡이에요. 외과 전공으로 부상병 치료에 탁월한 실력이 발휘해요. 그런가요. 외과라면 세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네. 세균이요. 여의사 선생은 뭐 좀 아는 게 있어요.

여순은 말수보다 더 당황했다. 현미경을 좀 다룰 줄 알아요. 특히 매독균등 성병치료 경험은 많이 있어요. 그렇군요. 밑도 끝도 없는 말이 세균이었다. 그러나 여순은 균이라면 상처 난 곳이 아물기도 전에 감염되는 것에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항생제가 없으면 작은 상처도 사망하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은 정말 치명적 입니다. 

그래, 그거야. 자네는 전공이 뭔가. 간호학이 전공이고 부전공으로 내과를 좀 공부했어요. 어디서 그런 거짓말이 나오는지 여순은 거침없는 자신이 놀라웠다. 아무리 함장이 사람의 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너무 나가다가는 궁지에 몰릴 수도 있다. 

그렇지, 세균이라면 외과보다는 내과지. 함장은 질문을 여순에게 쏟았다. 세균은 전염이 되지. 그러지 적에게 균을 퍼트리면 수월하게 전쟁을 이길 수 있을 거 아니오. 가만히 있던 말수가 끼어들었다. 아직 그것을 전쟁에 활용한 경우는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자칫 우리한테도 피해가 올 수 있고요. 그러니 조심해서 하는 것 아니요. 함장은 부정적 의견을 낸 말수가 못마땅 하다는 듯이 짜증을 냈다. 여순은 이번에는 조금 뒤로 빠졌다. 끼어들 타이밍이 아니었고 끼어들어도 함장의 기분을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아, 너무들 심각한 얼굴 짓지 말고. 의사라고 하니 한 번 물어본 거요. 당신들은 전문가가 아니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고. 외과 의사는 부상병 잘 꽤매면 되고 내과의는 적절한 약을 처방하면 되는 것이지. 당신들 의무는 아니니 신경꺼도 돼. 

함장은 의사라고 해도 자신보다 못한 햇병아리가 어미의 심정을 어찌 알겠느냐는 표정으로 말수를 바라봤다. 눈을 돌려서는 여순을 보고는 너는 아느냐고 묻듯이 무안할 정도로 빤히 여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수에게 보였던 딱하다는 표정은 아직 거두지 않았다.

괜히 이야기를 꺼냈나. 높은 신분의 그가 아랫것들과 너무 오래 이야기했다는 자괴감 같은 것이 들었는지 거만한 몸짓을 묻히고는 자신이 자제해야 옳다는 듯이 함장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은 섬의 지휘관보다 넓었다. 키가 작아서 인지 더 그런 느낌을 여순은 받았다. 

내려갔던 계단을 타고 장교와 말수와 여순은 차례대로 다시 갑판 위로 올라왔다. 작대기보다도 긴 포신 옆에서 병사 몇 명이 쏘아서 죽일 적이 있는지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똑바로 서지 않고 삐닥한 자세로 서 있었는데 그것은 보기에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군인은 늘 직선으로 보여야 한다. 말수는 의사 대신 자신이 장교가 되면 어떨까 싶었다. 자신있었다. 부하를 다루는 솜씨라면 여기 있는 장교보다 자신이 못할 이유가 없다. 당장 시켜만 주면 군복을 갈아 입고 싶었다. 

말수가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저쪽에서 대열을 이룬 분대급 인원이 이쪽으로 군홧발 소리를 일부러 크게 내면서 다가왔다. 감정을 잘 절제했다고 생각했던 말수는 앞장선 오장과 시선을 마주치자 다가가기 위해 발을 옮겼다.

의사를 보자 그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러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갔다. 매우 바쁜 듯한 표정이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은 하던 일을 마저 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고 판단한 듯 싶었다. 그도 병사들처럼 바짝 군기가 들어 있었다. 졸여 맨 배꼽 부근의 버클이 말수의 옆을 지나갈 때 반짝거렸다.

말수는 그의 태도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방금 전에 함장을 만났다는 사실은 벌써 잊었다. 그래서 불쾌하거나 좋거나 하는 어떤 기분도 들지 않았다.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여기서 나무랄 일도 아니지 않은가.

입장이 난처하지도 않았고 무시당했다는 생각도 없었다. 다치고 피가 나지 않은 상황에서 의사의 존재는 멀리 있었다. 더구나 딱히 그가 와서 대화를 한다고 해도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로 잘해 보자거나 부상병을 임시 치료할 병상이 있는지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눌 정도였다.

그러면서 군함의 최종 목적지인 필리핀에 대해서 조금 알아 내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이때까지도 군함은 목적지가 어디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목적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리핀으로 간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다. 돌아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어쨌든 필리핀에 상륙한다. 

상황이 나빠져 필리핀이 아닌 다른 곳에 상륙해도 나쁠 게 없다. 전에 있던 섬보다 더 크기는 한데 허술하고 육지로 나갈 기회가 많은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 없었다. 전투가 격렬해도 살아남을 수만 있다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비상 사이렌이 이런 말수의 마음을 흔들었다. 아니 중지 시켰다. 미쳐 피할 공간도 확보하지 못했는데 포탄은 군함 밖 수 백 미처 앞에서 펑펑 터지고 있었다. 숞식간에 일어난 일이나 갑판위는 그야말로 불난 시장터처럼 아수라장이 됐다. 

더구나 터지는 포가 함포 사격인지 공중에서 퍼붓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말수와 여순은 일단 피하고 보자고 고개를 숙이고 갑판 아래로 내려가 아쉬운 대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그곳이 갑판보다 안전한 곳인지를 알 수 없었다. 함장실이라면 모를까.  그러나 말수는 거기로 가지 않기로 했다. 좁은 그곳에서 괜히 망신살만 뻣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계단에 기대 말수는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전투기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눈으로 확인해도 전투기가 날아 다리는 모습은 없었다. 공중 폭격은 아니라는데 말수는 조금 안심했다. 아무래도 비행기 폭격은 명중률이 높고 치명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쪽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사이렌 소리는 더 커졌고 반격하기 위한 부대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일사분란했다. 잘 훈련 된 부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멋진 연출이었다. 뻗다리를 한 병사를 모욕했던 것을 잊고 말수는 잘 움직이는 군. 그래 저 정도라면 싸울만 하지 하고 생각했다. 여순을 아래쪽으로 가라고 밀쳐 놓고 말수는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병사들의 이런 움직임을 관찰했다.
 

여순을 아래로 내려보낸 결정은 잘했다. 포를 맞으면 아무래도 이쪽보다는 아래쪽이 더 안전했다. 침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침몰까지 생각할 정도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정신 없이 여기저기 터지는 소리에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말수의 눈이 놀라움과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더 커졌다. 몸은 긴장 때문에 쪼그라들었다.

가까이에서 이런 전투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포 소리는 많이 들었어도 직접 떨어져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은 장관이었다. 거리를 재고 포신에 포를 채운 병사들이 여러 구호와 몸짓에 이어 반격을 시작했다. 그 모습 또한 볼만했다. 역시 전쟁은 연습이 아닌 실전이다. 실전 앞에서는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다. 

이쪽에서 반격이 시작됐다. 엄청난 괴성과 함께 탄피가 벼락처럼 쏟아졌다. 마른하늘에 치는 날벼락보다 더 심하고 끔찍했다. 생각보다 소리도 엄청나게 컸다. 이런 상황에서 명령이라는 것이 제대로 전달될까 싶었다. 각자 알아서 움직이는수밖에. 그래서 평시 훈련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소리 대신 이번에는 무언가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병사들의 몸에서 나는 탄약 냄새였다. 포신을 빠져 나온 탄피에서 연기가 피어 올랐다. 모락모락 올라서는 금방이라도 붉게 타오를 것만 같았다. 전쟁의 공포는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었다. 이곳은 병상과는 달랐다. 진짜 전쟁이다. 늘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처럼 복판에 있지는 않았다. 

실려 오는 환자들의 치명적인 상처를 보고도 견뎌냈던 그였기에 포사격의 위력은 색다른 고통이었다. 저 정도라면 맞고 견기기 힘들 것이다. 계단 아래서 몸을 숨기고 있는여순도 마찬가지였다. 갑판의 상황을 상상할 겨늘이 없었다. 배가 군함이 운동장 보다 넓은 군함이 흔들릴 때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굉장을 것을 보고 있다는 기억만큼은 간직하고 싶었다. 철판 위에 떨어진 포탄은 커다란 구멍을 냈다. 종이쪼가리처럼 갑판이 찢겨져 나가고 찢겨진 구멍속으로 갑판위에 있는 병사들이 떨어져 내렸다. 기울어진 포는 견디다가 도저히 그럴 수 없을 때 병사들처럼 같은 신세가 됐다.

마침내 거대한 군함이 침몰한다. 내가 탄 군함이 가라 앉는다. 정말 그럴까. 말수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한다. 적에게 노출된 군함은 숨을 곳을 찾아야 한다. 도대체 함장은 어떤 명령을 내리 길래 군함이 이 지경인가. 그는 당장 선실로 내려가 지휘봉을 잡고 군함을 지휘하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한편으로는 자신과는 그것이 아무런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살아서만 나가면 된다. 승자가 누구인든 관계 없는 일이다. 누가 이기든 살아 있기만 하면 자신은 곧 이곳에서 빠져나간다는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압도했다. 그 혼란의 와중에도 말수는 침착함을 잊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는 군함이 먼저 살아야 한다. 탈출은 그 다음이다. 

한동안 사라졌던 탈출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자 말수는 온통 신경에 탈출에 집중됐다. 나는 군인이 아냐. 전쟁에 길들여 지기보다는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 어서 빠져 나가 좀 더 자유롭게 무언가를 펼쳐야지. 전쟁이 주는 무서운 굉음은 그들만의 잔치여야 했다. 여기서 살아나면 영원히 산다. 살아 나가자. 

군함은 포를 여러군데 맞았지만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 엔진도 정상이다. 다행한 일이다. 소나기 처럼 퍼붓던 포탄도 멈췄다. 갑자기 내리던 비가 그치는 것과 동시에 해가 뜨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됐다.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함장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적이 다른 공격지점으로 이동했는지 아니면 폭탄이 다 떨어졌는지 그도 아니면 우리측 공격으로 타격을 입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런 이유 가운데 하나나 둘 때문에 우리는 지금 공격 지점에서 벗어나 있다. 함장은 최고 속도를 지시했다. 이곳을 빠져 나가자. 어딘가로 안전한 곳이 정해진 모양이었다. 말수는 함정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계단아래서 궁금증을 참지 못하던 여순이 상황 파악을 위해 말수를 찾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말수는 더 있어야 한다는 손짓을 했으나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너 죽는다고 호되게 나무라고 싶지 않은 것은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이었다. 참, 운명이란 알 다가도 모를 일이다. 말수는 죽음을 떼어내면서 다시 한 번 운명을 느꼈다. 

어차피 운명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군대에게 이렇게 당하다니. 우리쪽 피해는 상당할 것이다. 갑판의 병사들은 많이 죽어 나갔을 것이고 산자들은 고통에 몸부림 친다. 여순이 올라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시작해야 한다. 칼은 어디있지. 그래 칼이 들어 있는 가방. 그는 왕진 가방이라고 할 만한 것을 열었다.

올라와. 어서. 갑판아래서 질려 있지 말고. 비에 젖은 생쥐처럼 바들바들 떤다고 달라질 것이 없어. 말수는 이런 비유를 쓰면서 여순을 향해 소리쳤다. 여순은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말수가 그러는 꼴을 지켜볼 수 없어 씩씩하게 소매를 걷었다. 

여순은 미련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민접하게 움직이다. 지금의 말수의 비유를 따질 때가 아니다. 스스로 판단해도 숨은 몸을 다 드러내야 할 시점이다. 병사들이 자신을 지켜줄 때 숨었으니 그들을 위해 나서야 한다. 시간이 급하다. 살 수 있는 사람부터 챙기자. 

그렇게 하는 것이 사리에 맞다고 그녀 스스로 판단했다. 너무 움츠릴 필요도 그렇다고 심각하게 진지할 이유도 없었다. 비겁하게 비켜 있고 싶지도 않았다. 전투는 끝났고 지금은 치료의 시간이다. 갑판위의 상황은 예상대로 였다. 아비규환. 전쟁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다. 갑판위에서 말수와 여순은 짧은 해후를 가졌다. 

서로에게 서로의 몸 상태를 보였고 둘은 아직은 총을 맞지 않았네, 팔이 그대로 붙어있네 하고 농담을 했다. 말수의 얼굴에 안도의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라니. 말수의 정신 상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 여순은 속상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떨리지 않는 것은 다 말수 덕분이다.

살아 있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감동이 밀려왔다. 여순은 그런 상태로 아직은 숨 쉬고 있는 부상 병사들 쪽으로 급히 몸을 움직였다. 산자들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생명은 잠시 유예된 것일뿐 길고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래도 죽지 않고 산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사실이 그랬다. 그들은 살았다는 것을 알고는 감격했다. 어떤 자는 엄마를 불렀고 또 어떤 자는 기미가요를 불렀다. 

이런 자들은 더 심한 자들을 외면했다. 심한자는 심한자를 알아봤다. 그들은 동료애를 느끼며 죽을 때까지 자제력을 상실하지 말자고 다짐했으나 서서히 죽어가는 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 아침을 볼 수 있을까. 산 다면 일어나서 정리해야 한다. 개인화기를 손질하고 포를 닦아야 한다. 탄알이 빠져 나가지 못하면 낭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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