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신 탓일까? 책장을 들추다가 잠깐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전화 벨 소리가 비몽사몽의 적막을 가른다.
놀란 가슴으로 수화기를 드니 신촌에서 자취를 하며 치과대학에 다니는 작은 아들의 목소리다. 서울 외곽순환도로에서 경인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인터체인지 말미에서 교통사고가 났단다.
머리맡의 형광등 스위치를 더듬어 조명을 밝힌 후 시계를 보니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다. 주섬주섬 옷을 걸친 후 서둘러 사고 현장으로 달렸다.
겨울 날씨답지 않게 푸근한 기온 탓인지 지척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다. 현장을 살펴보니 짙은 안개 속의 시야 장애와 급커브 내리막길의 미끄럼 사고인 듯싶었다.
평소와 똑같이 운전을 했는데 좌로 두 바퀴, 우로 한 바퀴를 회전 한 후 콘크리트 분리대를 들이받고 겨우 멈추었다고 설명하는 아들의 떨리는 목소리와 휴지처럼 구겨진 승용차 앞부분은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가히 짐작케 한다.
다행히 뒤를 따라 오는 차가 없었으니 망정이지 내리막길에서 대형차가 덮쳤더라면 인명사고로 이어질 뻔했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보험회사 견인차 기사는 하늘이 도왔다며 폐차 절차를 일러준다.
날이 밝자 폐차에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여 폐차장, 구청과 차량등록사업소를 들렀다. 인간이 태어나 온갖 고난을 겪다가 숨을 거두면 사망진단서로 주민등록을 말소하듯 폐차 증명서로 말소 등록하는 승용차의 생애도 마찬가지이리라.
주인을 위해 온갖 길을 달리다 사고를 당하면 경우에 따라선 내장(?)을 다 드러낸 채 부속을 교체한 후 봉합 수술을 하며 수명을 연장한다. 단순한 피부 상처는 성형수술(도장 작업)로 말끔하게 원상복구 시키지만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면 한 줌의 고철로 변신해야 하는 운명은 인간과 별 차이가 없다.
젊은 혈기와 자신감으로 박력 넘치는 운전을 해 왔던 아들이 이번 사고를 계기로 인생의 역경을 배웠으면 좋겠다.
인생을 살다 보면 안개가 자욱해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날이 있으리라. 이 세상엔 직선 도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포장 자갈길도 있고, 보다 빠르고 넓은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위해선 급커브 인터체인지도 통과해야 한다.
앞만 보며 열심히 달리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갑자기 나타난 커브 길목에서 핸들을 돌리지만 차는 관성의 법칙을 증명하듯 운전자의 의지와 앞 타이어의 방향에 개의치 않고 가던 쪽으로 계속 달릴 뿐이다.
그때,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모든 브레이크를 작동시킬 수 있다면 낭떠러지로 추락하거나 경계 벽을 들이받는 사고는 모면할 수 있으리라.
TV 화면엔 어젯밤 짙은 안개로 일어난 처참한 교통사고 현장과 사망자의 명단이 떠오르고 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순간 생과 사의 갈림길은 찰나에 불과하고 출생 신고서와 사망진단서 종이 한 장의 차이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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