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여기 약국 맞아요?”
처음 우리 약국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발을 문안으로 들여놓은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예외 없는 질문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보내는 약국을 거실처럼 꾸며 놓았기 때문이다.
아내가 소중히 여기는 그랜드형 디지털피아노와 오디오, 나의 취미 생활인 무선 조정 모형비행기, 국궁(國弓), 8밀리 무비 카메라와 영사기, 비디오카메라와 각종 모형물들을 진열해 놓았고 한편에 대형 책상과 책장을 마련해 공부방을 꾸며 놓았다.
태어난 지 며칠 만에 부친을 여읜 탓으로 아버지의 정을 모르고 자라 온 나는 두 아들에게만은 뜨거운 정을 마음껏 베풀어주고 싶었다. 약국이 한가한 틈을 타서 아이들과 책상 앞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나는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여기고 있다.
컴퓨터를 앞에 두고 삼부자(三父子)가 한 자리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을 보는 손님들은 부러움과 시샘의 눈길을 보내며 ‘아빠의 고마움을 이다음에 부모가 된 후에는 알게 될 것’이라고 한마디씩 던지곤 한다.
아이들은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간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바쁜 사업에 얽매여 새벽에 대문을 나서면 자녀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중에야 알코올 냄새를 풍기며 귀가하는 가정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정경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약사라는 직업에 긍지와 희열을 느끼며 약국이 별로 바쁘지 않은 현실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긴다.
남들은 좋은 길목을 찾아 철새처럼 약국을 잘도 옮겨 다닌다지만 나는 10년 전 이 자리에 건물을 신축하고 구멍가게만도 못한 매상을 올리면서도 꼼짝 않고 이 자리를 지켜 왔다. 마치 나의 조상들이 300여년을 만수동에서만 대를 이어왔듯이―.
하지만 나는 돈벌이와 인연이 멀었던 10년이란 세월이 결코 후회스럽지 않다. 약국이 한가한 덕분에 아이들의 학업을 지도할 수 있었고 사색에 잠겨 원고지 칸을 메울 여유를 갖지 않았던가.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증권이나 부동산 투기로 일확천금 불로소득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투자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일이다.
큰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이사회에 처음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년 회비만 납부하고 일 년에 한두 번만 모이자는 소릴 듣고 나도 모르게 격분하여 일장 연설을 내뱉고 말았다.
“이사직이란 학부형들의 대표이기에 회비를 희사하는 것으로써 그 임무를 다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내 자녀들이 몸담고 있는 학교에 자주 나와 관심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사업에 정열을 쏟는 것만이 진정한 투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우리의 대를 이어줄 자녀들이 올바르게 배우고 자라나도록 한 달에 단 하루, 그 하루의 몇 시간만이라도 이사회에 참석하여 학교와 선생님들께 관심을 기울입시다. 그런 마음가짐이야말로 값진 투자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우리의 사업이 일취월장한다 할지라도 부모의 관심 밖에서 사랑의 갈증을 느끼며 자란 우리들의 자녀들이 사회질서와 가정을 파괴하는 흉악범으로 타락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값진 투자. 오늘도 나는 보이지 않는 값진 투자를 하고 있다고 자부하며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책상 앞에 마주 앉을 시간만을 학수고대 할 뿐이다. <1990년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