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석에 들어선 야구선수의 운동모, 탄광, 건설, 건축 등 산업 현장의 공사용 안전모, 오토바이 운전자용 헬멧과 병사들의 철모는 생명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6.25 전쟁 중 방공호(벙커)에서 앉아 잠을 잔 병사가 아침에 철모를 고쳐 쓰려다가 총알이 빗겨 나간 자국을 발견하고 철모에 큰절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오토바이 헬멧은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다. 30여 년 전, 도로를 달리던 오토바이가 중심을 잃고 넘어져 아스팔트 위에서 수십 미터나 미끄러진 적이 있었다.
그 사고로 어깨뼈가 골절되고 뇌가 충격을 받아 몇 시간씩 혼수상태에 빠지곤 했지만 그나마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헬멧이 아스팔트에 달아 누더기로 변할 때까지 머리를 보호해준 덕분이었다.
모자는 권위를 상징하는 장식이기도 하다. 로마 교황청 대관식의 3중관, 보물 339호인 신라왕관, 국내외 미인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여성에게 씌어주는 화려한 티아라(Tiara),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 우승자의 머리에 얹어 주는 승리의 월계관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군 침략 당시 선량한 우리 민족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일본 순사의 표징은 검은색 모자였다. 요즘은 공포감 보다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도록 경비원의 모자에도 호화스런 금테 장식을 한다.
대학 졸업식의 꽃은 사각모가 아닐 수 없다. 오래전, 농사짓던 소와 문전옥답을 팔아 대학생활을 마친 지방 유학생들은 대학을 상아탑이 아닌 우골탑이라고 불렀고, 졸업식장에서 부모님에게 졸업 가운과 사각모를 씌워드린 후 큰 절을 올리는 것이 그 시대의 풍속도였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때 쓰던 청군과 백군 모자는 슬픈 추억을 떠올린다. 농사꾼의 가정에서 한 푼이 아쉬웠던 홀어머니는 청색 모자를 구입하신 후 백군이 될 때마다 손바느질로 흰 천을 덮어 씌웠다.
해마다 청군이 되길 바라는 내 소망도 아랑 곳 없이 어머니는 등잔불 밑에서 농사일로 무뎌진 손가락으로 바늘귀에 실을 걸었다.
농부에게 밀짚모자는 생활필수품이다. 요즘 들어 나는 밭에 나갈 때마다 밀짚모자를 쓴다. 예전에 긴 곰방대를 입에 무신 할아버지께서 논두렁을 거닐 때 즐겨 쓰시던 둥근 챙이 달린 밀짚모자다.
종교의식에서 머리 위에 덮는 미사포가 있다. 세례 때에 죄를 깨끗이 용서받았다는 표시로 받은 흰 수건이다. 미사포는 회개와 용서, 속죄의 의미를 갖는다.
결혼식장의 신부도 면사포를 쓴다. 면사포는 신부에 대한 신비스러움과 순결함, 존경심과 소중함을 의미하기에 신랑은 결혼식이 시작되고서야 신부의 얼굴을 가린 베일을 들출 수 있었다.
옛날 우리 조상은 신분의 상징이나 자태를 숨기기 위해 면사포(面紗布)를 사용했다. 내외가 심한 조선시대에는 외출 시에 얼굴을 가리기 위해 입모(笠帽), 너울, 쓰개치마, 장옷, 천의를 걸쳤다.
풍류시인 김삿갓은 조부 김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급제한 자신을 뉘우치며 하늘이 보이지 않는 방립(方笠)을 쓰고 평생을 방랑했다.
요즘엔 초승달 모양으로 챙이 굽어진 운동모자가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강탈한 카드로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꺼내는 범인, 은행이나 상점을 터는 강도, 납치범, 혼자 사는 여성을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해 온 일명 ‘발바리’ 등 TV 화면을 장식하는 용의자들 거의가 챙이 긴 운동모자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내세울 수 없는 자신을 잘 알고 있는 현대판 김삿갓들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모자는 무엇일까?
무더운 여름, 거리의 이발관에 뛰어 들어가 가발을 벗어던진 후 냉수로 머리를 식히는 인사들은 뭐니 뭐니 해도 자연산 머리칼이 가장 귀한 모자라고 단언한다.
명함에 경력을 더 넣기 위해 이것저것 직책을 떠맡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감투라는 모자를 제일로 내세운다.
감투를 쓰기 위해 온갖 흑색선전과 금전 살포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권자들에게 허리를 조아리다가 막상 목적을 달성하고 난 후부터는 목에 깁스를 하는 배은망덕한 후보도 있다.
추위나 더위 또는 외부 위험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거나 외모를 치장하기위한 모자 외에 내면을 우아하게 장식해줄 수 있는 마음의 모자 하나쯤을 더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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