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새벽 약산은 부대원들을 이끌고 원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안정하게 이동했다. 애초 계획보다 반나절 정도 늦었으나 그것이 되레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 주었다.
그것은 연합국의 대반격이었다. 이제 공중은 연합국의 차지였다. 일제는 하늘에서 미군의 비행기를 상대할 만한 힘이 없었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만주 일대 일본군 진지를 향해 무차별 공격을 감했다.
일본군 진지는 상당수가 파괴됐다. 연합군은 독립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훈련장도 일본군 막사로 보고 공격 목표에 넣었다. 그러다가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첫 발은 연병장에 떨어졌다.
부대원들은 황급히 산으로 피신했다. 다행이 인명피해는 없었다. 두 번재 폭탄이 원점을 재고 다시 조준할 즈음 조종사는 그곳은 한국군 진지라는 설명을 들었다.
그들은 우리편이다. 내버려 두라.
급강하던 전폭기는 폭탄 대신 기수를 만주 이북으로 돌렸다. 산에서 내려온 독립군들은 만세를 불렀다. 이제 독립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는 확신이 섰다. 미군이 하늘에서 돕는다면 지상전은 우리것이다. 한국독립군의 사기는 그 어느때보다도 높았다.
미군 전투기가 떠나고 나서 두 어시간 후에 약산은 그것이 임정과 미군의 연락으로 이뤄진 협상 결과라는 것을 알았다. 약산보다 먼저 움직였던 몽양이 미군의 공격 지점이 독립군 부대와 일치한다는 것을 알고 손을 쓴 결과였다.
미군이 여기까지 공격했다는 것은 일제가 완전하게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부대원들은 급하게 개인 군장을 꾸렸다. 모포와 옷가지와 새 군화를 신고 그들은 날듯이 산을 넘었다.
일제 역시 그곳은 중요한 거점이었고 훈련된 독립군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들은 말수대신 포목점 사장을 앞세우고 미군의 공습을 피한 독립군 진지로 쳐들어왔다. 일개 소대 병력으로 사단 병력을 인수하겠다는 야심찬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독립군 훈련장에는 개미 한마리 얼씬 거리지 않았다. 허탈한 그들은 포목점 사장을 윽박질렀다. 작전이 미리 샌 것에 대한 추궁이었다. 그러나 포목점 사장은 나름대로 이유를 댔다.
이 보시오. 저기 폭탄 구멍이 보이지 않나요? 당신들은 눈을 어디에 두고 있어요.
그가 반격을 폈다.
저런 상태에서 막사를 지키고 있을 병사들이 있겠소?
이것은 사전에 일본군 침투에 대비해 병력이 미리 빠진 것이 아니라 방금전에 서둘러 떠났다는 것의 확실한 증명이었다.
이 한마디 말로 포목점 사장은 혐의를 벗었다.
사장님, 오죽 화가 났으면 제 부하가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용서하시오.
하야시 형사가 고개를 숙였다. 형사는 아니꼬왔으나 당장은 그가 필요했기에 그가 내세운 주장이 먹혀들었다는 시늉을 했다.
이러고들 있을때가 아닙니다. 추격해야지요.
어디로 간 줄 알고 뒤를 쫓는 답니까?
사냥개를 앞세웁시다. 그리고 3개조로 나눠 추격하면 후발대의 등 뒤를 공격할 수 있을 거요.
하야시는 지체없이 병력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경찰 생활 중 하야시의 큰 실수로 기록됐다. 노련한 약산이 그 정도 대비는 하고 있었다. 약산은 선발대를 앞세우고 후발대를 오분 거리에 두고 이동시켰다. 만에 하나 적의 기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약산의 장교 8명은 선두에서 그들을 이끌었다. 칠흑같은 밤에도 그들은 지형지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파악했다. 숙달된 조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무장투쟁이라면 이골이 난 약산은 이번에는 절대적인 기회가 왔다고 입술을 굳데 다물었다.
약산은 그들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적들이 추격해 오고 있다는 낌새를 눈치챘다. 앞의 병력을 사방으로 산개시키고 자신은 매복조를 지휘했다. 기습 공격을 하고 뒤로 빠지면 선발대가 사분오열된 적들을 섬멸한다는 작전이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시야는 확보됐다. 매복조는 적들이 근거리로 오기를 기다렸다. 사냥개는 바로 사살했다. 놀란 적들이 몸을 숨기기도 전에 약산의 부대가 총알을 뿜었다. 거치된 기관총의 위력은 대단했다.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즈음 이번에는 굉장한 폭발음이 들렸다. 설치한 폭약을 건드린 적들의 몸뚱이는 하늘 높이 솟았다가 사방으로 분해돼 떨어졌다. 더 볼 것 없는 승리였다.
밤새 이동하느나 지친 병사들이 잠시 휴식할 때 약산은 휘하 장교와 부사령관을 따로 불렀다. 오늘 작전의 성공을 치하하고 압록강 진격 잔적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우리 정도의 실력이면 일본 정규군과 붙어도 마땅히 승산이 있다. 개인화기를 잘 다루고 폭약도 장난감 만지듯 한다.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강을 넘자. 그러기 전에 아무리 급해도 백두산을 한 번 올려다 보고.
약산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등을 뒤로 기댔다. 그리고는 다시 벌떡 일어나 앉더니 연기를 내 뿜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만강은 완치된 휴장군에게 맡기기로 했다. 우리는 압록강을 넘는다.
약산이 압록강을 선택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제의 압잡이, 고문의 황제 덕기를 잡기 위해서였다. 덕기를 떠올리자 약산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이를 갈았다.
덕기의 악행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립군들은 누구라도 덕기의 손에만 걸리지 않기를 바랐다. 덕기에게 잡히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소문이 퍼졌다.
조선인이면서 조센징을 입에 달고 다니는 그는 순사를 거쳐 순사부장, 경부까지 승승장구했다. 함흥경찰서를 근거지로 그는 숱한 독립군을 잡아 고문을 했다.
그가 얼마나 악질이었는지 평안도는 물론 멀리 부산이나 목포까지도 소문이 자자했다. 조선팔도에서 제일 가는 악질 경찰 덕기는 서울의 덕술이 부산의 하형사 진주의 강형사 마산의 허병이와 더불어 조선의 4대 고문귀였다.
약산이 더 치를 떠는 것은 덕기가 청산리전투와 봉오동 전투에서 공을 세운 독립군 장군 다수를 고문하고 죽인 때문이었다. 김좌진 장군의 부하나 홍범도 장군의 부하들 가운데 그의 손에 죽은 경우가 여러명 있었다.
그는 일단 독립군이나 독립운동가를 잡으면 가혹하기가 이를데 없이 대했다. 차마 글로는 옮기지 못할 만행을 저질렀다. 눈을 도려내고 혀를 뽑았다.
그는 그런 과정을 고문을 기다리는 다음 고문 피해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독립군들은 차마 동료가 지르는 비명을 피하기 위해 귀를 막고 눈을 돌렸다.
그러면 그는 고문을 멈추고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귀를 열게했다. 그것이 더 고통스러운 형벌이라는 것을 덕기는 알고 있었다.
자 보아라, 독립군의 최후가 어떤지를.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덕기는 뽑기의 달인이었다. 혀를 뽑고 손톱을 뽑고 발톱을 뽑았다. 도려내기도 잘 해 관절의 뼈를 살과 분리했고 나중에는 눈알을 얼굴에서 빼냈다.
항일 투사들이 덕기 이름만 나오면 두려움에 떨지요. 그보다 악질은 없어요. 그 자를 죽이지 않고는 내가 발을 뻗고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주석님도 반드시 그 자를 처단하라고 명령했고요.
약산은 주석이 그런 지시를 내리자 군말없이 받아들였다. 작전 지휘에 있어서는 현장 경험이 많은 그가 주석보다 낫다고 여겨 간혹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덕기의 처단 지시 만큼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압록강을 선택한 것은 강을 넘어 덕기가 살고 있는 함경도를 치기 위해서였다.
덕기는 그런데 지금은 형사일보다는 관료가 되어 철도 사업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하나님이 있다면 어찌 이런 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혀가 뽑히고 눈알이 얼굴에서 떨어져 땅에 굴러도 침묵하고 있다.
신이 하지 못한다면 내가 한다.
약산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덕기가 관료가 된 것은 후회하거나 반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알고 보니 그는 형사일도 하고 관료일도 하는 다재재능한 인간이었다.
철도 부설에 필요하면 그 쪽으로 갔고 경찰이나 헌병대에서 급하게 지원을 요청하면 두 말 없이 경찰서나 군부대로 달려나갔다. 새벽에도 고문에 필요하니 와달라고 하면 맨발로 뛰쳐 나갔다.
약산의 부하 가운데 한 명도 그에게 걸려 비명횡사했다. 여성 독립운가에게는 더 치욕적인 고문을 했다. 얼굴에 흉터를 남기는 것은 다반사고 임신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도산이 그 여성 같은 분이 10명만 있으면 한국은 독립되었다는 그 독립운동가도 그 놈에게 걸려 들었다. 약산은 김마리아를 추억했다.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한다는 말을 늘 새기고 있는 것은 덕기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이번 서울진공작전에 반드시 덕기를 체포한다. 그리고 죽이기 전에 서너 가지만 묻기로 했다.
너는 왜 조선놈이 조선독립군을 잡고 고문하고 죽였느냐.
먹고 살기 위해서다.
다른 방법도 있지 않았느냐?
배운 것이 그것이고 위에서 시키니 그대로 했을 뿐이다.
그래 지금은 후회하느냐.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으나 생각해 보고 나서 대답하겠다.
알았다. 열심히 생각해라. 지옥에서라도 생각이 정리되면 답장을 꼭 보내라.
목숨만은 살려달라.
그러마, 네 소원을 들어주되 눈과 혀를 뽑겠다.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둘 다 아니다. 난 시키는 대로만 했다.
약산은 이런 대화를 상상하는 것조차 짜증이 났다. 그래서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네가 한 고문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 것인지 네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지는 않겠다. 너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너는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알 것이다. 다만 독립군 제 1지대장의 명령으로 너를 사형에 처한다.
덕기가 제발 살려달라고 손을 내밀고 빌었다.
총알이 아까우니 저기 있는 저 돌로 한 방에 보내 주마. 그러기 전에 일제의 훈장을 받은 그 가슴을 발로 걷어차야지. 자랑스런 훈장이 찢기는 기분이 어떠냐.
약산은 한 마디 더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인데 조금 더 대화가 필요하다 싶었다.
네가 그렇게 일본 노래를 잘 부른다면서? 왜놈들이 네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 일본이노 사람보다 헤 노래를 잘 부른다 헤헤 하면서 박수를 쳤다지.
그래 죽으면서 불러라. 장송곡 치고는 제법 그럴듯 하겠지.
약산의 눈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먼저간 동료가 눈에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내가 상상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조국을 배신한 자의 말로는 똑똑히 보여주마. 내 너를 일본놈보다 먼저 잡아 반드시 처단하겠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부 사령관이 말했다.
그런데 사령관님. 그건 사사로운 감정도 들어간 것 아닙니까. 일제가 급하지요. 그깟놈 고문 형사 한 놈 때문에 지체한다면 나중에 후회할지 모르잖아요. 더구나 부하가 당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살 수도 있고요.
그렇기도 하지만 조금 더 들어 보시오. 노기띈 얼굴로 약산이 덕기의 만행에 한 발 더 들어갔다.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평안도 사람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하룻밤에 수백명이 걸려들었다. 그는 잡힌 피해자들이 팔둑에 고무줄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주먹을 쥐게 하고는 주사기를 가져와 드러난 힘줄에 찔렀다. 피가 가득차면 그것을 그대로 피해자 얼굴에 뿌렸다. 이른 바 착혈고문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피부가 백짓장이 되도록 뽑았다.
몸에서 피가 다 빠진 피해자가 더 이상 뽑을 피가 없으면 옆의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피빠진 몸은 마른 나무처럼 가볍게 날아갔다. 달궈진 쇠젓가락으로 온 몸을 지지는 대상은 주로 사회주의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병행했는데 잡히는 족족 자신의 살에서 타는 냄새를 자신의 코로 들이 마셔야 했다. 하도 지져대 손에 감각이 무뎌질 때까지도 덕기는 지지기를 멈추지 않았다.
간혹 아주 젊은 청년들도 잡혀왔다. 이십 대 이하인 경우 그는 호의를 베풀었다. 앞날이 창창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애들의 몸에는 상처를 내지 말라. 우리 황군에 유용하게 쓰일 몸이시다.
그러면서 주전자를 가져 오게 했다. 거꾸로 매달린 소년들의 콧구멍에는 뜨거운 고춧가루 물이 쉬지 않고 들어갔다. 비명을 지르다 기절하면 수건을 얼굴에 던졌다.
호흡이 멈춘 소년은 발작을 하다 자기가 판 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다.
치안유지법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은 덕기손에 이렇게 죽어나갔단 말입니다. 이래도 내가 사사로운 개인 감정 때문에 이러는 겁니까.
부사령관은 고개를 숙였다.
일단 압록강에 넘으면 우리 특공조는 덕기의 집을 급습합니다. 그를 처단하고 나서 본대로 복귀하는 것이지요. 거기서 부터는 또다른 작전이 필요해요. 함경도경찰서를 불태우고 평양까지 일사천리로 진군해야 합니다. 남하하면서 간간히 적들과 교전이 벌어질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합지졸이라 스스로 자중지란에 빠질 겁니다. 이런 것은 전혀 상상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한국에서 조선독립군과 전쟁을 한다는 시나리오를 일제는 짠 적이 없거든요.
그럴 겁니다.
이런 결정에 동조해 주다니 오늘은 분명 유쾌한 날입니다. 선전공작에 쓸 찌라시를 많이 준비합시다. 각각 100장씩은 가져야지요. 전단 살포를 하면서 남으로 갑시다.
전단지에 쓸 내용은 준비했습니까?
부사령관이 물었다.
조금씩 생각나는 대로 써야지요. 뭐 이런 식이면 어떤가요?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웁시다.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에는 이 넓은 만주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 합니다. 만주벌판 대신 한반도라고 해도 좋고.
이것은 지청천 장군이 한 말이지요.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 장군, 유관순, 김마리아, 김란사 열사의 말씀도 가슴에 새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