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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 명동에 밤이 오면(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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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2018.08.09  11: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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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 라스베가스, 쏘피아, 홍콩, 아모레, 재회 등 등. 이런 이름들을 달고 있는 간판 안으로 들어가면 술을 먹을 수 있는 바가 나온다.

바에는 바걸이 있고 마담이 있고 지배인이 있고 주인이 있다. 이들이 한 결 같이 기다리는 사람은 매상을 올려줄 손님이다. 그 중에서도 돈 많은 남자가 최고 대접을 받는다.

명동에 밤이 내리면, 네온사인이 불을 밝히고 그 불을 따라 불나비들이 거리로 모여든다.

세련된 차림의 윤 마담(최은희)도 눈에 띈다. 어깨가 드러나는 검은 민소매를 걸치고 깔끔하게 올림머리를 한 그녀가 계단을 올라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선다. 술을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술을 먹으러 오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서 그가 일하는 일터로 출근한 것이다.

이미 많은 바걸들이 손님맞이에 분주하다. 발톱 치장을 하고 거울을 보고 수다를 떨고 전화를 걸고 만반의 준비를 한다. 한 떼의 신사들이 들이닥친다. 지금도 유효한 오랜만에 오셨어요. 그동안 바쁘셨나요.

하나마나한 질문과 시답지 않은 답변이 오갈 즈음 술이 도착하고 도착한 술을 먹고 그래서 얼큰해 지면 칸막이 안에서 원하는 파트너를 찾는 눈길이 분주해 진다.

바걸들은 오장육부를 내놓고 손님을 접대한다. 왕인 손님의 비위를 맞춰야 매상을 올리고 그래야 수중에 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돈을 벌어서 직접 자기 바를 운영하는 것이 바 걸 들이 수모를 견디며 술시중을 드는 이유다. 더러는 사랑을 찾기도 한다. 윤 마담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자인 것 같지만 풍기는 외모나 하는 행동으로 보아 그런 세속의 목적 보다는 후자인 숭고한 사랑 쪽에 무게가 쏠린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를 보러 오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야 한다. 주인의 눈치도 봐야 한다. 아직은 사랑보다는 돈이 더 필요한 시점이다. 늙은 부모와 무능한 오빠와 아픈 조카를 위해 몸뚱이를 쉬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는 여러 단골이 있다. 사장들과 은행지점장이다. 심한 사투리를 쓰는 강사장( 이예춘)과 젊잖아 보이는 오사장(김승호)이 호시탐탐 윤 마담을 노린다. 그러나 돈 많은 흥국실업 이사장(주선태)이 윤마담을 차지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영화 초반의 판세는 이렇지만 어떻게 결론이 날 지는 지금 당장은 알 수 없다.

어찌해 보겠다는 일념이 이 사람들의 두 눈에 이글거린다. 그러다 조만간 사단이 날 것 같다. 주인 여자는 윤 마담이 적당히 허락해 이들을 다른 가게에 뺏기지 않고 손님으로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났다.

고고한 척 고상을 떠는 윤 마담에 곱지 않은 시선이 쏠린다. 그녀도 생각 같아서는 못 이기는 척 수작을 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이 곳 생활에 이 골 이 났으니 남자들이 원하는 딱 하나인 그 것을 그녀가 모른다면 말이 안 된다.

어느 날 은행지점장( 남궁원)이 들어온다. 그가 올 때 윤 마담의 눈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는 다른 빛이 난다.

다크호스다. 윤 마담이 생각하는 사람은 강사장도 오사장도 이사장도 아닌 바로 은행지점장이다. 두 사장에 비해 지점장은 젊기도 하고 잘 생기기도 하면서 점잖기까지 하니 윤 마담이 동할 만하다.

그러나 윤 마담에게는 그 만의 비밀이 있다. 세상에 비밀 없는 사람은 없지만 그녀의 남편은 10년 전에 죽었고 죽어 관 속에 묻힐 때 그녀는 머리털과 편지를 같이 넣으면서 다시는 다른 남자와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것이 걸린다. 다른 사람들이 어디서 이런 과거를 알아듣고는 그런 사실에 대해 짓궂게 물으면 그 건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눙치지만 마음 한 구석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죽은 남편에 대한 죄의 식이 있다.

그 즈음 같이 생활하던 소라(강효실)가 윤마담도 아는 스폰서를 만나 독립을 선언한다. 새로운 바를 냈으니 좀 더 자극적이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손님을 끌 수 있다. 윤 마담 손님을 소라가 낚아채기도 한다.

그런 사실이 미안한지 윤 마담을 만나자 소라는 눈시울을 붉히며 사과하기도 하고 그러면 윤마담은 세상사는 것이 다 그렇지 뭐 하면서 괜찮다고, 성공하라고 위로하기도 하는 등 오고가는 대화가 아주 깔끔하다.

소라는 성공했을까. 성공은 바걸이 원하거나 다짐한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리 저리 물 좋은 곳만 찾아다니는 이사장은 윤 마담이 쉽지 않자 소라 네는 활기가 넘치는데 여기는 영 아니라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가게를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라는 빚 독촉에 시달린다.

아무 조건 없이 돈 100만원을 빌려줬다는 흥국실업 이사장은 소라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자살하자 발인도 하기 전에 그녀 어머니에게 차용증을 쓰라고 독촉한다. 비정한 술의 세계가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윤 마담은 소라의 죽음에 관계가 있는 이사장이 자기 술집으로 술 먹으로 오자 술김에 화풀이를 해보지만 손님 상대 싫으면 직공으로나 취직하라는 옆자리의 친한 동생 금자의 핀잔만 듣는다.

소라의 죽음은 명동 거리의 바 걸 들에게 전해지고 걸들의 슬픔은 밤과 함께 깊어 가지만 산 사람들은 살아야 했으므로 그 들의 생활은 달라질게 없다.

윤마담에 대한 남자들의 마수는 여전하다. 우이동 계곡으로 드라이브나 가자며 꼬드기는가 하면 가게 하나 얻어 주겠다고 은근한 제의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윤마담의 대답은 정해진 레퍼토리처럼 언제나 노다. ( 이 말은 대화중에 혹은 홀로 생각하면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녀가 직접 나레이션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바걸 중에는 참한 신랑을 얻어 결혼해서 떠나기도 하고 그런 동료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그 가운데 어설픈 주례를 서는 윤마담은 여자란 남자 하기에 달렸다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을 옮기기도 한다.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밤이 오면 명동 거리는 또 활기를 띈다. 미군도 들락거리고 떠났던 손님도 돈 벌어 다시 오고 그런 손님들 사이를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바걸들은 정신없이 이리 저리 자리를 옮겨 가면서 매상 올리기에 정신이 없다. (직업의식이 투철하기는 지금보다 그 때가 더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낮이 되면 깔아 논 외상값을 받기 위해 사무실을 전전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손님을 차별 없이 대해야 한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하고 틈만 나면 참 슬픈 직업이지, 라고 술 취해 말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한탄조로 내뱉기도 한다.

치근거리는 남자들 가운데 한 명을 골라야 할 시점이 윤마담에게 점점 다가오고 있다. 여자의 두 번째 고개마루턱에 올라선 나이이니 그럴 만도 하다. 수표를 보여주고 가게를 같이 구경 가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은 흑심 때문이 아니라고 순정을 강요하는 이런 저런 사장들 가운데 한 명을 낙점해야 한다.

착해 보이는 오사장이 불란서에서 친구가 사온 향수라며 선물한다. 그녀가 아파서 잠시 요양하러 가면 과일 바구니를 들고 문병을 온다. 근사를 차를 몰고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기도 하는 친절을 보이자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고 윤 마담은 흔들린다.

그에게 줄 넥타이를 고르고 그와 평생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 사장이라는 남자는 알고 보니 빈털터리. 차도 빌린 것이다. 아이 딸린 부인이 와서 어지간히 계집을 밝힌다며 남편을 깎아 내린다.

쓸쓸한 윤마담의 뒷모습에서 그녀의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죽도록 취한 그녀 앞에 시나리오대로 은행 지점장이 다가온다.

그녀는 오래 간직한 것을 그에게 주고 그와 남은 인생을 함께 할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지점장은 부산으로 발령 나서 내일 떠난다고 통보한다.

긴 밤의 사랑은 어디로 갔나. 매담( 마담이아닌 매담으로 발음한다.)을 사랑하지만 가정을 버릴 수 없다는 지점장의 말에 허탈한 그녀는 그가 준 10만원을 지점장의 부인에게 돌려준다.

이 지점에서 굳이 승자를 따지자면 윤 마담이 지점장을 앞선다. 그 전 까지 입었던 검은 옷 대신 흰 옷으로 갈아입고 미리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던 윤 마담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질 필요는 없다.

한편 윤 마담을 옆에서 지켜보는 지배인(이대엽)의 마음은 남자의 오리지널 순정이다. 그는 윤 마담이 오랫동안 지켜온 정조를 박지점장에게 주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윤마담이 비록 잠깐 동안이었지만 여자의 순정을 간직했다면 지배인은 남자의 그것을 더 오랫동안 보여줬다.

국가: 한국

감독: 이형표

출연: 최은희, 이예춘

평점:

: 지난주에도 마담이 나오는 영화를 보았다. 이번 주에도 이형표 감독의 마담 영화 <명동에 밤이 오면>을 보았다.

이주 연속 마담 영화를 본 것은 의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60년대의 시대상에 많은 영화감독들이 공감한 것에 동참했을 뿐이다.

<명동에 밤이오면>은 일본 영화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가 원작이다. 원작을 참고 했겠지만 나름대로 자기만의 색깔을 그려 완성도를 높였다.

현미가 부른 주제가가 매우 인상적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흘러나오는 애잔하고 서글픈 노래는 바걸들의 고단한 신세를 대변한다.

사장과 지점장에게 버림받은 윤마담의 미래는 이제 곧 올 겨울처럼 차갑고 이겨내기에 벅차기만 하다. 하지만 매서운 시련이라 해도 견뎌내야만 한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눈이 쌓이면 쌓이는 대로 그렇게 싸워 나가야 한다.

"어서 오십시오."

바걸의 생활은 오늘도 계속된다. 약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가슴 한 구석이 아리다. 그 약자가 여자이고 술파는 접대부라면 더 그렇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끼고 술집에 들어선 그녀들의 한 많은 이야기는 팔자소관이라는 짤막한 말로는 다 헤아리지 못한다.

다만 인생과 사랑과 돈과 술과 남자의 허영과 여자의 자존심을 살펴볼 뿐이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명동의 밤거리를 거닐면 박카스 바걸인 윤 마담이 술잔을 앞에 놓고 어서 오세요, 하면서 반갑게 맞이하는 환청소리를 듣게 될지 모른다.

그러면 그럴 생각이 없어도 맥주 한 잔 먹고 나오고 싶다.

창가의 2층이라면 더 좋겠다. 밤이 깊어 갈수록 밝아오는 거리를 내려다보고 싶다. 이름조차 명동이라 어두움을 싫어하는 그 명동의 밤거리에서 최은희의 노련하면서도 애간장 녹이는 숨소리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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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bgusp@newsm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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