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뉴스]
덕기의 할아버지 조의관을 보면 돌아가신 부친 생각이 난다.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면서 제삿날을 언제나 긴장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그리고 대추 밤 배 감의 순서대로 놓아야 한다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조상에 대한 예의를 잘해야 나중에 너희들도 복을 받는다는 말이 언제나 뒤따랐다.
하지만 제삿날은 잔칫날이기보다는 다툼의 시간이 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향을 빼먹었다느니 산적이 부족하다느니 술잔의 받침대가 맞지 않는다는 둥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득한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제사가 그야말로 순식간에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뭐든 빠른 우리 문화가 빛의 속도로 제사를 없애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순삭’이 아닐 수 없다.
전통의 유교 대가 집들도 홍동백서 조율이시 운운하는 사람이 썰물 빠지듯이 자취를 감췄다. 이유는 많겠지만 그건 여기서 다룰 일이 아니다.
염상섭의 장편소설 ‘삼대’를 읽다 보니 제사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다. 각설하고 삼대라고 하니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가 되겠다. 한 대를 30년이라고 하면 얼추 백 년의 시간이다.
1931년 소설이 연재되기 시작했고 때는 일제시대가 확고히 자리 잡고 있었다.
할아버지 조의관은 제삿날을 애지중지 하는 사람이다. 구시대의 상징이라고나 할까. 다시 말해 봉건사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아버지 조상훈은 그런 기대에 못 미친다. 첩에 한눈을 팔고( 첩질에 한눈팔기는 아버지 상훈이나 손자 덕기나 마찬가지다.) 남의 눈치나 보면서 그럭저럭 한세상 몸 편지 살고 싶어 한다.
학교 사업을 하고 교회에 다닌다. 문제는 제사다. 조의관에 눈에 꼴에 교인이라고 제사조차 멀리하는 상훈이 같잖아 보인다. 내놓은 자식 취급하는 이유다.
손자 덕기는 일본 유학을 갈 정도로 의관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젊은 청춘이라서 있는 재산 마음대로 쓰고 부르주아 보이로 살고 싶어 한다.
이들 삼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삼대’의 핵심 주제가 되겠다. 여기에 덕기의 친구 병화와 의관의 첩 수원댁 그리고 상훈이가 교육 사업을 할 때 학생이었던 홍경애.( 상훈이의 딸을 낳았다.)
그리고 덕기를 사모하는 필순이. 이들은 서로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서로를 이용하기도 하고 기대기도 하면서 독자들의 호기심을 이끈다.
평자들은 일제 강점기 사실주의 소설의 대표작으로 ‘삼대’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만큼 시대상을 잘 표현했고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세에 딱히 본받을 만한 주인공은 없다는 것이 아쉬움이다.
영웅적인 서사도 없고 극적인 반전도 없다. 쉽게 읽히고 무난히 넘어간다. 아마도 일제의 검열이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시대적 한계도 작용했을 것이다.
특히 ‘마르크스 보이’로 나오는 병화만 보더라도 도덕성으로 무장하거나 철저한 자기 관리가 있는 독립투사의 전형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술과 여자에 눈독을 들이고 덕기 부친 조상훈이가 다시 첩으로 들이려고 애쓰는 홍경애를 차지하기 위해 친구 아버지와 경쟁을 벌이고, 덕기에게 돈푼이나 뜯어 쓰려고 안달하는 태도는 ‘주의자’를 모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하지만 대단하고 엄청난 일 때문이 아니다. 그런 병화에게 마지막까지 친절을 베푸는 덕기는 어리숙한 헛똑똑이다.
아버지를 모욕해도 병화를 끝까지 챙기고 심지어 아버지의 여자였던 홍경애에 미련을 보이는가 하면 필순에게도 어찌하려는 수작이다. ‘삼대’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인물이 덕기가 되겠다.
상훈이는 한술 더 뜬다. 오로지 체면을 중시한다. 몰래 숨어서 애욕을 불태우고 마작 질로 재산을 탕진한다. 오로지 그가 신경 쓰는 것은 교회 사람들에게 들켜 망신을 당하지 않는 것. 그렇다고 예수교를 열심히 믿는 것도 아니다.
교육 사업도 건성이어서 교육으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다. 오로지 있는 돈 가지고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짓만 하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일관되게 조상과 돈과 자손 번성을 위하는 조의관이야말고 자신의 본성을 끝까지 지킨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하겠다. 삼대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캐릭터이면서 주목할만한 인물이다.
염상섭은 ‘삼대’를 통해 식민 시대, 지주와 가난한 자와 주의자들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그려 내는데 성공했다. 만석꾼 집안에서 벌어지는 삼대를 통해 우리는 당시 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다.
팁: 작품 중간쯤 조의관이 병으로 죽는다. 죽기 전에 의관은 재산 목록을 정리한 유산을 남겼다. 당연히 아들 상훈에게 많이 돌아가야 하나 의관은 아들을 믿지 못한다.
재산의 대부분을 손자인 덕기에게 맡기고 집안 살림의 열쇠까지 덕기에게 준다. 얼떨결에 조씨 집안의 살림을 맡게 된 덕기는 할아버지의 피를 받았으나 의관처럼 부르주아 역할도 제대로 못하고 계산속도 부족하다.
친구 병화에게 끌려다니고 그의 하수인 되기에 급급하다. 학업도 덜렁덜렁하고 자신에게 붙어 재산을 탕진시키는 최참봉이나 재종 창훈이를 처리하지도 못한다.
이런 상태로 시간이 흐르면 필시 조씨 가문은 몰락할 것이다. 상훈이 죽기도 전에 빚더미에 쫓겨 경성 바닥에 나 앉게 될 것은 자명하다. 몰락의 징후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나(아닐수도 있지만) 작품은 아쉽게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후반부 일제 고등경찰에 쫓기고 잡혀 고문하는 모습 등은 당시 조선이 어떤 처지에 있고 제국주의 일본이 어떤 식으로 조선을 통치했는지 짐작케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