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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의 누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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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의 누렁이
  • 의약뉴스
  • 승인 2007.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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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대공원 후문에 들어서 벚꽃 가로수 밑을 조금 거닐면 우측 산자락에 청기와지붕의 건물이 위용을 드러낸다. 민속 전통 국궁(國弓)을 이어가는 대한궁도협회 인천남수정 사정(射亭)이다.

비록 나는 직업상 활터를 자주 찾지 못하는 한량(閑良)이지만 활터는 늘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곤 한다.

 봄에는 푸릇한 연둣빛 새싹의 모습으로, 여름엔 농익은 초록의 자태로, 가을엔 흘러간 청춘과 영욕의 세월을 반추하며 마지막을 곱게 장식하려는 단풍의 모습으로, 그리고 겨울엔 공수래공수거의 벗은 가지 모습을 침묵으로 가르치고 있다.

활터는 계절의 변화만큼 다양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몇 년 전, 주인 없는 개 두 마리가 활터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중 한 마리는 IMF로 경기가 악화되자 고려장을 치르듯 주인이 이곳에 버리고 간 애완견이다. 마음이 여린 여자 한량이 한 겨울에 동사할 것을 우려해 집으로 데려다 키우고 있는데 붙임성과 총명함이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극찬한다.

하지만 다른 한 마리 누런 어미 개는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한량들이 차려주는 밥만 먹고는 다리를 절며 황급히 사라지곤 한다. 누렁이의 왼쪽 앞발 발목엔 철사로 만든 올무가 걸려있고 상처가 깊이 파여 뼈가 보일 정도이다.

죽음 직전에 탈출한 충격을 지우지 못해 저렇듯 인간을 경계하는 미물 앞에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만행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수면제로 마취를 시킨 후 살 속까지 파고드는 철사를 잘라 주려 한량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누렁이는 경계의 벽을 더 높이 쌓아만 갈뿐이다.

누렁이의 끈질긴 생명은 그렇게 두 겨울을 보낸 후 모습을 감추었다. 누렁이가 활터 주변에 나타나지 않자 한량들은 습관처럼 먹이그릇을 다시 채워 놓으며 혹시 동사하지 않았을까 안쓰러운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매서운 꽃샘추위가 마지막 겨울을 장식할 무렵, 여러 마리의 새끼를 품은 누렁이에게 한 아주머니가 매일 미역국을 끓여다 준다는 소문이 관모산 등산객들로부터 들려왔다.

며칠 전, 사대(射臺)에 나서려던 한량들은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누렁이가 새끼 한 마리와 함께 살이 오르고 활기찬 모습으로 활터 바로 옆 숲속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들의 목엔 가죽 띠가 달려 있었다. 누군가 돌봐주는 주인이 생겼다는 표시이다.

발목을 죄이고 있던 철사 올무도 제거했을 터인데 왼쪽 앞발은 여전히 땅을 딛지 못한 채 세발로 거닐지만 새끼와 함께 어울리는 정경은 안정되고 자신감이 가득 찬 모습이다.

그 순간 2년 전 어느 봄날 이른 아침의 일이 떠오른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약국을 열기 전 활터에 들러 홀로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데 얼굴이 상기된 중년 부인 한 분이 다가와 등산로 소나무가지에 웬 남자가 목을 매었다고 어렵게 입을 뗀다.

후에 신고인 진술을 하며 경찰관으로부터 확인한 바에 따르면 사망자는 오랫동안 지병을 앓아온 오십대 남자로 더 이상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자정이 넘은 시간에 사다리를 들고 공원에 들어와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오늘도 다리를 절며 새끼 개와 함께 활터 주변에 나타날 누렁이의 모습을 기대하며 생명이란 쉽게 포기하기보다 소중히 간직하려고 할 때 더욱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 유행되고 있는 ‘좌절(挫折) 금지(禁止)’란 누렁이를 두고 한 말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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