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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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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2.01 14: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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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손을 잡고 점례는 밖으로 나왔다. 가을꽃이 시들려고 막바지 불꽃을 피워냈다. 붉고 노란 것이 가기 전에 나를 봐 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작은 바람에도 가지는 흔들렸으나 다시 제자리를 찾아서 뻣뻣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머나. 이 꽃 좀 봐요. 알아서 자라서 이렇게 됐어요. 내년에는 제대로 좀 심어야 될까봐요.'

점례가 손을 놓고 그 손으로 꽃을 받쳐 들었다. 조선의 꽃이라면 이름을 좀 알겠지만 이국의 꽃 이름은 낯설었다.

'이 꽃이름이 뭐죠?'

'글쎄, 나도 모르겠네. 식물도감 책을 한 권 사야겠어.'

유지가 관심을 기울이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거기 나온 꽃들을 죄사 사다 심어요. 봄에는 봄꽃 여름에는 여름꽃 가을에는 가을꽃 말이에요.'

'좋지, 좋아.'

유지도 무엇이 좋은지 신나서 맞장구쳤다.

기분이 높아진 두 사람은 우체국을 향해 걸었다. 통신으로 연락할까 했으나 굳이 그러지 않았다. 내무대신은 바쁠 것이고 편지를 보낸 사실조차 잊었을지 모른다.

아직 점심은 이르지만 여기저기서 끼니를 준비하는 식당의 모습이 분주했다. 빵 굽는 냄새가 나기도 했고 서둘러 창문을 여는 가게도 있었다.

성미 급한 몇 사람은 야외 탁자에서 술을 먹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그 모습은 평온했다. 언제 전쟁을 치렀는지 모를 만큼 거리는 생명으로 넘쳐났다.

인간의 복원력은 이처럼 대단한 것이다.

'놀라워. 패전한 독일이 물러난지 얼마나 됐다고 파리 사람들은 전쟁 전으로 돌아갔어. 그게 인간이야. 다 잊는 거지. 과거보다는 현재고.'

아니면 어쩌겠어요. 산사들은 살아야지요.'

'그게 그들의 해야 할 일이고.'

우체국을 나와 그들은 다시 센강 변으로 갔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잠깐 멈춰섰다. 에펠탑이 밑에서 부터 꼭대기까지 다 보였다.

'폭격을 피했군. 용케도.'

'일부러 그랬을까요? 아니면 조준했는데 빗나갔을까요?'

'글쎄. 독일 전투기들이 그 정도로 형편 없진 않았을 거요. 나름 문화유산에 대한 보호책이라고 봐야할까.'

'그럴지도 모르지요. 참 인간은 모르는 것 투성이에요. 사람은 짐승처럼 마구 죽이면서 무생물인 철탑을 살려두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어요.'

'자기들 땅이라고 생각했겠지. 자기들 건데 굳이 파괴할 필요가 없었을 거야.'

'그런가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어쨌든 살아 남아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으니 굉장한데요.'

'그래, 봄에 저기 한 번 올라가보자. 시내가 다 내려다보이면 장관 일거야. 그나저나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지?'

유지가 잡은 손을 풀며 물었다. 그때 거지 서너 명이 달려와 손을 내밀었다. 손은 얼굴만큼 검었는데 살짝 웃을 드러나는 하얀 이빨이 대조적이었다.

유지는 모른체 지나가자고 머뭇거리는 점례의 손을 잡아 끌었다.

'소매치기야. 순진하고 모자란척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뱀처럼 날렵하거든.'

유지가 돈이 없다는 시늉을 하면서 그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한 번 당할 뻔한 적이 있거든. 이번처럼 지난번에도 서너 명이 저런 표정으로 다가왔어. 아무 생각 없이 밥 먹을 만큼 주려고 했는데 글쎄 지갑을 꺼내는 순간 달려들어서 뺏으려고 하더라고. 어찌나 빠르고 날래던지 거의 뺏길 뻔했지. 다행인 것은 손에서 떨어진 지갑이 그들 쪽으로 가지 않고 내쪽에 있었던 거지. 내 손이 한 발 빨랐어. 다시 집어넣고 꼼짝 않고 노려봤지. 어린애들이 빤히 마주 보면서 뒷걸음질 치면서 인파 속으로 사라졌어. 거리낌이 없더군. 호의를 베풀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어.'

'지금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그래 맞어. 동양인들은 표적이야. 지난번에 좋은 운이 이번에도 좋다고 보장할 수 없어.'

'그래요, 말로만 들었던 것을 눈으로 직접 보니 조심해야겠네요.'

이런 소동을 겪고 나서 그들은 성당 앞에 발을 멈췄다.

'오려고 했던 곳이에요.'

점례가 기대에 찬 눈으로 탑의 꼭대기를 올려다 보면서 감탄했다.

이곳도 에펠탑처럼 파괴되지 않고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노트르담 대성당.

'소설가 책에도 여기가 나오지.'

유지가 아는 체를 하면서 책 속의 장소를 찾았을 때 짓는 작은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외관이 웅장했다. 높이 솟은 첨탑이 신의 엄청난 위상을 가늠케 했다.

'과거의 사람들이 이 성당 앞에서 얼마나 주눅이 들었을까.'

'들어가 봐요. 좀 무섭긴 하지만.

점례는 유지의 등을 밀었다. 안전하게 뒤를 따라가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남자를 위하는 행동이었다. 안은 온화했다. 환하지는 않았으나 어둡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실내에 익숙해지자 안의 있는 것들이 다 눈에 들어왔다.

둘은 뒷자리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가볍게 기도하려는 듯했다. 점례는 무엇을 빌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유지가 일어나서 따라 일어났다. 처음에는 자리를 바꾸려나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유지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더구나 자신들의 바로 앞에 덩치 큰 서양인 서너 명이 앉자 그것을 이유로 삼았다. 하여튼 점례는 유지를 따라 일어나 기도대신 내부를 구경했다.

향로에서 타오르는 촛불이 촛농을 녹여내고 있었다. 그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숙연했다. 넓은 공간에 별 잡음이 없어 더 고요했다. 아직 정식 미사 시간은 아니어서 사람은 군데군데 있어 혼잡하지 않은 것이 이런 분위기를 더했다.

'없던 죄도 사하고 싶어지는군.'

유지가 농담 삼아 한마디 했다.

'그래요. 엄숙하지요. 이런 분위기라면 죄짓고는 못살 것 같아요.'

'나도 그래. 그런데 이런 성당의 지하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난 거야. 상상하기도 힘들지. 이방인들을 이단으로 잡아들였어. 마음에 안 들면 마녀로 몰아 가뒀지. 그리고 불에 달군 인두로 살을 지졌어. 살타는 냄새가 성당에 가득 찰 때도 있었지. 불어, 불면 살려줄게. 처음부터 아니었던 그들은 고문에 못 이기고 살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그만 실토한거야. 거짓인거지. 그걸 알면서도 고해신부들은 그들을 이용했어. 마녀인 것을 시인하고 앞으로 주님의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한 그들을 신의 이름으로 용서했어. 밖으로 나온 이들은 기다리고 있던 군중들 앞에서 돌팔매를 맞고 죽어갔어. 신이 용서는 이런 식이었어.'

용희는 소름이 끼쳤다. 닭살이 돋아 몸이 으스스했다.

'여기서 나가요.'

'그럴까.'

그들이 나갈 때 스테인드글라스를 타고 들어온 빛이 형용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모습을 그들 앞에 뿌려댔다. 길을 잘 찾아가라고 인도하는 것처럼.

'배고파요.'

'인정.'

'파스타 어때요?'

'인정.'

유지가 점례의 물음에 짤막하게 대꾸했다.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흔쾌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나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거기서 한거에요. 빵을 훔친 농부에게 신부는 내가 주었다고 말하지 않은 거죠. 경찰에 끌려간 농부 도둑은 빵 하나 때문에 목숨을 잃었죠. 용서나 화해나 그런 것들을 왜 거기에 없었어요'

'그러 게. 그런데도 그들은 신으로 부터 받은 상처에 굴하지 않았어. 악착같이 살아 남은 거지. 어쩌면 그들이 신보다 더 강할지도 몰라.'

김이 무럭무럭 나는 음식이 나왔다. 냄새도 고소했다.

'먹자, 맛있겠다.'

유지가 면을 포크에 감으면서 말했다.

'그러게요.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하잖아요.'

'비유가 좋아. 조선 속담인가?'

'그래요.'

'그런 걸 내게 많이 말해줘. 글 쓰는데 도움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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