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의 일이다.
당시 약사회는 회원 연수교육을 하며 행운권을 나누어주고 희망자에 한해 추가로 판매를 한 후 추첨을 했다.
나는 평소 행운권과 인연이 멀다고 자포자기한 터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러나 옆에 앉아 있던 O약사와 M약사는 이십여 장의 행운권을 들고 있었다. 친구들이 맡기고 간 것과 추가로 구입한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행운의 여신은 O약사와 M약사를 계속 사회자 앞으로 불러 세웠다. 그들은 다른 회원들에게 미안했던지 옆에 자리 잡은 나와 동료를 대신 내보내 선물을 받아 오게 했다.
하지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작은 선물을 받은 그들은 상품을 타지 못한 주변의 약사들에게 단 한 개의 선물도 나눠주지 않았다. 사회 봉사활동을 하며 베푸는데 길들여진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순간, 나는 이것이 약사 사회의 현실이 아니길 염원했다.
얼마 전, 초등학교 교과서에 집단이기주의의 표본으로 의사들의 집회 사진이 실리자 의사회는 손해배상 소송을 하는 등 결사항쟁 이를 저지했다. 마치 내가 연애를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으로 국민 생명을 담보로 한 파업을 강행하고도 ‘이기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이기주의는 지능이 발달한 고학력자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심리현상이다. 머리는 크지만 따스한 가슴이 작은 사람들에게 만연한 사상이다.
어느 수필가의 글이 떠오른다. 총각시절, 가슴 큰 여인을 마다하고 머리가 큰 여인을 배우자로 선택한 결과 사사건건 피곤한 부부생활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가슴 큰 여인이라 함은 학벌은 부족하나 마음이 넉넉한 인간성을, 머리가 큰 여인은 포근한 인간미가 없는 대신 출중한 학벌을 갖춘 여성을 뜻한다. 지능이 뛰어난 부인을 선택하면 세상을 편하게 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부인의 이기심을 채워주는 시종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의사들이 집단이기주의자로 규탄을 받는 반면에 약사들의 개인 이기주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처방전을 들고 온 환자들에게 드링크를 서비스하고 매약은 원가로 판매하는 행동도 나 혼자만 살아남겠다는 이기주의가 아닐 수 없다. 지나친 개인 이기주의는 공멸을 재촉하기 첩경이기도 하다.
의약분업 이후 약사회는 무주공산이 되어 버린 듯하다. 약사회라는 모임에 주인의식이 없고 오직 처방전을 받기에 바쁜 약사 개인만 존재하는 느낌이다. 오죽하면 예산을 심의한 정기총회조차도 대낮이 아닌 저녁 시간에 그것도 연수교육과 맞물려 진행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던가.
약사 회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둘째 치고 친지들의 대소사에 얼굴조차 내밀 시간적 여유가 없어 경조금을 인편이나 온라인으로 보내고 있다며 하소연하는 약사들도 있다.
편익을 위해 구입한 자동차에 시간과 돈을 너무 투자한 나머지 자동차의 노예로 전락하듯 처방전 때문에 약사들이 돈을 버는 로버트로 변질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약사의 수입이 높아졌다고 해서 신상신고율과 특별 성금 액수가 늘어난 것도 아니다. 작년 겨울부터 걷고 있는 약권 성금을 아직도 나 몰라라 하고 2002년도 회기에 들어선 지 5개월이 다 되도록 회비조차 내지 않는 회원들도 적지 않다.
처방전 숫자에 비례하는 부의 상징을 과시하기 위해 우선 승용차를 바꾸고 이런 저런 용도에 돈을 사용하고 맨 나중에서야 자신이 약사 신상신고비를 안 냈는지 궁금하다며 전화를 해 오는 회원도 있다.
약사회를 사랑하는 분들은 약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선 보험공단에서 원천세를 제하듯 소득에 따라 회비를 강제 징수해야 한다고 안타까운 조언을 한다. 그래야 의사회처럼 투쟁을 하다가 영어의 몸이 되더라도 생계를 책임져 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약사회가 주관하는 궐기대회 때마다 의약분업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문전약국은 참여하지 않고 별 볼일 없는 동네약국만 참여하는 현실에서 적합 타당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대선과 지방자치단체장 예비선거에 약사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외치지만 선거인단 명단에 합류하기 위해 정당과 로비를 하고, 두 시간 이상 소요되는 행사에 약국을 비운 채 동참할 약사는 별로 없다. 하지만 약권 성금이 넉넉하다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0 약사가 시의원 선거운동을 할 당시 00 약국 근처에서 연설을 하자 격려의 박수는커녕 시끄럽다며 문전박대를 한 회원이 있었다고 한다. 당장 내 약국의 매상이 중요하지 약권신장이 무슨 상관이냐는 이기주의의 표상이기도 하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피눈물이 터져 나올 일이다. 온갖 희생을 감수하고 약계를 대표해 출마한 약사 후보를 우리가 물심양면으로 성원하고 격려하지 않으면 누가 할 것인가?
약사들이 공생하기 위해선 개인 이기주의에서 탈피해야 한다. 문전 약국을 두 세 곳씩 개설하는 과욕을 부리지 말고 어려운 동료에게 베풀 줄도 알아야 하고 지역사회 봉사활동에도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약사에게 가장 적합한 마약퇴치운동의 주체가 되어 국민건강의 파수꾼이 되어야 하고 민. 관 단체의 각종 모임에 적극 참여하여 지역유지로서 약사의 신분을 상승시켜야 한다.
약권 신장과 약권 수호는 임원들과 일부 지자체 선거 입후보자만의 몫이 아니다. 공생을 위해선 모든 회원이 함께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공생의 길은 오직 ‘나 하나만’ 이라는 이기심을 버리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