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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11:48 (금)
293.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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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18.10.0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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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극은 여로 모로 흥미진진하다. 사실에 근거하지만 굳이 사실일 필요는 없다. 재미를 위해 더하고 빼고 마술처럼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이끌 수 있다. 과거사이니 중요한 사료가치가 아닌 이상 딱히 진실일 필요도 없다.

이두용 감독은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로 사극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한국 영화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궁금하니 이야기 속으로 얼른 들어가 보자. 주인공 길례( 원미경)는 제목의 바로 그 여인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여인의 잔혹한 개인사가 되겠다. 사건이 몇 개 연이어 일어난다.

그 중 잔혹의 압권은 후반부에 나온다. 씨받이와는 달리 씨내리를 당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당한다고 한 것은 스스로 원해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사랑하는 남편 윤보(신일룡)도 가담했다. 조상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윤보 부모 등살에 못이기는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윤보도 엄연히 범행을 기획하고 가담하고 성공시켰다.

거기다 완전범죄를 위해 길례를 죽인다. (실제로 윤보가 길례를 죽인 것은 아니지만 자살하라고 은장도를 준 것은 살인에 버금간다. 이 장면에서 윤보는 ‘고려사열전’을 들먹인다. 첩과 붙은 종놈의 남근을 잘라 첩에게 먹였다는 내용이다. )

 

아들을 위해 종놈과 상접 붙은 길례가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결과도 그렇게 나오니 제목의 잔혹이 이해간다. 양반집 체통에 서지 않는 일이니 알아서 대들보에 목매달아 죽는다. 종놈역시 뒤에서 쏜 윤보의 화살을 맞고 황천길을 피하지 못한다.

잔혹사 중 압권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이보다 먼저 나오는 잔혹사 역시 이에 못지않다. 그러니 다시 화면을 앞으로 돌려 처음부터 일의 진행 과정을 더듬어 보자.

살림이 어려운 길례는 양반 집의 아내로 팔려간다. 아내인데 남편은 없다. 죽은 남편을 대신해 아내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팔려갈 때 부모의 애타는 심정을 느슨하게 처리한 장면은 상기할수록 애잔하다.

그 집은 길례가 수절하면 나라로부터 열려 문을 하사 받는다. 세금을 면제받고 병역도 예외다. 양반네는 몽달귀신이 된 아들의 원귀도 풀어주고 혜택도 받으니 나쁠 것이 없다.

그 집 조카이면서 양아들은 아직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 벼슬을 하지 못하는 신세다. 매일 공부한다고 책상 앞에 마주 앉아 있으나 그 밑에는 술병이 놓여 있을 정도로 공부와는 거리가 멀다.

시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여자 티가 나는 길례가 ‘음양의 이치’를 알지 못하도록 디딜방아를 치우라고 지시하는 등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그 역할을 도와야 할 양아들은 어느 날 길례를 겁탈한다. 그 어려운 일에 성공하자 그의 범행은 과감해지고 결국 꼬리가 밟힌다. 패륜의 죄를 범한 그는 진사 벼슬은커녕 아비가 보는 앞에서 하인들의 도끼에 맞아 죽고 길례는 풀려난다.

시집가도 좋다는 앞가슴에 접포 표식을 한 그녀를 윤보가 처음으로 발견한다. 그 때부터 길례는 윤보와 짧지만 강렬한 행복을 맛본다. 그러나 그 행복 길지 않다. 윤보집의 대감은 일할 때 엉덩이 놀림이 좋은 그녀를 눈여겨본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대감의 첩 노릇을 한다. 아무리 종놈이라고 해도 건장한 윤보는 대감이 보기에 거치적거린다. 매타작을 해도 시원치 않다. 대감은 꾀를 낸다. 적어도 보름이 걸리거나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멀리 해주 장으로 윤보를 떠나보낸다.

그 뿐이 아니다. 동행한 하인은 칼을 빼들고 죽이려 한다. 하지만 주인공 윤보가 어디 쉽게 죽을 인간인가. 되레 하인을 죽인 윤보는 대감 집으로 내 쳐 달려간다. 그리고 마침 일을 치르려는 대감을 준비한 낫으로 내리쳐 죽인다. 피 묻은 얼굴을 씻지도 않은 채 둘은 도망친다. (첫 장면과 겹쳐지는 대목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윤보는 반역으로 몰려 몰락한 윤씨 가문의 자제다. 시간은 흘러 정권이 바뀌어 집안이 복권된다. 윤보는 암자에 숨어 있던 길례를 데려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여기까지라면 길례는 잔혹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행복한 결혼 생활이 3년이 지났다. 후처가 귀한 집안은 불안하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칠거지악 중의 으뜸이다. 허나 문제는 길례가 아닌 윤보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밭이 아니라 씨가 그렇기 때문에 꽃피고 열매 맺지 못한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러니 길례에게 미안해하면서도 후처를 들인 것은 처방이 잘 된 것이 아니다. 집안은 첩도 소용없고 씨받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뒤늦게 받아들인다. 미륵불의 코를 갈아 먹은 것은 다 헛일이다.

그래서 짜낸 꾀가 씨내리기다. 건장한 종놈이 선택된다. 억지로 길례의 방에 밀어 넣는다. 그 이후의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앞서 다 말했다. 이 쯤 되면 굳이 제목에서 잔인하고 가혹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아도 된다. 이보다 더 잔혹한 여인 사는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제목에 물레가 두 번이나 나오는 것은 어려울 때, 혹은 몸이 달아오를 때 그 것을 이겨내고 식히기 위해 길례가 물레를 돌리기 때문이다. 물레 돌리는 장면은 물레방앗간의 물레가 돌아가는 것만큼이나 운치가 있고 어떤 의미가 있다.

국가: 한국

감독: 이두용

출연: 원미경, 신일룡

평점:

 

: 지금 세상이라고 해서 없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이런 주제는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겨우 조선시대 일일 뿐이다. 그 때의 여인들은 그런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불가의 일이지만 말이다.

죽은 자와 산자가 결혼하는 풍습은 아마도 식인종 의식과 버금갈 만큼 세계 문화사적 충격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당시는 그 것이 법에 어긋나지도 윤리에 벗어나지도 도적 적으로 크게 문제시 되지도 않았다.

돌아보면 그 것은 여자에게 못 할 짓이었다. 이런 영화를 보면서 지난 세월을 반성하고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을 해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토속적인 냄새가 물씬 난다. 거기다 젊고 예쁜 원미경을 등장시켜 에로티시즘을 가미했다.

족히 500년은 묵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만한 당산나무 아래서 이곳을 지나가는 첫 남자에게 낙점되기를 기다리면서 흰 소복을 입고 서성이는 원미경은 짙은 안개와 잘 어울린다.

이 때 어리바리 같은 신일룡이 등장해 왠, 떡이냐 싶어 흡족한 표정을 짓는 장면 역시 보아서 질리지 않는다.

이런 장면도 인상적이다. (정돈된 방안에서 쪽진 머리를 하고 소복보다 더 흰 적삼을 입고 서 있는 모습은 신윤복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시집에 익숙할 무렵 손윗동서를 부르러 갔을 때 방안에서 벌이는 남녀의 정사와 그 모습에 충격 짓는 표정도 리얼하다. 특히 자면서 생각하다가 두 손을 이용해 몸부림치는 모습도 색다르다. 창호지 너머로 갓 쓴 대감이 어른 거릴 때 길례는 놀라는데 그 것은 무섭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맛 본 어떤 기대감에 들떴기 때문일 수도 있다. )

영화는 자칫 신파로 흐를 수 있었으나 과감하게 피를 흘리는 장면을 고비마다 보여줘 이를 무사히 극복해 냈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제에서도 성과를 거뒀다. 이두용은 감독은 <피막>(1980)에 이어 이 영화로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시대모순을 과감하게 혁파해 나가는데 성공했다.

한편 길례가 망자와 시집갔을 때 시어머니가 들려주는 열녀의 예를 들어보자. ‘옛날 경상도 대구고을에 자말이라는 종년이 살았다. 시집가기 전에 상전이 죽었는데 죽기 전에 술에 취해 그 상전이 한 번 안았다는 인연으로 70평생을 수절로 살았다.(자말은 수절여인의 대명사이며 '자말패도'라는 사자성어도 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17살 난 처녀가 시집을 갔는데 20살 남편이 병으로 죽었다. 그 날부터 신부는 굶어 석 달 열흘 만에 죽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장한 죽음이라는 답변을 얻어 내는 시어머니는 과연 장한 여인이다. (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린 길례는 숫돌에 은장도를 갈고 있다. 조선 숙종 때 지었다는 <내훈>을 줄줄 외는 그녀에게 숫돌 갈기는 식은 죽 먹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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