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도 9월에 열렸던 민족화합 지도자 아카데미 제 6기(3회) 교육에 인천 남동구 대표로 참가한 김사연(남동구약사회장, 수필가)입니다.
이번 교육은 장마가 지난 뒤끝이라 숙박 환경이 열악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강의내용은 불편한 심기를 해소시키고도 남았습니다.
일방적으로 끌려 다닌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대북 정책에 저 역시 회의심을 감추지 못하던 중 위원장님의 강의를 듣고 진심으로 위원장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6. 25사변 때 안면을 난도질당한 부친의 참혹한 모습을 접한 후 공산주의에 대한 한이 아직도 가슴에 못이 되어 박혀있다는 위원장님!
북한의 주체사상 탑 앞에서 모 교수는 아부의 만세를 불렀다는데 위원장님은 북측 관계자들에게 그들의 만행을 떳떳하게 폭로하셨다지요?
편모슬하에서 오늘의 위원장님으로 성공하시기까지 파란만장한 그 역경을 동병상련으로 느낄 수 있었기에 저는 위원장님의 강의를 들으며 가슴속으로 통곡했습니다.
위원장님!
저 역시 6. 25 사변 때 부친을 잃었습니다. 저와 동생이 쌍둥이로 태어난 지 보름 만이었고 모친은 스물다섯 나이로 청상과부가 되었습니다.
위원장님은 빨갱이들에게 부친을 잃으셨지만 저의 부친은 국군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남들이 다 피난살이를 떠났을 때 부친은 조상 대대로 지켜온 탯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전쟁은 군인들끼리 하는 것이지 설마 죄 없는 양민을 죽이기야 하겠느냐며 말입니다.
어느 날 저녁, 한 병사가 찾아와 저녁 수저를 막 뜨려던 아버지를 불러냈습니다. 자신이 입대한 사이 그의 동거 애인을 빼돌려 다른 사내에게 출가시킨 자전거포 주인을 찾아 왔다고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근방의 자전거포 주인은 아버지 말고도 또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정작 그가 찾는 장본인은 피난을 떠난 후였기에, 이름까지 대주며 자초지종을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기록은 영원하나 진실은 때로는 현실 앞에 얼마든지 가려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후, 아버지의 시신은 이웃마을의 동산 숲 속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약국 문을 열고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태어난 지 세이래도 안 된 핏덩어리였고 어머니는 스물다섯의 청춘이었습니다.
피난을 가지 못하고 흰 소복을 걸치신 채 삼남매를 돌보고 있는 모친에게 인민군들은 양식을 구해 주며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남편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여성연맹 위원장을 맡으라고 독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친은 ‘전쟁은 군인들 끼리나 하라’며 일언지하 거절했다고 합니다.
때마침 대퇴부 고관절 염을 앓았던 저는 전쟁으로 인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경을 헤매다가 피난 중이던 서울 세브란스병원 어느 의사선생님에게 응급수술을 받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어린 돌백이가 받은 수술은 시뻘겋게 달군 화젓갈로 엉덩이를 지지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끝내 4급 장애인이 된 저는 온갖 풍파와 시련을 겪으며 한 때는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습니다.
위원장님!
위원장님은 인민군들을 원망하며 가슴에 바윗덩이만한 한을 새겨 놓을 수라도 있지만 저는 원망할 대상도 없습니다.
제 부친을 총살시킨 장본인이 국군이라며 삼촌이 학도병으로 전사했고 얼마 전 제 자식이 복무하고 온 조국의 국군을 원망해야 합니까? 아니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념 전쟁을 원망해야 합니까?
비록 역경을 헤치고 저는 약사가 되었고 제 동생은 모 미국계 은행의 서울 지점장으로 성공했지만 부친을 그리워할 때마다 저는 이런 번민에 빠진 채 가슴속으로 통곡하고 있습니다. 남과 북으로 국토가 분단되고 민족이 분열된 이 땅에서 태어난 것이 이토록 큰 죄 일까요?
지난 50여 년 동안 위원장님과 저의 가슴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슬픔의 한을 말끔히 지워버릴 수 있는 인생의 전환점이 가까워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위원장님의 강의를 듣고 가슴속으로 통곡하는 순간, 제2건국운동이 성공하는 그 날이 바로 제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존경하는 위원장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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