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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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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화살
  • 의약뉴스
  • 승인 2006.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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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을 쏘아 온지도 십년이 되었다.

내가 쏘는 활은 서울 올림픽 때 우리 나라에 금메달을 안겨 준 양궁(洋弓)이 아니다. 요즘 ‘레저’용으로 등장한  유럽풍의 석궁도 아니다. 두 개의 낙타 봉처럼 유연하게 굽은 우리의 전통 국궁(國弓)이다.

친구들은 젊은 나이에 걸맞은 골프나 볼링을 권했지만 나는 굳이 국궁을 고집했다. 원래 국궁은 할아버지 대(代)까지 이어 내려오다가 아버지의 요절로 끊어지고 말았다. 나는 항상 그 대(代)를 이어야 한다는 소명(召命)감에 어깨가 무거웠지만 그것은 마음뿐이었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약국을 개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해, 수 년 동안 공들여 온 약국이 도로 확장으로 철거되었다. 떠나고 싶지 않은 정든 터전, 헤어지고 싶지 않은 이웃들과의 인연을 아쉬움으로 지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은 소꿉친구가 있어 좋다. 무한히 샘솟는 동심의 추억을 쫓노라면 내 마음은 열 살 안팎의 꿈길을 달리곤 한다.

어릴 적, 우리는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아랫마을과 윗마을로 편을 갈라 활쏘기 시합을 하곤 했다. 비록 대나무를 휘어 만든 보잘 것 없는 화살이지만 신명이 나서 끼니를 거를 정도였다.

그 시절, 나는 할아버지의 고전(告傳)을 해 드리며 용돈을 벌기도 했다. 고전이란 화살이 과녁에 적중했나 여부와 빗나간 화살의 방향을 깃발로 신호해 주며 화살을 날라주는 심부름꾼이다. 할아버지께서 쏘아 보낸 화살이 과녁에 적중할 때마다 하얀 깃발을 흔들며 ‘따알벼 - ’하고 외치곤 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는 세월이 흐른 후, 나는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한량(閑良)이 되었다. 활을 쏘는 활터를 찾았을 때, 아버지의 친구 분들은 지기(知己)가 살아서 돌아오기라도 한 듯 나를 반겨 주었다. 고향의 역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어른들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내 아버지의 마지막을 되뇌곤 한다.

6. 25가 일어나던 해였다. 아버지는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셨다. 남들은 서둘러 피난을 떠날 때 “전쟁은 군인들끼리 하는 싸움이지 설마 민간인까지 죽이겠냐”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탯자리를 지키신 탓이다.

어느 날 저녁, 한 병사가 찾아와 저녁 수저를 막 뜨려던 아버지를 불러냈다. 자신이 입대한 사이 그의 동거 애인을 빼돌려 다른 사내에게 출가시킨 자전거포 주인을 찾아 왔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이 근방의 자전거포 주인은 아버지 말고도 또 한사람이 있었다. 정작 그가 찾는 장본인은 피난을 떠난 후였기에, 이름까지 대주며 자초지종을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기록은 영원하나 진실은 때로 현실 앞에 얼마든지 가려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아버지의 시신은 이웃마을의 동산 숲속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지금 내가 약국 문을 열고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그때, 나는 태어난 지 세이래도 안 된 핏덩어리였고 어머니는 스물다섯의 청춘이었다.

전쟁 중이었지만 장례는 치러야 했다. 하지만 조부모님과 삼촌이 피난을 떠난 후였기에 연약한 어머니, 꿈인지 생시인지 조차 분간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경주 김 씨 참의공파 광원(光源) 후손 종친회장직을 맡고 계시는 기택(基澤) 아저씨는 다락방에 숨어 지내다가 위험을 무릅쓰고 조부모님과 삼촌이 피난을 떠난 안산으로 달려갔다. 삼촌과 죽마고우였다지만 붙잡히면 인민군으로 끌려가거나 반동분자로 처단을 당하는 판국에 대단한 의리와 용기가 아니고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며 삼촌 일행은 삼백년 대대로 살아온 탯자리로 무사히 돌아왔다. 초여름답지 않게 따가운 햇살은 한 맺힌 우리 가족의 가슴속을 사정없이 찔렀다. 젖이 말라 암죽으로 끼니를 때우던 나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풀어헤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눈물을 뿌렸을 것이다.

조부모님은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 자식을 먼저 보내야만 하느냐고 땅을 치셨지만 부모와 사랑하는 아내와 핏덩어리나 다름없는 어린 나를 남겨 놓고 이승을 떠나야 했던 아버지는 차마 눈이나 감으셨을까.

아버지의 육신은 서창동 선산에 누우셨지만 당신의 영혼은 구천을 헤매고 계셨다. 1.4후퇴 때의 일이다. 조부모님은 온 국민의 피난 대열에 어머니와 내가 동참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겐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었다. 아버지의 현몽과 계시였다.

어머니의 꿈속에 나타난 아버지는 물고기가 든 어항을 들고 계셨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될까요?”

“두말할 나위 없이 얼어 죽겠죠.”

“우리 애들은 어항 속의 물고기나 다름없으니 절대로 집을 떠나지 마시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필시 이 추위에 얼어 죽을 것이니 꼭 명심하시오!”

어머니는 남편을 만난 사실이 꿈이 아니길 바랐지만 허사였다. 눈을 뜨고 나니 현몽이었다. 어머니의 신념은 피난 대열에 동참시키기 위해 집에 남아있던 양식을 모두 마차에 실어 버린 조부모님의 고집도 꺾을 수 없었다. 그 아버지와 어머니 덕분에 나는 오늘 활시위를 당길 수 있었다.

가엾은  아버지!

화살을 물린 시위를 당길 때마다 활을 움켜잡은 손에 힘을 주며 ‘아부지 --’하고 마음속으로 불러 본다. 화살의 깃털에 아버지의 한 맺힌 넋이라도 실을 수 있다면, 지난 사십 여 년 동안 사르지 못한 그리움의 한을 지을 수만 있다면 화살을 하늘 끝까지라도 쏘아 올리고 싶다.

요즘은 새벽마다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선산에 자리 잡고 있는 활터를 찾는다. 아버지의 기일(忌日)이 가까워 오면서 활을 잡는 횟수가 잦아지고 있다.

활터엔 무더위를 예고하는 안개구름이 녹색의 산자락을 뿌옇게 물들이고 있다. 화살을 쏘아 보낸 후 과녁을 향해 오솔길을 걷는다. 땅에 떨어진 화살을 줍기 위해서다.

젖줄 같은 샘물이 겨우 명맥을 이어가며 가물은 계곡을 적시고 있다. 인기척에 놀란 장끼 한 마리가 ‘푸드덕’ 놀란 날갯짓을 하며 안개구름 속으로 묻혀 버린다.

화살을 줍던 나는 과녁 앞에 엎드린 채 한동안을 서성거려야 했다. 한 개의 화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녁을 때리고 튀어 나가도 멀리는 안 갔을 텐데, 어디로 숨었을까. 혹시 장끼란 놈이 심술 삼아 물고 날아가 버린 것이 아닐까, 애꿎은 생명을 의심도 해본다. 어쩌면 전생에 나와는 인연이 없는 물건 인가보다 하고 자위해 본다.

하지만, 단념하기엔 선뜻 마음이 용납하질 않는다. 화살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나의 추억을 지워 버리는 것만 같았다. 화살 하나하나엔 동심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할아버지의 손때 묻은 쌈짓돈 냄새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내 가슴이 외로움으로 울먹일 때면 아버지의 넋을 그리움으로 부르던 화살을 잃어버리다니 ---.

나는 곧 화살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거두었다. 과녁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아버지의 묘소에 화살 하나를 바친 것이다. 안타까운 한을 털지 못해 차마 눈을 감지 못한 아버지의 넋을 달래 드리고 싶어서이다.

보고 싶은 아버지!

아버지의 산소를 찾을 때면, 어딘가 에서 잃어버린 화살이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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