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이 외로울 때면 핸들을 잡는 습관이 있다.
한적한 교외로 차를 몰고 나서면 군중 속의 고독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항상 같은 코스이지만 가로변의 풀잎들은 철따라 옷을 바꿔 입으며 새로운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연둣빛 새싹의 풋내음은 아직 동면에서 깨어나지 않은 나의 심장을 향해 「큐피드」의 화살을 마구 쏘아 보낸다. 설렘으로 터질 듯한 가슴은 이미 사랑의 포로가 된 느낌이다.
녹색의 들판은 성장한 여인의 자태를 보는 듯하다. 태양의 고문을 당하며 아픈 만큼 성숙하는 여름은 나의 마음까지도 의연하게 한다.
가을이면 나무는 가지마다 걸쳤던 옷을 하나 둘 벗기 시작한다. 나의 마음에 걸쳤던 옷도 벗어 던지고 솔직해지라고 외치는 듯하다.
겨울의 정적은 외로움보다는 슬픔을 자아낸다. 얼어붙은 길가에 누워 있는 빛바랜 잡초도 숨을 죽인 채 흐느끼는 듯하다. 지나간 초록빛 영화를 못내 아쉬워함인가 , 더 오래 누리지 못한 생에 대한 미련 때문인가.
사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음의 동요를 느낄 수 있음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리라. 변하지 않는 것은 죽음 뿐이다.
차창에 비추이는 북망산의 모습은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내 몫으로 다가오는 죽음은 슬프지만 산자락을 깔고 앉아 있는 타인의 무덤은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거부감을 느낌은 웬일일까.
여름 장마로 무너져 내린 공동묘지를 신문에서 보았다. 산사태라기보다는 연옥의 형장 같았다. 진흙 더미 위에는 유골과 아직 썩지 않은 관 조각들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묘지 법이 제정되지 않으면 전 국토는 금수강산이 아닌 무덤으로 뒤덮인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위정자도 선뜻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못한다. 수천 년 이어 내려온 관습을 하루아침에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치욕으로 여기는 욕설 중엔 ‘조상의 묘를 팔아 먹을 자식’이란 말이 있다. 선산을 팔려면 천재 (天災)가 아닌 인재 (人災)로 유택 (幽宅)을 파헤쳐야 한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홍콩 주민들의 장례 제도에 관한 일화가 떠오른다. 그들은 땅이 비좁기 때문에 화장 (火葬)을 한다. 땅에 묻히려면 1 억 원 정도를 지불하고 묘역을 구입해야 한다. 그러나 돈이 아쉬운 후손 중엔 조상의 묘지를 파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나에게도 선산이 있다. 350여년 전 , 11 대 조부께서 만수동에 터를 닦으신 후 영원히 안주하신 유택이다. 머지않아 선산도 도시계획으로 주택이 들어설 것 같다.
이재 (理財)에 밝은 아저씨 한 분은 선산을 처분하여 개별적으로 나누자고 종친회 때마다 의견을 내세운다. 그때마다 조부 (祖父) 횡렬의 마지막 생존자이신 할아버지께서는 눈물을 글썽이시며 만류하셨다.
선조들께서 힘들게 마련한 선산은 양지바른 동산에 자리 잡고 있다. 더 좋은 명당을 마련하지는 못할지언정 , 돌아가신 조상을 유택 (幽宅)에서 쫓아내는 소행은 불효 중에 불효라는 생각이 든다.
나만은 시신을 화장하여 깨끗한 종말을 마감하고픈 심정이다. 자손들에게 부담을 끼치고 싶지 않고 조상의 묘를 팔아먹는 불효자를 만들고 싶지도 않다.
잡초가 무성한 채 버려진 임자 없는 무덤을 볼 때면 화장에 대한 미련은 더욱 간절해진다. 화상을 입고 숨진 자식을 두 번 불구덩이에 넣을 수 없다며 공동묘지에 묻은 친구가 있다. 몇 해가 흘렀지만 한번도 자식의 무덤을 찾아갔다는 말을 친구로부터 들은 적이 없다. 친구는 자식의 영혼을 가슴에 묻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설문 조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는 항목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부패」라고 대답한다. 물체가 썩어서 없어지지 않으면 세상은 온통 쓰레기와 시체 더미로 뒤덮여질 것이다.
물체는 부패하면서 열에너지를 발생한다. 반대로 열을 가하면 부패의 속도가 빨라진다. 화장 (火葬)이 바로 그것이다.
나에게도 가깝게 지내던 이들과 한줌의 재로 이별했던 추억이 있다.
며칠 전 , 결혼식 때 내가 사회를 보아준 친구로부터 부인이 유방암으로 숨졌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왔다. 불임증을 치료하기 위해 한약까지 지어 주었으나 끝내 아기를 낳아 보지도 못한 채 숨진 그녀가 가여웠다.
자신의 종말을 화장 (火葬)으로 깨끗하게 마감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녀는 끝내 화장터에 실려 오고 말았다. 내 집을 마련하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까 봐 남편에게 조차 암에 걸린 사실을 숨겨 온 여인이었다. 부부간의 추억 거리가 될 만한 물건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불태워 버린 비정한 아내라며 친구는 통곡을 한다. 그녀에게 한줌의 재는 인연의 고리 마저 지워 버릴 수 있는 묘약이었을까.
저승사자와 같은 화장터 인부들의 표정은 유족들의 오열에 미동조차 없다. 그리움과 미움이 회한으로 얼룩진 나무 궤짝을 숙달된 손놀림으로 화구 (火口)에 밀어 넣을 뿐이다.
인부들의 말로는 화장터를 찾는 시신은 하루 15 구 (柩) 정도이며 그 중 10 구 가량이 40 대 (代) 연령이라고 한다. 술과 담배로 인한 간장 질환 , 심장마비와 각종 암 질환이 사망의 주 원인이라는 것이다.
화장터 맞은 편에는 「부평 공동묘지」가 소름 돋은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32만평을 가득 채운 무덤들을 가리키며 화장터 인부들은 화장의 필연성을 강조한다.
시신이 한줌의 재로 변하기 까지는 2 시간이 걸리며 38 - 45리터의 경유가 소모된다고 한다. 일단 화구가 달궈지면 평균 34리터면 충분하나 흐린 날은 연료가 더 소모된다며 화부는 찌푸린 하늘을 쳐다본다.
3 백여 일 간 모태에서 빚어진 육신을 무 (無)로 지우기 위해 화장터의 굴뚝은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다. 기나긴 인생 여정이 남긴 추억의 발자취를 단 2 시간에 태워 버릴 수는 없으리라.
화로 (火爐)의 불길이 용트림을 하며 유 (有)에서 무 (無)로의 시간을 재촉한다. 연기를 내뿜는 굴뚝은 하나이건만 화구 앞에는 목탁과 찬송가 소리가 제각기 목청을 돋우며 망자 (亡者)의 영혼을 인도하고 있 다.
인간이 가는 마지막 길은 오직 한곳이다. 매장이냐 화장을 택하느냐의 과정이 다를 뿐이다.
아름다운 종말은 화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화로의 불꽃은 병 덩어리인 육신 뿐 아니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마저도 한줄기의 연기로 지워 버릴 것만 같다. 남겨 둔 흔적이 없는 만큼 사무치는 그리움은 더욱 짙게 마련이다.
다가오는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여인. 남편의 앞날을 열어 주기 위해 사진 한 장까지도 한줌의 재로 정리하고 떠나간 친구의 부인이야말로 아름다운 종말을 장식한 여인이 아닐까.
한줌의 재로 변해 버린 부인을 허공에 뿌린 친구의 가슴에 화로의 불길처럼 뜨거운 사랑의 추억만이 남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