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5-07-17 18:45 (목)
안분지족(安分知足)
상태바
안분지족(安分知足)
  • 의약뉴스
  • 승인 2006.02.0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나아, 두-울, 세-엣.”

내가 활시위를 당기는 동안 사대(射臺) 뒤에서 동료 사원(射員)들은 입을 모아 숫자를 센다. 하지만 사원들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다섯을 채우지 못하고 나는 활시위를 놓친다.

활시위를 당길 때마다 내가 머리 속으로 세는 수는 여섯을 넘는데 사원들이 세는 수는 절반도 안 된다. 수를 세는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릴 적, 술래잡기 술래가 되어 눈을 가린 후 열(10)을 세었을 때 ‘하나 둘 셋 - - -’ 보다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대신 하는 편이 훨씬 빨랐던 추억이 떠오른다.

화살을 촉은커녕 상사까지 당기지도 못하는 상황이니 활시위를 당긴 채 참는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활의 강도가 내 팔 힘에 비해 훨씬 세기 때문이다.

애당초 욕심을 부린 것이 화근이었다. 활을 새로 장만할 때 죽마고우(竹馬故友) 심재성 신궁(神弓)은 내 힘에 맞는 약한 활을 구입하도록 조언했다. 하지만 센 활을 쏘는 사원들을 시샘하며 분에 넘치는 센 활을 선택한 것이다.

센 활의 시위를 떠난 화살은 직선모양 날라 웬만한 풍향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반면에 내 활은 강도가 약해 하늘 높이 포물선을 그리며 창공을 가른다. 자연히 화살은 수시로 변하는 풍향에 큰 영향을 받아 과녁에 관중 하는 비율도 그만큼 낮을 수밖에 없다.

‘네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을 망각한 채 주변의 비아냥거림처럼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나의 큰 실수였다.

그냥 내 고집대로 속사(速射)를 할 것인가 아니면 이 활을 버리고 약한 활을 다시 장만할 것인가. 고민 끝에 활을 깎아 내리기로 했다. 동료 사원들은 각궁(角弓)이 아닌 개량궁(改良弓)을 깎으면 활을 쏠 수 없게 된다며 만류한다.

어차피 쏘지 못하고 버릴 바에는 차라리 내 힘에 맞을 때까지 깎아 보리라 예리한 칼날로 수술을 시작했다. 주인을 잘못 만난 활은 신음을 토하며 한 꺼풀 한 꺼풀 속살을 드러낸다.

화살이 대기실(화살통)에서 숨을 죽인 채 주인의 수술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동안 집도하는 나의 이마엔 구슬 같은 땀방울이 쉴 사이 없이 솟아오른다.

드디어 장시간의 수술이 끝났다. 긴장을 풀고 수술 부위를 사포질을 해 다듬은 후 왁스를 문질러 마무리한다. 몰골이 흉했던 상처는 윤이 나고 전보다 더 겸손한 모습으로 허리를 굽힌 활 등의 곡선은 유연한 자태를 자랑하는 듯하다.

이제는 시위를 당기며 의도적으로 숫자를 세지 않아도 화살이 편히 시위를 떠날 때까지 참을 수 있게 되었다. 시위에 화살을 걸고 활을 움켜잡은 출전피로 화살촉이 다가올 수록 굽은 활 등은 미소짓는 하회탈의 눈썹을 그린다. 숨결 같은 시위 소리를 남긴 채 그림같이 허공을 가르는 화살이 세 개의 깃을 흔들며 속삭인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욕심부리지 말고 힘에 맞는 활(弓)을 선택하세요.”

국궁(활)은 제 분수를 알고 자신의 능력과 현실에 만족하라는 안분지족의 소중한 교훈을 내게 안겨 주었다.

김사연( 수필가 , 인천시약 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