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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불신시대(1957)-믿을 수 없는 신산한 시대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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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불신시대(1957)-믿을 수 없는 신산한 시대의 저항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1.03.05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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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이 연달아 오면 무던한 사람도 세상을 탓하게 된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다.

하필 그런 일이 나한테 일어난 것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쌓인다. 그 마음은 나와 연관 있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태에서 더 심해진다.

주변인들이 마음을 눅이는 대신 모른 체하거나 되레 불행을 더하면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말을 달고 살 수밖에 없다.

이른바 불신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사람의 하루는 고달프다.

박경리의 단편 <불신시대>는 말 그대로 누구도, 심지어 신도 믿지 못하는 시대에 사는 사람의 애달픈 이야기다.

배경은 서울 갈월동 인근이고 시기는 한국전쟁 직후다. 9.28 수복 과정에서 남편이 폭사한다. 죽기 전 남편은 경인국도 변에서 내장이 터져 죽어가는 소년 괴뢰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쟁은 끝났어도 참상은 끝이 아닌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남편 없는 홀로된 여자의 삶이 오죽 신산하겠는가. 더구나 실직상황이니 의식주는 형편없다. 호구지책만 해도 다행이다 싶다.

진영은 친정엄마와 아들 문수와 함께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한다.

산사람은 살아야 한다. 남편도 죽기 전에는 산 사람이었다. 그러니 죽기 전까지는 살 수밖에 없다.

그나마 아홉 살 어린 아이일망정 아들이 있어 다행이다. 그런데 그 아들도 죽었다.

길에서 넘어진 아이는 살 수 있었는데 의사의 잘못으로 그렇게 됐다. 엑스레이도 찍지 않고 마취도 없고 약도 준비하지 않고 칼로 뇌를 빠개는 실수를 저질렀다.

의료사고의 개념조차 없던 시절 진영은 몸부림치는 것으로 도살장의 망아지처럼 죽어간 아들과 작별했다.

그러나 이별의 아픔은 남편과는 달랐다. 아들이 가고 난 뒤 한 달은 그야말로 천년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진영은 술을 먹는다. 잠시나마 잊고자 하나 망령은 그럴수록 더 새록새록 살아난다.

어느 날 성당의 종소리가 울린다. 그녀는 발길을 그쪽으로 돌린다. 불교도인 어머니는 못마땅했으나 그렇게라도 해서 딸의 마음이 숙어 들면 바랄게 없다.

▲ 남편 잃고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여자의 스산한 삶이 가슴을 저민다. 누구하나 믿을 사람이 없다. 성당도 절도 그렇다.
▲ 남편 잃고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여자의 스산한 삶이 가슴을 저민다. 누구하나 믿을 사람이 없다. 성당도 절도 그렇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칠촌 아주머니는 천주님이 너를 사랑한다고 위로한다.

그러나 진영은 자신의 위로나 구원 같은 것은 안중에 없다. 오로지 아들 문수가 천당에 가기를 바랄 뿐이다.

인간이 아닌 신의 도움으로 슬픔을 이겨내고 싶다. 그러나 성당은 그에게 구원도 사랑도 아들의 천국행도 이뤄주지 못했다.

예배당에 갔더니 눈 감으로라고 해 놓고 신발을 도둑질해 가고 미사가 끝날 무렵에는 잠자리 채 같은 주머니를 불쑥 내밀며 헌금을 강요한다.

신전에서 신을 모독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진영의 마음은 요동칠 수밖에 없다.

어느 날에는 바랑을 맨 신중(여승)이 염불을 외고 있다. 때마침 어머니는 입에 달고 사는 그 속상한 마음을 스님에게 하소연한다.

그러나 스님의 마음은 염불보다는 잿밥에 있다. 시주받은 쌀을 팔고 어서 거래를 끝내고 홀가분하게 자리를 뜨고 싶어 한다.

그런 여승을 장사꾼 대하듯이 하고 나서 어머니는 마음에 걸렸던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문수를 절에 올리자고 한다.

곗돈을 말아먹은 칠촌 아주머니가 원금이라도 주겠다면서 선심 쓰듯 준 2만 환으로 천도제를 지내기로 한다.

돈만 내면 아들을 위해 단독 행사를 열어주는 절이 성당보다는 낫다. 진영은 그렇게 자신을 위로한다.

폐결핵이 도진다. 열이 난다. 평소 다니던 병원에 가보지만 주사 분량을 속이고 어떤 병원은 동네 건달이 진찰을 하고 또 다른 병원에서는 빈 약병을 판다.

진영은 미치도록 웃고 싶지만 한 번 웃음이 터지면 정말로 미쳐 버릴지 모른다고 공포에 휩싸인다.

백중 전날 문수의 천도제를 지내기 위해 여승이 사는 절에 새벽같이 도착했다.

그러나 스님은 서장 부인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기다리라고 하고 시작하다 말고 서장 부인이 왔다고 어서 대강대강 끝내라고 재촉하고 불경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돈의 액수가 서장 부인보다 적었기 때문이다. 영혼을 달래는 것에도 차별이 존재했다.

아주머니에게서도 성당에서도 절에서도 진영은 위로받기보다는 상처를 입는다. 그녀의 불신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 진영은 다시 절을 찾는다. 이번에는 아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시골로 간다는 핑계를 대고 문수의 사진과 위패를 가지고 온다. 그리고 불로 태운다.

그 후 진영은 험난한 여정을 이기지 못하고 남은 삶을 포기했을까. 주저앉아 생의 마지막을 허비했을까.

아니면 살아있을 때까지 불신의 그 모든 것과 싸우고 저항했을까. 눈 쌓인 언덕을 내려올 때 땅을 짚고 있는 그녀의 두 발에 힘이 실렸을까.

<김약국의 딸들>,<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대표적 단편소설이다.

전쟁 후 홀로 살아가는 여성의 좌절과 아픔 그리고 강인한 생명력이 잘 녹아 있다.

<불신시대>를 포함해 그의 초기작품들은 자신의 경험담을 써 사소설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실제로 작가는 1950년 남편과 사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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