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 군중이 사망하면 열사(烈士)가 되고 전경이 죽으면 개죽음이 되는 현실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며칠 전, 친목회 모임에 참석했던 아내는 외아들이 전경으로 근무 중인 친구의 사연을 전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지난번, APEC 이 열리고 있을 때 친구는 TV 뉴스를 보다말고 해운대로 출동한 외아들을 찾아 무작정 길을 나섰다.
그 넓은 행사장 어느 모퉁이에 있을지도 모르고 설사 근무 위치를 안다고 해도 똑같은 전투복을 걸친 무리 중에서 자식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친구는 모성애의 기적을 기대하며 비몽사몽 중에 해운대를 뒤졌고 행사장 건물 출입구 앞에서 아들을 발견했다고 한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피부로 느끼게 한 사연이었다.
나 역시 전남 도경에서 근무했던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천근같이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수없이 호남고속도로를 달려보았기에 동병상련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사히 근무 중인 아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돌아온 부모의 심정도 이러할 진데 골절과 실명(失明)의 상태에서 병상에 누워있거나 한 줌의 재로 상봉하는 부모는 단장(斷腸)의 한을 가슴 그 어느 곳에 묻을 수 있을지 시위 현장 뉴스를 볼 때마다 안타까울 뿐이다.
농민 시위대를 진압하는 전경 중엔 농민의 아들도 적지 않았을 것 같다. 내가 만수동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어왔기에 농민들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듯이 방패를 들고 물대포를 쏘아대는 농민의 아들인 전. 의경들의 심정 역시 그랬을 것이다.
최루탄이 먼저냐, 돌멩이가 먼저냐 시비를 가리는 것은 가치가 없다. 과격한 시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선정을 베풀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건전한 시위문화가 아쉽다고 하지만 거리로 뛰쳐나오고 과격해지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속사정이 있다.
1993년 한약분쟁 초, 약사회는 강당에서 평화로운 집회를 가졌다. 하지만 언론과 방송은 한의사회 집회만 취급할 뿐 약사회에 대해선 일절 언급이 없었다.
과천 정부청사 앞 광장으로 장소를 옮겨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결국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선 언론 방송사에 충격적인 보도 자료를 주어야 했기에 삭발을 했고, 거리로 뛰쳐나와 교통을 마비시키며 분신자살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약사들은 ‘우리 때문에 전. 의경들이 밤잠도 못 잔다!’는 자책감에 즉석에서 성금을 걷어 빵과 우유를 구입해 전해 주기도 했다. 시위가 한 풀 꺾였을 때는 과천 정부청사 광장에 앉아 한약분쟁에 대해 서로 토론을 하기도 했다.
결국 약사회의 애로점을 이해해 주는 쪽은 정부가 아니라 전경들이었다. 하지만 복지부장관 면담 요청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정책적인 대안 마련을 제시하지 않고 계속 애꿎은 전. 의경들만 방패막이로 내세웠다.
오래전, 유치원 여름 캠프 행사에 참여했다가 컨테이너 화재로 아들을 잃은 전 핸드볼 국가대표 선수가 국무총리 면담을 애절하게 호소한 적이 있었다.
들은 척도 않던 총리는 무책임한 정부에 메달을 반납하고 이민을 떠난다는 가슴 아픈 내용이 보도되자 그제야 면담에 적극성을 보이는 정치 쇼를 열연하기도 했다.
시위대가 목숨을 잃으면 도를 넘어선 폭력시위 주도자는 제쳐놓고 애꿎은 경찰 책임자만 옷을 벗기는 정책 하에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식으로 더 이상 전. 의경들만 피해를 당할 수 없다.
시위대가 사망할 때마다 경찰 총수가 사표를 내야한다면 수 백 명의 전. 의경이 다치고 농민의 아들이 사망했을 땐 정치인 누군가도 사표를 내야 하지 않을까.
전. 의경들에게 인내(忍耐)를 강요하고 시위대의 시위문화를 탓하기 앞서 야 할 것은 정부의 수준 높은 정책대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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