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청에 자원 봉사 갔던 둘째 녀석이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왔다.
동전 두 닢이 없어 땡볕을 쏘이며 십리나 되는 거리를 걸어왔다고 한다. 다시 한 번, 융통성을 가르쳐주지 못한 자식 교육에 대해 반성의 한숨을 내쉰다.
막내는 며칠 전부터 구청 세무과로 전산 자료 정리를 도와주기 위해 늦잠도 못 자고 공무원 출근 대열에 섞여야 했다.
인성 교육에 중점을 두기 위해 교육부에서 시도한 자원 봉사 제도는 입시와 엇물려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염불보다 잿밥에 더 마음이 있다는 말처럼 학생들은 인성을 키우기보다 어떻게든 40시간만을 채우는데 목적이 있을 뿐이었다.
큰 녀석은 대입 시험 보충 수업을 핑계 대고 아빠가 알아서 처리해 달라며 봉사 카드조차 가져오지 않았다.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학교에 붙잡아 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40시간 봉사 활동 카드를 강요하는 정책이 못마땅했다. 자발적인 봉사라고 하지만 입시 성적에 가산점이 된다는데 어찌 강제성 이상의 압력이 아니고 무엇인가.
인성 교육 운운하면서 등수를 공개하고 입시 성적에 반영한다는 종합 생활 기록부 제도를 창출한 교육부의 정책은 실망을 감출 수 없다. 학부형의 입장에서도 이러할 진데 수험생 당사자들에게 40시간 봉사는 무의미할 뿐이리라.
자원 봉사 학생들을 오히려 귀찮아하며 접수조차 꺼린다는 매스컴 보도를 보며 남의 일로 무심히 여겨 왔는데 중 3 짜리 둘째가 봉사 카드를 내놓을 땐 가슴이 섬뜩했다.
우리 애들만은 눈총꺼리가 아닌 진정한 자원 봉사자로 만들기 위해 내가 동정 자문 위원으로 있는 동사무소 동장님을 찾아가 의논을 드렸다.
동장님과 나는 한마음이 되어 실패한 자녀 교육에 대해 긴 한숨을 뱉었다. 첫 아들에 대한 기대와 과잉보호로 얼룩진 헌신적인 희생, 반면에 그 대가로 찾아온 후회와 실망은 충격과 가슴 아픈 동병상린이 아닐 수 없었다.
때마침, 교통사고로 세상 떠난 아들의 영정을 안고 트럭에 달려들어 자살한 모정이 가슴을 뭉글하게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아들이 살림을 돕기 위해 학교를 쉬며 음식점에서 배달을 하다가 아스팔트 위에서 원혼으로 사라지자 슬픔과 허탈감을 감내하지 못한 채 아들이 숨진 자리에서 그 뒤를 따른 것이다.
큰아들이 태어난 후 나 역시 그런 심정으로 아들의 곁을 맴돌았었다.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부친을 잃은 까닭에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전혀 없었던 나는 첫 아들에게 부정(父情)을 심어 주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당연히 나의 모든 삶은 첫아들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아들을 잃은 슬픈 충격에 생을 포기한 그 어머니에게 홀연 단신 고아가 될 어린 딸자식은 어떻게 비춰졌을까?
동장님과 내 입장에 비교한다면 그녀가 홀로 남겨 둔 막내딸은 우리가 도외시해 온 둘째 아들이 아니었을까 싶어 다시 한 번 죄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세월이란 처방으로 치료한다면 막내딸로부터 아들 못잖은 효도를 기대할 수도 있었을 텐데 - - -.
둘째 아들의 컴퓨터 재능을 살리고 산교육을 시키기 위해 구청 비서실에 특별히 부탁을 했다. 지금까지 큰아들에게만 정성을 쏟느라 둘째에게는 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미안할 정도로 무관심했었다.
큰애와 달리 유치원 때부터 자가용으로 등하교를 시켜 주지도 못했고 과외 교사도 소개시켜 주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둘째에겐 죄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동장님의 하소연처럼 둘째에겐 인간미가 있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세발자전거를 작만해 놓고 원하는 장난감마다 모두 안겨 준 큰 녀석은 제 앞가림만 챙기는 반면에 둘째는 달랐다.
먹을 것이 생기면 제 어미 아비의 입에 먼저 넣어 주었고 어버이날이나 생일이면 구구절절 사연까지 적어 선물을 챙겼다. 딸이 없는 집안에서 애교까지 도맡아 아비를 흐뭇하게 했다.
집안일과 잔심부름도 독서실에서 기거하다시피 하는 형을 대신해 온 터였다. 해서, 동전 두 개 정도는 제 스스로 해결할 줄로 믿었기에 기대한 만큼 실망이 컸던 것이다.
며칠씩 한 책상에서 근무를 했으면서도 동전 두 닢만 꾸어 달란 말을 꺼내지 못한 둘째를 꾸짖으며 자신을 채찍질해 본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까?
어릴 때부터 선생님의 질문에 답을 알면서도 수줍어 선뜻 손을 들지 못했고, 친구에게 돈을 빌려준 후 막상 내가 아쉬운 처지이면서도 돌려 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으며, 여학생과 도시락을 먹으면 영락없이 체하는 고역을 겪으며 대학을 마친 나였다.
온실에서 거친 세파와 격리된 채 오직 공부가 제일이란 신조로 살아왔기에 믿었던 이웃에게 많은 재산을 사기 당하기도 했다. 내 맘 같으려니 믿고 친절을 베풀다가 구설수에 말려든 적은 얼마나 많았던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던 어느 사형수가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은 나의 어머니’라며 과잉보호로 키워 준 홀어머니를 원망했다고 한다. ‘자식이 넘어지면 안아 일으켜 주지 말고 일어나는 방법을 가르쳐 줘야 한다 ’는 서양 속담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고뇌와 번 민속에 석 달 동안이나 결석을 한 나를 퇴학시키지 않으셨던 담임선생님이 그리워진다.
영어 선생님이면서 ‘너희가 열심히 외운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이 결코 사회생활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며 간간이 인생 경험담을 들려주신 분이다.
독실한 불자이면서도 결코 다른 종교를 비방하지 않고 ‘각자 원하는 종교를 갖고 성실하게 살라’던 그 선생님이야말로 인성 교육의 표본이 아닐까?
두 녀석들이 입시 지옥에서 헤어나는 날, 나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기 위해 기꺼이 배낭여행을 시키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