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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바랜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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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바랜 훈장
  • 의약뉴스
  • 승인 2006.06.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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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태양은 싱그러움보다 우수의 적막함이 깃들어 있다. 육이오 사변이 일어났던 유월은 아버님과 삼촌을 모두 잃어버린 달이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유월이 다가오면 생전의 할머님께서는 퇴색된 훈장 하나를 깊은 장롱 속에서 꺼내어 어루만지시고는 했다. 육이오 사변 당시 학도병으로 산화한 삼촌의 유품이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빈곤과 혼란의 시대였기에 남루한 차림의 걸인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상이용사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민가에 행패를 부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할머님께서는 문전 식객들을 빈손으로 보내시지 않는 분이셨기에 정감 어린 눈길로 그들을 다독거려 주셨다. 그러나 그들이 당신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행패를 부리기라도 할 양이면 할머님께서는 묵묵히 집안으로 들어가 빛바랜 훈장을 꺼내 오셨다.

 “당신들은 이렇게 나마라도 살아서 가족들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을 큰복으로 아시오! 나는 내 아들의 유골조차 만져 보지 못하고 가슴 깊이 맺힌 한을 안고 사는 늙은이요. 그 한을 풀어 주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못질을 해야 쓰겠오?”

 할머님은 흘러 넘칠 듯한 찻잔을 다루듯 가슴 언저리에 자리잡고 있는 울분을 삭이고 계셨다. 그러면 그들은 쇠갈쿠리와 목발을 게눈 감추듯 거두고 머쓱하니 사라지고는 했다. 죽음과의 이별이란 결코 환상이 아니라 완벽한 슬픔이기 때문이다.

 할머님 생전에는 현충일 추모식전이나 보훈연금을 타러 다니실 때 내가 늘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그러나 사십년 전, 두 아들을 모두 빼앗겼던 유월의 하늘을 원망하시며 숨을 거두신 후로는 어머님께서 그 짐을 도맡으셔야 했다.

 며칠 전, 현충일에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오신 어머님께서는 묵화 같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표정으로 파죽음의 몸이 되어 누워만 계셨다.

 ‘김기덕’이란 삼촌의 이름은 두 사람이나 있었지만 주소가 다른 동명이인이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확인하시고는 아직도 이름 없는 들꽃이 되어 위령탑에 혼백마저 잠들지 못함을 못내 서운해하시며 식음조차 마다하셨다.

 “이름 없이 전사한 생명이 하나,둘이유? 어차피 나라 위해 바친 목숨, 그 사실만으로도 영광으로 알면 되죠!”

 나는 어머님의 서운한 심정을 달래 드릴 양, 심드렁한 말대답으로 어정쩡한 분위기를 메워 버렸다.

 삼촌은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해병에 입대하신 후, 1952년 6월에 전사하셨다.

 총상을 입고 병원선에 입원하셨다는 급보를 접하신 어머님께서는 어렵고도 어려운 경로를 밟아 병원선을 찾으셨다.

 그러나 삼촌은 이미 하루 전, 불사르지 못한 청춘의 애달픈 한을 차마 잠재우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같은 병실에 있던 동료들의 말을 빌리면, 삼촌은 부모인 할아버님과 할머님의 염려보다는 내 걱정뿐이었다고 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운명의 회색빛 그림자를 괘념치 않고 총상의 고통과 병상의 외로움 속에서도 남편을 잃은 형수님과 아버지를 여의고 거친 풍파를 헤쳐 나가야 할 갓 태어난 조카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흐느끼셨다고 했다.

 어머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아스라히 기억에서 지워져 삼촌을 도외시했던 부끄러움과 함께 서러움이 가슴 끝을 파고들었다.

 정성을 쏟은 만큼, 거울을 닦아 모든 것을 투사한 만큼 되돌아오지 않는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는 탓이었을까?

 지금도 나에겐 가보처럼 고이 간직해 오고 있는 누렇게 퇴색된 한 통의 편지가 있다. 삼촌의 입원 소식을 알리는 ‘ 해병 8089부대 1068부대 3중대 3소대 김승덕 소대장 ’이란 분이 보내 온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삭아 부스러질 듯 풍화해 버린 봉투를 조심스레 들추며 인천 보훈지청에 다이얼을 돌려보았다. 이제나마 삼촌의 장엄했던 최후를 확인하고픈 심정에서였다.

 “해군 상사, 09210510번, 김기덕, 1930년 11월 8일에 출생하여 1952년 6월 4일, 22세의 청춘으로 조국의 평화를 위해 전사하다.”

 오늘 아침, 어머님께서는 작은 종이 쪽지 하나를 손에 꼬옥 쥐시고 동작동을 향해 노구의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삼촌에 대한 인적 사항을 확보해 오면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해 보겠노라 는 국립묘지 관리 직원의 친절한 배려에 실낱같은 희망을 기대하며---.

 멀어져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 그것은 전쟁과 평화, 자유와 통일의 요란한 구호 이전에, 살아 생전 당신에게 주어진 숙제를 해결하겠다는 무언의 갈망이었다. 그리고 물보다 진한 핏줄의 고향을 찾는 뜨거운 귀향이었다.

 그후, 삼촌의 유해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고이 안장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역사는 잊어버릴 수는 있을 지언정 지워질 수는 없기 때문이리라!

 


 현충일에 이 글을 삼촌의 영전에 바치며, 빛바랜 훈장과 생명을 맞바꾼 헤아릴 수 없는 영령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살아남은 나는 생명과 자유의 소중함을 한시라도 소홀히 하지 않으리라 진혼(鎭魂) 나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굳게 다짐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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