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藥師라는 天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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藥師라는 天職
  • 의약뉴스
  • 승인 2006.07.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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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아저씨가  무료함을  달래려고  약국을  찾아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농사를  짓던  분이다.

키 작은  곡식이  고개를  디밀던  고향의  대지가  심한  몸살을  앓고 난  후  구수한  두엄 냄새가  풍기던  농토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아파트의  높이만큼  껑충  뛰어오른  땅값 덕분에  사장님  소리를  듣게  되었지만  그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호사가들은  그들의  뒷전을  향해  무식한  졸부  운운하며  거친  숨을  쉬었다.  하지만  실로  오랜만에  거름 ( 糞尿 )지게를  어깨에서  내려놓은  그들의  손바닥엔  굳은  살점들이  아직도  못 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졸부가  되려고  땅 투기를  한  바도  아니다. 고향을  지키고  농토를  지켜 온  순진한  농민들이  오히려  생업의  터전을  빼앗긴  것이다. 지금까지  이어 내려온  생활의  리듬이  깨어지자  이번엔  그들이  고통스런  몸살을  앓으며  살아가는  방법을  놓고  방황을  하고 있다.

동창이  밝기가  무섭게  삽자루를  어깨에  메고  들녘으로  나섰던  아저씨였다. 지금은  하루가  밝아 오는  것이  두렵단다. 오늘은  어디에서  하루를  소일해야 할까  걱정에  한숨부터  나온단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3개월간  약국을  휴업했을  때였다. 그림자만을  남겨 둔  채  훌훌  떠나 버리고  싶던  어느 날 , 나는  약국  셔터를  내린  후  정처 없는  길을  나섰다. 단  한번의  외박조차  안했던  내가  자청한  15년만의  외도였다.

가정  외에  곁눈질이란  상상조차  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온  자신이  왠지  어리석게만  여겨졌다.  때늦은  사추기 ( 思秋期 )에  접어들었음인가 , 마음엔  온통  순리를  거부하고 싶은  반항감  뿐이었다.

일에  지친  육신을  쉬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왜소한  몸  하나로   약사회무와  아이들의  학교 , 사회단체  등  10여 가지의  직무에  시달리다  보니  잃어버린  나를  찾을  기회가  없었다.

그 동안  일밖에  몰랐던  가슴 깊은  한  구석엔  애써  감추어 온  그리움이  싹트고  있었다. 또  다른  내가  사슴의  슬픈  목으로  기다려 온  연민의   정 ―, 그것은    삶에  떠밀려  마음  한  편에  접어 두었던 , 문학을  향한  젊은  날의  무지갯빛  꿈과  소망이었다.

약국을  휴업한  3개월은  신들린  세월이었다. 갇혀 있던  약국의  울타리에서  헤어나  역마직성이  되어 보기도  했다.  전에는  회의가  끝난  후  여담  한  번  나누지  못하고  시간에  쫓겨  약국으로  돌아왔다. 그  지난날들을  되짚으며  느긋한  대화를  즐기기도  했다. 편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여러 가지  강의를  쫓아다녔다. 약사가  아닌  나그네의  눈망울에  비친  약국 , 그때만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약국에  갇혀 있는  동료  약사들이  측?! 뵉?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자유분방함도  허허로운  가슴을  채워 주지는  못했다. 결국  나는  15년만의  긴  외출을  마치고  3 개월  동안  내려졌던  셔터를  들어  올렸다. 어둠의  공간에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약국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나의  체취와  지문들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채  나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긴  방황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이  반갑다는  듯  눈에  익은  모습으로  나를  반겨 주었다.

자신이  약사임을  거부한  3개월이었지만  나는  끝내  약사라는  천직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나의  육신은  거리를  떠돌며  방황할  지라도  영혼만은  약국에  지문으로  남아  숨쉬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방황을 끝내고 약국으로 돌아오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십여 년 전, 나는 지금의 약국 건물을 신축하며 고질병을 얻은 적이 있었다. 현대 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가슴앓이 화병이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내가 ‘부자지간도 속인다’는 공사판에서 알게 모르게 당한 속임수 때문에 생긴 병이다.

 속이 메스껍고 구토가 심한 증상이 꼭 위암일 것만 같았다. 의사의 진단이 두려워 병원에 진찰조차 받으러 갈 엄두가 안 났다. 내 앞에 드리워질 죽음이란 장막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 장막의 어두움 그림자 속에서 춥고 배고픈 앞날을 헤쳐 나가야 할 가족들이 가여웠기 때문이다.

 온갖 양약을 복용해 봤지만 허사였다. 식사를 하다가도 달갑지 않은 기억이 떠오르면 뜨거운 기운이 목덜미를 타고 정수리까지 치솟는 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마다 눈앞이 깜깜해지며 정신을 잃고 쓰러지곤 했다. 꿈결에서도 속이 치밀면 메스꺼워 잠을 깰 정도였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한약을 공부하게 되었다. 위암인 줄만 알았던 나의 가슴앓이 화병은 내가 쌓은 한방 지식으로 거뜬히 고쳤다. 내가 약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지금까지 내 생명을 연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약사의 길을 걸어온 것이 환자들의 건강을 지켜 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의 천수를 누리는 길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 천직으로 받아들인 약업을 다시는 져 버리지 않으리라 다짐해 본다.

 15년만의 외출은 나에게 뜻 깊은 방황이었다. 잃어버렸던 나의 길을 되찾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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