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향이란 산소에서 지내는 문중의 제사로 추석과 구정 차례나 기제사를 모시지 않는 5대조(五代祖) 이상의 조상들에게 일 년에 한번 묘에서 제를 올리는 행사를 말한다. 지역에 따라 묘제·시제(時祭)·시향(時享)·시사(時祀), 시양 또는 ‘세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01년, 우리 문중은 330년 전 이곳에 터를 잡으신 조상들부터 내 자식 대까지 들어갈 수 있는 납골묘를 만들었다.
나의 11대(代) 조상이 누워 계신 선산의 일부가 아파트 업자에게 매매되어 이장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조상의 유택을 납골묘로 옮기는 대역사는 계획대로 추진되었다. 내가 맡은 역할은 공사 과정을 카메라에 담는 일이다. 무덤을 파헤치자 의학 서적에나 보았던 유골이 가지런히 누워 있다.
작업 인부는 촬영하기 편하게 두개골을 들어내며 히쭉 미소를 짓는다. 주검 앞에서의 두려움과 엄숙함은 이미 망각한지 오래인 듯하다. 유독성 물질에 의한 신체의 마비만 직업병이 아니라 감정의 상실증 또한 무서운 직업병이 아닌가 싶다.
오래된 무덤일수록 유골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유골은 인부가 손을 대는 동시에 삭은 고목처럼 부서지며 검붉은 흙속에 숨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자리가 복 받은 조상의 유택이라고 인부는 덧붙인다.
어느 분의 유택은 관속에 물이 가득 차 있어 바가지로 물을 푼 후에야 유골을 고를 수 있었다. 퇴관 후 시신만 땅에 묻는 우리 가문의 풍속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고 명당을 골라 고급 대리석관에 모신 분의 유골은 깨끗하게 세척된 채 한 구석으로 쏠려 있다. 장마 때 고인 빗물이 빠져나가면서 유골이 한쪽으로 몰린 것이라고 인부가 설명해 준다.
꽃상여로 유택에 모신지 15년이 지난 할머님은 시신을 덮은 홍대는 물론 수의조차 원상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었다.
근육은 육탈하고 유골만 남았으리라 짐작하고 발목 부분의 수의를 들어 올리는 순간 인부들이 ‘억’하며 힘에 부친 한숨을 내쉰다. 근육이 하나도 손상되지 않은 미라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인부들은 유택에 습기가 차 온도가 낮기 때문에 시신이 육탈하지 못한 것이라고 머리를 긁적이며 위로의 뜻을 전한다.
물이 흐르는 수맥도 신기했다. 선산 꼭대기의 묘에서는 물이 고였지만 아래쪽 토질은 분가루처럼 건조했다. 덕분에 선산 맨 밑에 자리 잡고 있는 고조부의 유택에서는 100여년이 넘은 청동 십자가와 묵주를 발굴할 수 있었다.
내가 이승에 정수리를 내민 지 보름 만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택을 파헤칠 차례가 되었다. 연민의 눈물이 가슴에 장대비를 꽂는다. 50년만의 해후를 이토록 숙연한 분위기로 맞아야 하다니―.
오늘 아침, 아버지의 유택에 동행하자는 나의 제의를 거절하고 봉사 활동을 하러 촘촘히 사라지던 어머니의 뒷모습엔 망인과의 마지막 정을 떼기 위한 안타까움과 두 번 다시 6.25전쟁의 악몽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슬픔이 배어 있었다.
오랜 세월 암흑의 지하에서 잠자던 유골들은 화장터에서 한줌의 재로 변했다. 불가마의 화기가 채 식지 않은 아버지의 유골함을 조수석에 모시고 납골묘로 가는 도중 내 약국 앞에 차를 세웠다.
차마 눈을 감지 못하셨을 아버지가 차창을 통해 이제나마 아들의 약국을 지켜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참숯과 함께 유골 단지를 납골묘에 모시고 나니 어깨에 지었던 무거운 짐을 덜어낸 듯 몸과 마음이 가볍다. 이젠 물속에 잠겨 있는 유골의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명당을 서로 차지하려 종친들끼리 다투지 않아도 되고, 벌초문제로 형제간 말다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직장 생활 혹은 사업이 바쁘다는 이유로 제 부모의 유골을 화장으로 다시 모시던 날도, 오늘 시향에도 나타나지 않는 일부 자손들의 빈자리가 안타깝다.
아쉬움과 회한의 눈물인양 잿빛 하늘은 부슬부슬 가을비를 뿌리고 있다. 시향을 지내는 동안 납골묘에 안장된 조상들의 외침이 내 귓전을 울렸다.
『살아 있는 동안 후회 없이 사랑하라! 부모를, 남편과 아내를, 자녀를 그리고 형제를! 인간의 기억 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사랑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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