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5월, 지방자치법에 의거 자치구로 승격된 남동구가 2008년 8월, 남동구20년사 발간계획을 수립한 후 1년 6개월 만의 결실이다.
책자는 상권(1~4편, 815쪽)과 하권(5편~9편, 935쪽)으로 제1편(서설), 제2편(연혁 및 환경?지명 유래), 제3편(역사), 제4편(문화유산?인물), 제5편(정치?행정), 제6편(산업,경제), 제7편(교육,언론,출판,사회,문화), 제8편(체육,종교,예술), 제9편(미래)으로 채워져 있다.
각고의 여정 끝에 탄생한 편찬사를 들추는 순간, 조상 대대로 태자리를 이어오고 반백년이 넘는 세월을 남동구에서 생활해 왔으면서도 생소한 내용들이 호기심을 자아낸다.
남동(南洞)이란 지명은 1914년, 일제의 지방제도 개편으로 인천부의 남촌면(南村面)과 조동면(鳥洞面)이 합쳐 탄생되었지만 18세기 중반에 나온 해동지도, 여지도서, 호구총수에 이미 남촌면과 조동면이 등장한다.
남동구사에는 지역의 명칭에 관한 내용이 눈길을 끈다.
김장철마다 전국에 명성을 떨치고, 남동구 축제이면서 전국의 풍물 축제로 인정을 받은 소래포구의 ‘소래’는 신라의 3국 통일시대 전설에서 유래한다.
신라 무열왕 7년, 신라와 중국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산동성 해주를 출발해 덕적도를 거쳐 이곳에 왔기 때문에 ‘소정방이 왔다’는 뜻으로 ‘소(蘇)래(來)’가 되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조에도 기록이 있다.
남동구의 신도시인 논현택지 지구의 ‘논현(論峴)’은 옛날에 사신들이 외국으로 떠날 때 배웅 나온 가족들과 이야기 하며 넘는 고개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중종 말 김안로는 부평평야를 거쳐 한강으로 들어가는 굴포천을 바다까지 연장하는 운하 건설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장수동 수월현, 철마산 안하지고개 역시 뚫지 못해 중단했다.
이와 관련한 지명 중 원통현은 간석오거리에서 십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공사를 성공하지 못해 원통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장수동의 무네미 또는 물네미<수현(水峴), 수(水越)>라는 마을은 물이 넘쳐 들어온다는 뜻으로 물을 넘기려 한 운하와 관련된 지명이다.
남동구는 종교와 관련해 유서 깊은 지역이다.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 이승훈(1757~1801)과 순교자들의 생가와 묘가 있었다. 필자의 생가인 만수동 샛골(조곡)부락에서 그의 후손들인 평창 이씨들과 이웃에 함께 거주했다.
이승훈은 만수동 출신으로 정조 7년(1783년), 부친 이동욱이 동지사 서정관으로 북경에 갈 때 수행하여 북당(北堂)에 머물면서 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또한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란 세례를 받은 후 교리서와 십자가를 등을 가지고 귀국해 포교활동을 하다가 1801년 신유사옥 때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그후 아들 신규, 손자 재의와 재겸도 비밀리에 포교활동을 하다가 참수형을 당했고, 증손자 연구와 균학은 고종 8년(1871년) 신미양요 때 서해안에 정박 중인 미국 함대에 정보를 제공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들 순교자들의 묘는 1981년, 경기도 광주의 천주교 성지인 천진암으로 이장했고 그 자리엔 비석과 터만 남아 있다.
남동구에는 무당촌도 여러 곳에 있다. 남촌면의 전자리, 경신리, 여무실리, 조동면의 연락리가 그 대표인데 전자리는 지금의 구월동으로 동네사람들이 줄타기를 잘하여 전부 재능인이란 뜻이다.
경신리는 지금의 수산동으로 신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이곳은 할머님의 친정 동생이 사시는 동네였고 맛있는 딸기를 재배해 자주 놀러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산을 깎아 경신 동네로 넘어가는 신작로를 냈는데 유난히 뱀들이 많아 그 길을 통과하려면 고역을 치러야 했다.
어느 날엔 경신 동네 뒷산에 올라 놀다가 우연히 땅을 팠는데 무녀의 옷을 묻은 보따리가 나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경신리에는 열녀 무당이 있었다는 설화도 있다. 불치병을 앓는 남편을 위해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인 무당이 있어 인천의 유학자들이 왕에게 보고해 조선시대 철종은 열녀문을 세워주었다고 한다.
여무실리는 지금의 도림동으로 기생이나 ‘무녀에게 춤을 가르치는 집’ 또는 ‘무녀가 춤추는 집’이 있었다는 데서 나온 이름이라고 한다. 연락골은 지금의 운연동으로 ‘굿을 하고 즐겁게 논다’는 뜻을 내포한다.
몇 년 전, 필자는 인천시약사회장에 취임하자 비록 뼈를 깎는 어려운 작업이지만 인천시약사회 50년사 집필 계획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한 임원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접어야 했고 결국 인천시약사회 50년사 책자는 아직 탄생하지 못하고 있다.
‘진실은 순간이지만 기록은 영원하다’는 말이 있다. 후손들에게 영원한 진실
을 전해 줄 ‘남동구 20년사’ 편찬에 초석이 된 윤태진 전 남동구청장, 조우성 상임위원과 편찬위원, 자문위원, 집필,감수위원들에게 남동구민의 한 사람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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