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루라고 불리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자유의 여신상과 유엔 본부 빌딩의 위용, 멋진 승용차들이 헤아릴 수 없이 꼬리를 물고 있는 흑백 사진은 별천지를 보는 느낌이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는 등이 따스한 초가집 온돌방이 제일 좋은 줄 알았고, 동네에 혼인잔치가 있어야 세단 승용차를 구경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동차의 해골이라는 폐차들이 곳곳에 버려져 있다는 글을 읽을 땐 ‘저 아까운 것을 버리다니’ 하는 아쉬움 속에 책의 내용이 곧이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신천지라고 불리는 미국에 대한 부러움은 한 순간에 사라졌다. 외면적으로는 화려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낯모르는 사람의 미소와 친절을 의심해야 하고, 살인, 강도, 절도 등 흉악 범죄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면 권총을 소지하든가 몇 달러의 현금을 항상 준비해야 하는 ‘치안 부재의 불안한 사회가 바로 미국’ 이라는 내용 때문이었다.
반세기의 세월이 흘러 한국에도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골목 여기저기에 방치된 폐차가 골칫거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와 비례해 상상조차 못하던 범죄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속속 고개를 내밀고 있다.
며칠 전, 취업과 아르바이트를 소개한다는 빌미로 20대 여성들을 승용차 안으로 유인한 후 동물용 마취제를 주사하고 성폭행과 현금 강탈을 일삼은 일당이 경찰에 검거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것은 피해당사자의 고발이 아니라 납치장면을 목격한 시민의 신고정신 덕분이었다.
반면에, 낯모르는 괴한에게 납치당하고 있다며 구원을 호소하는 어린이가 끌려가는 광경을 목격하고도 구해주기는커녕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는 미국 시민의 무관심을 고발한 보도도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시청한 시민들은 너나없이 냉혹한 세태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들이 현장에 있었다면 과연 위험을 무릅쓰고 괴한으로부터 어린이를 구했을까.
이 장면이 방송국의 연출이 아닌 실제 상황으로 만에 하나 어린이가 살해당했다면 그들은 너나없이 정의의 사도가 되어 치안 공백과 경찰의 무능을 질타했을 것이다.
만화 영화 ‘맥가이버’를 보면서 형사라는 직업에 경탄과 매력을 느낀 적도 있지만 현실의 경찰은 결코 만능 해결사가 아니다. 피의자의 행적을 낱낱이 알아맞히는 주술사(呪術師)도 아니다.
사건을 조속히 해결해 재발을 방지하므로 써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선 시민들의 신고와 제보가 절실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몇 년 전 이른 아침, 공원을 산책하던 중년부인이 달려와 웬 남자가 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다며 경찰에 대신 신고해 줄 것을 당부했다. 혹시라도 필요할지 몰라 중년부인의 인적사항을 물었으나 경찰서에 오라 가라 하는 것이 귀찮다며 대꾸도 없이 자리를 떠 그 몫을 내가 떠안은 적이 있었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인천지방경찰청은 3월 20일, 시민의 안전과 편안한 생활 확보를 위한 100일 계획을 수립했다고 한다. 시민생활의 불편과 불안을 초래하는 요인을 제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단 100일로 족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범죄 피해나 교통 불편 등에 대해 시민들로 하여금 신고의식을 고취시키므로 써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인천지방경찰청의 의도에 뜨거운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범죄 피해는 결코 남의 일일 수만은 없다. 언제 어디서 우리 자신이 피해자가 될지 모를 일이다. 사건 해결과 범죄 예방을 경찰에만 일임하기엔 부담스럽고 위험한 세태가 되고 말았다. 치안 안정을 위해 시민의 신고정신이 시급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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