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2-12-09 18:50 (금)
백발의 노인이었으나 그 아래 눈썹은 짙고 검었다
상태바
백발의 노인이었으나 그 아래 눈썹은 짙고 검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3.26 11:47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은 언제나 기어이 온다. 가지 말았으면 하는 시간이 가는 것처럼 그런 기적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만 해도 기적이 아닌가. 또 어떤 기적을 바라겠는가. 

용희는 일어섰다.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나쁜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 그녀는 몸을 한 번 떨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면서 자신에게 닥쳐 오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 지휘관 숙소로 향했다.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5분여 거리를 가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다시 버려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렇게 억울했다. 겨우 진창에서 벗어났는데 다시 그곳에 빠지고 있다. 다른 사람은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보기에는 그랬다.

병사를 치료하고 그들에게서 때로는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 죽어가는 그들의 손을 잡고 마지막을 배웅할 때 용희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자신이 고마웠다.

살아 있다는 존재감이 들었고 그것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났다.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다시 누구나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드나무 신세로 전락했다.

말수나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지휘관에게서는 혐오의 느낌 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그녀는 주머니 속의 약병을 손에 꼭 쥐면서 자신의 운명이 여기서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지휘관은 등을 보이고 있었다. 앞으로 조금 구부정하게 숙인 등에서는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노크에 반응이 없었고 문여는 소리에도, 그녀가 발을 옮겨 바로 등 뒤에 섰을 때도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 용희는 주사기를 전투복 깃 사이로 드러난 목 뒤에 깊이 찔러 넣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부들거리는 심정으로 그녀는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지휘관은 왼손으로 술병을, 오른 손으로는 식탁을 모서리를 잡고 균형을 잡은채  채 미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어디 한 군데 흠잡을 수 없는 완벽한 군인의 뒷모습이었다. .

그런데 그런 그 느낌은 불과 몇 초 사이에 사라졌다. 그는 몸은 지탱했으나 정신은 놓치고 있었다. 눈을 들어 들어온 누군가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려고 온 용희의 존재를 잊었다.

‘왔습니다, 지휘관님.’

그녀는 작지만 단호한 어조로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명령에 따라 왔으니 지시를 내려 달라는 투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지휘관은 대꾸가 없었다. 단정한 그의 몸이 옆으로 조금 움직였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그가 앉은 채로 잠에 빠졌다.

순간 그녀는 혼내 주려는 생각이 사라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술에 취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을 그녀가 확실히 인식한 순간 그가 큰 소리 없이 옆으로 쓰러지면서 몸을 길게 뻗었다.

용기를 낸 용희가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눈이 반쯤 뒤집힌 그는 이미 인사불성으로 취해있었다. 용희는 주머니 속의 약병을 만지작거렸다.

역겨운 알코올 냄새가 밑에서부터 올라왔다. 용희는 어찌해야 좋을지 잠시 망설였다. 그 시간은 오지 말라고 빌 던 그때보다 느리게 지나갔다.

그녀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기로 했던 마음을 돌려먹었다. 하려고 했던 목적이 사라지자 그녀는 긴장이 풀렸는지 사방을 둘러 보는 여유를 찾았다.

한 면 벽을 꽉 채운 주변 지도와 지도 옆에 걸린 긴 환도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칼을 떠올릴 때마다 죽마을 순사가 절거덕거리면서 다가왔던 환영에 시달렸다.

이제는 그것에서 벗어났나 싶었는데 다시 그것을 보자 용희는 움찔했다. 고정된 그것이 살아서 움직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 정신을 수습했다. 사쿠라 꽃이 활짝 핀 다른 쪽 벽의 위쪽에 걸린 커다란 시계의 바늘이 자정을 가리켰다.

더 둘러볼 것이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몇 발짝 걸으면서 등 뒤에서 어떤 기운이 오는지 살폈다.

오싹하지도 그렇다고 따뜻한 전송의 느낌도 없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그녀는 들어갈 때 보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것을 알았다. 넘을 수 없는 벽을 넘어서는 기분이 이런 걸까.

한시바삐 여기서 달아나기 위해 남은 시간은 푹 자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다른 계획이 있었다.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계획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몽유병 환자가 깨어나서 자기 방을 찾아 들듯이 서둘러 자기 자리를 향해 용희는 움직였다.

 

갑판은 넓었다. 이렇게 넓은 것이 바다에 떠서 움직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작은 보트를 타고 동아줄 사다리에 의지해 어렵게 올라온 군함의 갑판에는 여기저기 전투의 흔적들이 아직 치워지지 않고 있었다.

굴러다니는 탄피와 맞은 총알 자국들이 어지러웠다. 용희는 구토를 느꼈다. 끌려올 때 가졌던 그 느낌이 갑자기 올라왔다. 그러나 그녀는 그때의 그녀는 아니었다. 새 옷을 처음으로 입은 아이처럼 더러워져서는 안 된다는 강한 압박이 그녀를 지배했다.

스스로 참아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정신으로 그것을 이겨내려고 열중했다. 당장 치료해야 할 환자는 보이지 않았다. 일본 군복을 입고 팔뚝에 의사를 표시하는 붉은 십자가 완장을 찬 말수는 진짜 일본 의사처럼 보였다.

갑판에는 병사들이 줄지어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왔다 갔다를 되풀이했다. 구령을 붙이는 장교인 듯한 사람에게 말수가 다가갔다.

그는 능숙한 일본어로 돌봐야 할 환자가 있는지 물었고 없다는 대답에 함장실로 안내를 부탁했다. 그의 건강을 살핀다는 이유에서였다. 의사가 탑승했으니 필요하면 이용하라고 알려야 한다.

용희도 그 옆에 달라붙었다. 한 사람이 빠져나가기도 힘든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용희는 막 해내고자 했던 일을 마친 것처럼 홀쭉한 기분을 느꼈다.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혼자 웃던 그 시절로 한발 다가서고 있었다. 배가 속도를 냈다. 엔진음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함장은 들어온 이들의 기분은 아랑곳없이 하기 싫은 일을 마지 못해 한다는 듯이 팔을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형식적인 절차였다. 청진기를 댔다 뗀 말수는 걱정 없다는 투로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건강 이상무’를 군인처럼 외쳤다.

함장이 가벼운 웃음을 응수했다. 그제 서야 용희는 그가 제복에 어울리는 군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휘관이 입은 것과는 사뭇 다른 함장의 제복은 위엄이 서려 있었다.

훈장인지 계급인지 앞가슴에 달린 것들이 등불 아래 반짝였다. 그가 모자를 벗었다. 마치 염색한 것처럼 머리칼이 모두 흰색이었다.

백발노인이었으나 그 아래 눈썹은 검고 짙었다. 그리고 두 눈은 붉고 강렬했다. 그가 용희를 내려다봤다. 이래 봬도 나는 아무 까닭 없이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윗옷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어린애를 대하는 듯한 눈길이 영 꺼림칙했다.

그는 형식적으로 몇 마디 묻고는 도착지에서 걸을 수만 있다면 모두 배에 태우라고 말했다.

‘싸울 인원이 부족해.’

그는 군인답게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착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 갑판으로 올라가 잠시 쉬라며 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말수에게 의대 시절 전공이 뭐였냐고 물었다. 말수는 당황했다. 이런 질문은 처음 받아 봤고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입학하고 바로 자원입대했다고 얼버무리듯이 말했다.

'세균에 대해서 아나.'

그는 밑도 끝도 없이 세균을 꺼내 들었다. 균이라면 상처 난 곳이 아물기도 전에 감염되는 것 말고는 말수는 알지 못했다. 치료한 경험이 제법 있다고 말수는 대답했다.

‘그런 것 말고.’

함장은 햇병아리가 어미의 심정을 어찌 알겠느냐는 표정으로 말수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너는 아느냐고 묻듯이 용희에게 시선을 던졌다. 말수에게 보였던 딱하다는 표정은 아직 거두지 않았다.

용희도 말수가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함장은 의사가 자신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더는 묻기를 포기했다.

높은 신분의 그가 아랫것들과 너무 오래 이야기했다는 자괴감 같은 것이 돌아서는 그의 몸짓에서 묻어났다. 자신이 자제해야 옳다는 듯이 함장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내려갔던 계단을 타고 그들은 다시 갑판 위로 올라왔다. 작대기보다도 긴 포신 옆에서 병사 몇 명이 쏠 적이 있는지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쪽에서 대열을 이룬 분대급 인원이 이쪽으로 군홧발 소리를 일부러 크게 내면서 다가왔다. 감정을 잘 절제했다고 생각했던 말수는 앞장선 장교와 시선을 마주치자 다가가기 위해 발을 옮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홍길동 2022-03-30 01:34:44
........?소설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