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5-07-16 19:40 (수)
베트남, 프놈펜 그리고 맥아더 장군 동상
상태바
베트남, 프놈펜 그리고 맥아더 장군 동상
  • 의약뉴스
  • 승인 2007.12.0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며칠 전,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다녀왔다. 관광이라기보다 초등학교 4학년인 막내딸에게 조국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위한 역사 교육 차원에서였다.

베트남에 발을 딛는 순간 송구스러움과 죄책감에 조아린 머리를 들 수가 없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고 반만년을 이어온 백의 배달민족의 역사에 오점을 찍으며 맹호부대와 백마부대가 용병으로 파병되었던 당사국이 바로 베트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트남인들은 한국 관광객을 과거 침략자로 여기기보다 한류(韓流) 속에 오히려 호감을 갖고 있다고 현지 가이드가 설명을 한다.

“나를 우상화하거나 신격화하는 일이 없도록 무덤을 만들지 말고 화장할 것이며, 모두가 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처신한 것이니 전쟁이 끝난 후 미국편을 들었던 국민들에게 보복하지 말고 과거지사는 없었던 것으로 하라”고 유언했던 베트남의 위대한 지도자 ‘호치민’의 정신을 이어받은 베트남의 아침은 생동감 넘치는 오토바이의 물결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독재자 ‘폴폿’의 통치를 받았던 캄보디아는 GNP 가 300 달러에 불과할 만큼 너무도 대조적이다. 이 나라엔 세계에서 가장 지뢰 피해자가 많다. ‘폴폿’ 공산독재 정권이 퇴각하면서 정부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국민의 안전은 아랑곳없이, 전 국토에 지뢰를 묻어 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인이 후원하고 있다는 지뢰박물관에는 7 ~ 8 세 또래의 아이들이 한쪽 팔 혹은 다리가 끊어진 모습으로 갖가지 지뢰를 정돈하고 있다. 산과 들에서 무심결에 지뢰를 밟거나 굶주린 배를 채우려 몇 푼 안 되는 고철을 줍다가 엄청난 대가를 치른 것이다.

왓트마이 사원엔 ‘폴폿’ 정권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두개골이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층층이 쌓여 있고, 구천(九天)에 사무친 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불경소리가 구슬피 경내에 울려 퍼지고 있다. 1975 년 ~ 79 년 당시, 800 여만 명의 인구 중 1/3에 이르는 250여만 명의 양민들이 학살당했다고 하니 참혹한 상황을 상상 할만하다.

톤레삽 호수의 수상족(水上族) 마을을 방문했을 때, 입구에서부터 어린 아이들이 달려들고 있다. 지금쯤 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천진난만하게 뛰어 놀아야 할 나이에 새까만 손을 내밀며 구걸을 하거나 기념품을 팔아 생명을 부지하도록 한 그들의 지도자들이 원망스럽다.

배 위에서 생활하는 수상족 중엔 베트남 ‘보트 피플’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미국과 월남이 패망했을 당시 고국을 떠나 지금까지 남의 나라 호수에서 빌붙어 사는 그들의 생활상은 안쓰럽기만 하다.

일정을 마치고 캄보디아 씨엠립 공항을 나설 때가지 나의 가슴은 뜨거운 눈물이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나의 부친은 6. 25사변 때 국군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삼촌은 학도병을 지원해 전선에서 지뢰를 밟아 전사했다. 그러나 나는 조국을 원망하지 않는다. 어릴 적 미군들로부터 껌과 오렌지를 얻어먹던 나를 북한보다 훨씬 잘사는 오늘의 경제 부국 국민으로 키워준 조국을 사랑한다.

승산이 희박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나에게 조국을 돌려주었고, 우리 가족으로 하여금 캄보디아의 비극을 모면케 해준 맥아더 장군과 터키를 비롯한 16개 참전국 전사자들의 영령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달러를 벌기 위해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로 떠나고, 중동의 사막에서 뜨거운 모래 먼지를 마시며 오일 달러를 송금했던 우리 민족과 지도자를 존경한다.

우리가 선진국으로 더욱 정진하기 위해선 어려웠던 시절을 망각해선 안 된다. 맥아더 장군의 은혜를 배신하고 역사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

베트남인들도 우리의 과거를 용서하며 현실에 충실하고 있는데 같은 민족인 우리가 민족상잔의 과거사를 들추어서 무슨 득이 있겠는가.

남과 북이 스포츠 교류와 경제 원조를 통해 통일의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는 마당에 맥아더 장군 동상 논쟁을 끌어들여 국력을 낭비하는 일은 더더욱 어리석은 짓임을 깨달아야 한다.

* 1950년 6월 25일 새벽부터 시작된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밤 10시, 휴전으로 총성이 멎기까지 3년 1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6.25 전쟁으로 인해 150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10만 명에 이르는 고아와 40만 명에 이르는 미망인이 발생했다.

또한 연인원 580만 명에 이르는 16개 참전국 군인들 중 37,645명이 전사하고 40만 명이 부상했다. 전사자 들 중 35,381위는 본국에, 2,300위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치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