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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교육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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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교육 유감
  • 의약뉴스
  • 승인 2009.1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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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늦둥이 딸이 시집을 냈다고 한다.

처음엔 그저 농담이려니 한 귀로 흘려보냈는데 출판사에 결재를 해달라고 정색을 한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서너 살 어릴 때부터 흥겨운 노래가 들려오면 몸을 흔들어 대고 드라마의 슬픈 장면에선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던 아이였다.

‘뮬란’이란 중국 만화 비디오를 자주 본 딸아이는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터에 나가기 위해 머리칼을 자르는 주인공을 흉내 내느라 거울을 보며 가위로 제 머리칼을 자르기도 했다.

초등학교시절부터 야외에 나갈 때면 영감이 떠오른다며 메모지에 적어 내게 주곤 했지만 시에 무뢰한인 나로선 좋다는 말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딸아이는 책읽기를 무척 좋아한다. 틈만 나면 책을 펼쳐 제 엄마는 ‘그만 읽고 공부하라’는 말이 잔소리였다.

만화로 된 그리스신화를 몇 번 읽은 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신화 전시를 관람하던 딸아이는 안내원이 설명을 잘못 했다며 오히려 한수를 가르친다.

서양화가인 제 엄마의 피를 닮아선지 컬러 찰흙을 만지작거리면 어느새 콩알만 한 크기에 온갖 조형 작품이 생산된다.

못 쓰는 천을 재활용한 인형 드레스와 종이에 그린 디자인 스케치는 웬만한 디자이너를 뺨친다.

한때는 밤마다 소설을 쓰고 있다고 하더니만 중학교에 입학한 후부터는 학원과 학교에 다니느라 작품 활동을 멈춘 줄 알았다.

공부할 때 리시버를 귀에 꽂기에 그래가지고 정신집중이 되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더 잘된다고 대꾸한다.

내가 우려한 것처럼 연예인 팬클럽에 가입하거나 팝송에 푹 빠지지 않고 클래식을 애청했는지 첫 시집의 제목은 ‘열다섯, 세비스티안 바흐를 위하여’였다.

내 눈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막내딸이 애늙은이란 별명을 들어온 이유를 시집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나의 글은 음악이 없었더라면 그 자잘한 감상은 탄생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가끔씩 생각하고는 한다. 어차피 파렴치하기 그지없는 ⌜주워 먹는 행위⌟. 누군가의 노력의 흔적을 . 순간적 인상을 잡아내어 그것으로 몇 번이고 우려먹는 얌체가 바로 나라고. 누군가 혼신을 다하여 새겼을 그 수많은 음표들을, 멍하니 글로 옮겨 적어놓는 행위가 내게는 생산이고 창조였다.’

서두에서 딸아이가 밝힌 소회이다.

부녀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친지들은 막내딸이 다재다능하다며 장래 향방에 대한 부모의 목표를 묻는다.

모 TV 방송의 퀴즈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 막내딸이 골든 벨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라며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책은 그만 읽고 숙제하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속 깊은 딸아이는 어떻게 곰삭히고 있을까?

특목고에 진학하겠다며 새벽까지 책상 앞에 앉아있는 딸아이를 지켜볼 때마다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를 되짚어본다.

대학입시를 의식하지 않고 제 하고픈 독서, 그림, 공작, 글짓기를 원 없이 할 수 있게 키우지 못하는 한국의 교육 현실이 안타깝다.

아니, 책상 위 형광등 불빛이 아닌 밝은 태양아래 초원을 뛰노는 딸아이의 모습을 그리면서도 차마 용단을 내리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내 과거를 조명해 본다. 나 역시 어릴 적 꿈은 엔지니어였다. 해서, 시간만 나면 공작물과 공상과학에 심취되어 공책에 각종 설계도를 그리고 멀쩡한 물건을 분해해 망가뜨리곤 했다.

나는 소망하던 대로 00공대에 진학했지만 어려운 농촌살림에 동생을 먼저 졸업시키기 위해 한해 걸러 휴학을 하며 전자 기술학교를 다녔다.

어릴 때부터 원하던 전기 분야 공부를 하니 밤을 하얗게 밝혀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웬만한 전자제품은 내가 조립해 사용하고, 이웃에서 부탁한 각종 고장난 제품도 내 손만 거치면 멀쩡하게 수리되었다.

그러나 나는 약학대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확실한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진로를 바꾸라는 친지들의 조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공과대학을 졸업했다면 나는 현재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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