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6-11-06 19:14 (금)
219. 고향(1921)-사람이 가면 길이 된다
상태바
219. 고향(1921)-사람이 가면 길이 된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6.06.19 15: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의약뉴스]

눈이 오는 날이면 그것도 많이 오는 날이면 지게에서 바작(바자기, 발채)을 떼네는 작업을 한다. 손이 시리고 과정이 만만치 않지만 새를 잡을 생각을 하면 온몸이 금방 땀으로 흠뻑 젖어 든다.

눈을 깨끗이 썰고 작대기로 바작을 받치고 그 아래 쌀겨 한 줌을 흩뿌린다. 새들의 유인 미끼다. 눈이 많이 왔으니 먹을 게 없는 것을 노린다. 작대기에 줄을 매달고 대문 뒤에 숨어서 기다린다.

하염없는 시간이 지날 무렵 주로 참새지만 간혹 까치도 날아들고 정말 운이 좋다면 꿩도 근처에서 얼씬거린다. 어릴적 고향에서 겨울날 이런 놀이를 했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또 다른 기억들도 무수히 많다. 깡통에 구멍을 뚫고 송진이 잔뜩 묻은 솔가지를 넣고 밤하늘을 향해 마구 돌리던 기억, 얼음 논에서 자치기를 했고 뒷산의 석탄 구멍을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고향은 늘 아련함으로 다가왔고 부모님이 계실 때는 방학이면 언제나 달려 가곤 했다. 세월은 흘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서울살이가 시작됐다. 고향은 더는 내려가고 싶은 곳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집이 있고 농사처가 있어 해마다 서너 번은 간다. 왕복 400킬로 거리라 차가 막히면 가는 길이 여간 고행이 아니다. 루쉰의 고향행에 비하면 새 발도 아니지만. 루쉰은 ‘고향’에서 고향을 가는 길이 무려 2000리라고 했다.

남북이 천리라고 하니 그 두배의 거리다. 웬만큼 마음먹지 않고는 가기 어렵다. 그러나 주인공은 가야만 한다. 집을 처분하기 위해서다. 20년 만에 그것도 엄동설한에 가는 길. 그는 이런저런 상념에 빠진다.

12살 아이였을 때 또래와 놀던 기억들. 하지만 영원히 떠나기 위해 가는 길이니 금의환향하는 것처럼 설레지는 않는다. 돈벌이를 위해 마을 사람들은 도시로 일찍이 가버려 쓸쓸함만이 가득한 고향.

▲ 없던 길을 새로 가면 길이 된다. 희망도 그런 것이다. 가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없던 길을 새로 가면 길이 된다. 희망도 그런 것이다. 가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서글픈 마음으로 주인공은 마침내 집에 도착한다. 줄 것은 주고 팔 것은 팔고 세간을 정리하다 그는 어릴 적 같이 놀던 룬투를 만난다. 40대 초반인 그는 무려 다섯 아들의 아버지가 됐다.

다리 사이로 도망치는 츄라는 동물이야기하면서 놀았던 그 아이가 저렇게 됐다니. 그는 어릴 적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형편이 좋지 않다. 나를 보자마자 나리라고 허리 굽혀 인사한다.

돈으로 신분이 정해지는 세상이라고 해도 주인공은 놀라서 그러지 말라고 해도 룬투는 그럴 수 없다. 호형호재 했던 그 땅꼬마 시절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나면서 주인공은 고향에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떠나면서 주인공은 선창의 밑바닥에 누워 희망을 생각한다. 룬투가 나에게 요구한 것도 떠오른다. 값비싼 가구나 그런 물건이 아니라 겨우 향로와 촛대를 달라고 했다. 여전히 고리타분한 녀석. 기껏 우상숭배나 하다니.

나는 그를 비웃었다. 그의 희망과 나의 희망이 달랐던 것이다. 그의 희망은 절박한 것이었고 나의 희망은 막연하고 아득한 그 무엇이었다.

팁: 짧은 단편의 마지막 구절에는 이런 유명한 말이 나온다.

“희망은 본디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많은 사람이 다니면서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

우상숭배나 하면서 하늘에서 곶감이 떨어지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런 기적은 없다. 소원을 빈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새로운 길이 만들어질까. 아니다. 과거를 털고 미래를 향해 나가기 위해서는 행동해야 하고 앞서 나가야 한다.

길이 없으면 먼저 걸어가서 만들어야 한다. 언젠가 좋아지겠지 하는 허무맹랑한 꿈은 접어야 한다. 우상숭배 대신 그 시간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

당시 암울했던 봉건 사회 중국에서 루쉰은 이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개혁해야 하고 변화해야 한다는 것. 그가 말하는 희망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여전해 대를 이어 가난해질 룬투 가족을 생각하면서 루쉰은 그들은 왜 변하지 않는지, 변할 생각을 하지 않는지 답답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고 나아가려는 사람과 제자리에 머물면서 불평불만인 사람. 누구에게 희망이 있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