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5-07-17 06:02 (목)
남자의 계절
상태바
남자의 계절
  • 의약뉴스
  • 승인 2008.10.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다리던 일요일이다.

한 주일 동안 켜켜이 쌓인 심신의 피로를 씻어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다. 50고개에 들어선 요즘에 와서 부쩍 그렇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던데 나만이 무기력해 지고 있다. 아마도 갱년기 때문인 것 같다. 인생의 50 고개나, 가을이란 계절이나 모두 갱년기에 들어서기는 마찬가지다. 시월을 햇살만 하더라도 하루가 다르게 쇠잔해 가고 있지 않은가?

고대하던 보람도 없이 가을의 휴일은 결혼식장 순례로 바쁜 날이 된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 지치고 늘어진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본다.

50대,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팬 중년의 사내가 거울 안에서 나를 건너다보고 있다. 낯이 설다. 분명, 나를 닮은 나인데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남자 나이 40이면, 제 얼굴에 능히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인데, 거울 속의 그 얼굴도 예외 없이 그런 명분과 의무감으로 잔뜩 짓눌려 있다.

휴일의 거리는 아직 한적하다. 매연과 인파의 소음에 시달린, 한 주일의 피로를 늦잠으로 지우려는 듯하다.

이따금 거리를 오가는 이들의 옷차림이 왠지 낯설기만 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쟁이나 하듯 노출시켰던 구릿빛 피부는 가을에 걸맞은 옷감으로 가려져 있다.

 하지만, 같은 계절의 옷을 걸쳤음에도 울긋불긋한 젊은이들의 차림새는 노숙한 빛깔로 정장한 나를 주눅 들게 한다. 갈색으로 빛바랜 가로수와 그 아래서 항상 푸름을 자랑하는 쥐다래 나무를 보는 듯하다.

예식장으로 가는 길가엔 조그만 체육공원이 있다. 행보에 지친 무거운 몸을 기댈 수 있는 벤치도 있다.

초록을 상실한 가을 잔디 위 벤치는 흡사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에 드러누운 조각배의 몰골이다. 하지만 아무 때 와도 요람처럼 나의 몸과 마음을 받아 주는 아늑함이 있다.

그 벤치 앞에 단풍나무가 군데군데 자리 잡고 서 있다. 빨갛게 물든 네 개의 손가락을 흔들며 파란 하늘과 더불어 가을의 제왕임을 자랑하는 듯하다. 혼신의 정열을 불태운, 후회 없는 삶에 스스로 자족하는 모습이다. 부럽다. 단풍나무가 자랑스럽게만 보인다.

오늘도 나는 젊은 기분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예식장을 찾아 나섰다. 그래서인가, 오늘따라 신부의 웨딩드레스가 더욱 화사해 보인다. 신랑의 넥타이도 유난히 빨갛게만 보인다.

웨딩마치에 발을 맞추는 그들은 행복에 찬 미소를 그칠 줄 모른다. 잠시도 떼지 않고 포개 잡은 그들의 손목에서 변함없는 사랑을 약속하는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맞잡은 나의 양손엔 뜨거운 감동이 가득하다. 저들 신혼부부가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듯 나 역시 거듭나는 각오로 왼손과 오른 손에 힘을 주어 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난 것도 가을이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불나비의 열정도 마다 않겠다던 그 정열은 어디로 갔는가. 가을의 알찬 결실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이마의 땀방울을 훔쳤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 때의 근면과 패기 넘친 삶이 그립다. 시류에 영합하며 나태해지고 무기력해진 자신이 부끄럽다.

그렇다. 가을은 계절의 갱년기로 전락될 순 없다. 가을은 새 출발을 약속하는 신혼부부가 많이 탄생하는 계절이기에 나처럼 힘없이 방황하는 50대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는 재충전의 계절이기도 하다.

50이란 나이 역시 갱년기의 문턱을 어루만지는 회색빛 숫자일 수만은 없다. 보다 원숙한 경지에서 지나온 삶을 반성하고 구김 없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여물어 가는 세대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인생의 연륜이 두터워질수록 그들의 땀방울에는 남은 삶에 충실하려는 끈질긴 의지가 배여 있어 한결 아름다워 보이지 않던가.

나는 20대의 젊음으로 영원히 남아 있고 싶다. 그들의 패기와 정열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자신감으로 살고 싶다.

지금까지 나의 삶이, 아니 나의 봄과 여름이 내 얼굴에 걸맞지 않는 색깔이었다면, 이제 남은 가을만은 후회 없는 삶으로 최선을 다하는 빨간 낙엽 빛이고 싶다. 그렇게 열심히 타는 빛깔이고 싶다.

오늘 인생의 새봄으로 향하는 신랑 신부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손을 흔든다. 따라서 나도 보다 알뜰한 가을, 보다 완벽한 가을로 이으리라 다짐을 해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