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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들이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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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들이 사는 법
  • 의약뉴스
  • 승인 2007.05.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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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30대 초반인 J 약사는 항암 치료차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증상이 악화되어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연락이 와서 약국 문을 닫고 급히 공항으로 가는 중이라며 그의 부인인 C 약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1년 전, J 약사는 대규모의 메디컬 건물 4층에 약국을 개설하기 위해 서류를 준비했다. 이웃 건물의 약사가 의원이 개설된 2층에 약국 개설 허가가 가능하다는 유권해석을 복지부 약무식품정책과 모 사무관으로부터 얻어낸 후 약국을 개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보건소는 J 약사의 약국 개설을 불허했다. J약사는 복지부 모 사무관을 찾아가 유권해석을 요구했다. 하지만 모 사무관은 지난번과 달리 개설 불가 해석을 내렸다. 갑자기 유권 해석이 바뀐 이유를 묻자 전에 개설 허가가 나간 것이 실책이라고 했다가 ‘최종 결재자는 보건소니 보건소에 알아보라’고 책임을 전가했다.

J 약사는 의원이 개설되지 않은 지하층에 약국을 개설하기 위해 융자를 받고 전 재산을 통틀어 지하층을 매입한 후 인테리어를 끝마쳤다.

그러나 1층에 자리 잡고 있는 문전 약국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고 보건소는 개설 허가를 계속 미뤘다. 몇 개월 동안 밤잠을 설치며 마음고생을 겪은 J 약사는 ‘패가망신하는 것이 바로 이건 것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약사회에 도움을 청했다.

남동구 관내는 물론 전국적으로 지하와 2층 이상에 개설한 약국이 하나 둘이 아니고, 수백 건이 넘는 처방전을 문전 약국 혼자 흡수하기엔 환자들의 불편이 크다는 주변 의사들의 탄원서를 지참하고 회장단은 당시 보건소장을 면담했다. 결국 지하로 내려가는 승강기를 폐쇄한다는 조건으로 개설 허가가 나왔다.

지하 약국의 승강기 폐쇄로 환자들이 계속 불편을 호소하자 J약사는 참다못해 승강기를 개통시켰고 잠잠하던 보건소는 다시 민원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J 약사의 지하 약국은 8월에 문을 닫아야 하는 폐쇄대상 약국에 포함되어 또 다시 시름시름 화병을 앓으며 행정소송을 준비 중이었다.

얼마 전, 자동차 접촉사고로 우연히 초음파 검사를 한 J 약사는 암 판정을 받고 국내에서 치료를 받다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했었다.

이 안타까운 사연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우리에게도 다가 올 수 있는 불행이기에 가슴이 아팠다. J 약사의 모습을 지켜보며 의약분업 이후 이웃 약국과의 분쟁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건강을 해친 약사들이 적지 않다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약분업 이후 약사들이 모이는 자리엔 늘 처방전이 화두로 떠오른다. 문전 약국으로 돈을 번 약사들 중엔 동료의 약국 옆 상가를 또 구입해 생존권을 위협하는 몰염치한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말기 암으로 며칠 안 되는 시한부 인생을 병실 침대에서 보내면서도 처방전에 집착하는 약사도 보았다. 의약분업 이후 약사들이 사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전 세 닢과 한 벌의 수의면 족할 뿐이다.

실제로 내가 아는 강력계 형사반장은 변사체인 걸인의 주머니에서 늘 만 원 권 지폐가 나오는 것을 본다며 평생 다 쓰지도 못하고 죽을 돈에 욕심을 부려 남에게 못할 짓을 하고 살인강도 짓을 하는 인생이 가련하다고 혀를 찬다. 욕심이 과한 약사들에게 주는 경고인 것 같다.

재산을 잃으면 인생의 절반을, 건강을 잃으면 인생의 전부를 잃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한 발씩 양보하며 이웃의 동료 약사들끼리 분쟁을 피하므로 써 공생의 길을 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 우리가 ‘한국 의사들이 사는 법’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

오늘 이 글을 마감하는 순간, J 약사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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