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승길 선생님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인천에서 선생님의 강의가 시작되던 1983년이었습니다.
당시 인천. 남구분회 부회장직에서 물러나 은둔하고 있던 저는 한방에 문외한이었으며 회무의 공백을 한방 강좌로 채우기 위해 약사 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제가 무미건조한 한방 지식을 인생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된 동기는 선생님과 저의 사고(思考)가 일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난매를 일삼는 몰지각한 회원들을 ‘X 물에 튀길 놈들’이라고 서슴없이 질책하시고 선량한 약사들은 그럴수록 실력을 싸야 한다는 말씀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청량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보약을 위주로 돈벌이에 급급한 한의들을 비판하시며 약사들은 치료를 우선하는 한방(고방)을 접해야 한다는 일편단심으로 전국 약사들을 찾아다니며 중경방을 강의하신 선생님은 이미 10년 후의 한약 분쟁을 예견하신 듯 싶으셨습니다.
강의실 맨 앞자리에서 녹음을 하며 열심히 수강한 저에게 선생님께선 한방 실습 기회를 두 번씩이나 주셨습니다. 심신이 고달프실 때는 산만한 실습생과 아는 체 하는 환자들에게 야단을 치시기도 했지만 제가 소속된 실습 팀은 한 번도 선생님의 노여움을 사지 않았다며 실습 동기생들이 제게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문필가로서 선생님에 관한 수필을 약사공론에 가끔 투고한 까닭에 돈보다 명예를 중히 여기셨던 선생님께서 우리 실습 팀에게 특별대우를 해주신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심오한 학문은 제 생명을 구해 주셨고 몇몇 환자들로부터 제가 ‘화타’라는 칭호를 듣게까지 해주었습니다.
당시, 약국 건물을 신축하면서 저는 울화병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제 침실엔 입에서 풍기는 단내가 진동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극도로 화가 치밀어 오를 땐 식사 도중에도 쓰러질 정도였으며 혹시나 위암일까 봐 병원에도 못 갈 지경이었습니다. 옛 어른들이 화병을 얻어 돌아가셨다는 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장기간 시호 제를 달여 복용한 덕분에 저는 지금도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불치 선고를 받은 환자들을 회생시키는 기적을 체험하며 약사로서의 보람을 느끼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동아약보 객원 기자로 전국의 약사회를 탐방하던 1993년 겨울, 효성 여자 대학에서 개교 이래 처음으로 수여하는 명예 약학 박사 학위를 다름 아닌 이승길 선생님께서 받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약사회 탐방을 제쳐놓고 선생님의 영광을 취재하기 위해 위생당약국을 방문했습니다.
제 손을 꼭 잡으신 채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더 든든하다며 귀한 음식까지 베풀어 주셨던 선생님. 지난 30여 년 간 아무런 대가 없이 후배 약사들에게 지식을 전수해 주신 선생님께선 한약 분쟁의 버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고달픈 인생 여정은 예나 그 당시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경성 약학 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 적십자병원과 서울여자 의과대학 부속병원 약국, 백남공업고등학교와 김포 농업고등학교에 근무하셨습니다.
그 후 홍제동에 안산약국을 개업해 돈을 좀 모았으나 유생당약국으로 상호를 바꾸고 영천과 노량진으로 이전하는 동안 무일푼이 되셨습니다.
일곱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선생님은 친척들에게 구걸하다시피 하여 냉천동에 10평짜리 건물을 구입한 후 2층에 유생당(維生堂)약국을, 아래층엔 부인 沈鉉洙여사가 손수 재봉틀을 돌리며 양장점을 개업하셨습니다. 약국 경영으로는 생계를 이어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지사 새옹지마랄까, 전화위복이랄까, 한가한 약국 경기는 선생님께 한약을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방 입문 강좌( 龍野一優 著 )를 터득한 선생님은 1969년 서대문구 약사회의 강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한방 전수의 길을 걷기 시작하셨습니다.
중경방(仲景方) 전수의 선구자 이도(以導) 李 承吉 명예 약학 박사!
“돈벌이보다 환자의 치료에 보람을 느낀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를 때마다 동의보감의 주인공인 의성(醫聖) 허준이 서슴없이 연상됨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 동안 전국 각지를 돌며 2백 70여 회의 특강과 강좌를 맡아 왔으며 여러 약사 단체로부터 50여회의 감사패, 기념패, 공로패, 표창패를 받으셨습니다. 한때 심근경색증으로 사경을 헤매기도 했던 선생님은 1년 반 동안 모든 강의를 중단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지만 영남대 환경 대학원 한약학 강사직과 덕성여대 한약학 강사를 거쳐 83년, 동아제약에서 협찬하는 약사금탑상(약학 연구 및 공직 약사 부문 )을 수상하셨습니다. 또한 사재 2천2백만 원을 들여 40명의 전간 환자와 42명의 비염 환자에게 한약을 무료 투약하셨습니다.
문하생들은 선생님이 지난 22년 동안 세미나와 신문과 의약 전문잡지에 발표한 내용을 발췌,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以導 李承吉 先生 古稀 記念 治驗論集」의 봉정식을 명예 약학박사 학위 수여식이 끝난 후, 대구 수성관광호텔에서 가졌습니다.
치험논집 봉정식 준비 위원장을 맡았던 李範九박사는 “ 李承吉박사의 학문적인 불변의 신념이 약사 한방을 확대 보급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각 대학에서 한방을 교과과정으로 채택하게 된 데는 이승길 박사님의 헌신적인 노력이 컸다”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미수(米壽)도 채우지 못한 채 영면하셨다는 비보가 실습 동기인 권경숙 약사로부터 전해 왔습니다. 길눈이 어두운 터에 문상객 틈에 묻어 서울 중앙병원 영안실을 방문하려 했지만 승용차 정원이 꽉 찼다고 했습니다.
심신이 피곤해 만사가 귀찮고 보니 인편에 조의금이나 전하고픈 생각이 간절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늦은 밤 선생님의 영정 앞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며 약사 한약을 정착시킨 약계의 거성이신 선생님이 지금이라도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나 힘이 밴 음성으로 강의를 재개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제 소원을 저버린 채 향불이 다 타 들어가도록 영정 안에서 끝내 침묵만을 지키시는 선생님의 추억을 제 가슴 한 구석에 묻으며 영안실을 나왔습니다.
선생님! 이젠 모든 짐을 벗어 놓으시고 편히 쉬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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