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분업이 되기 전의 일이다.
금테 안경을 걸친 사내와 곱슬머리의 중년 부인이 약국에 들어와 약사를 찾았다. 이 약국에서 지어 준 약을 먹고 장모의 다리가 마비되었다가 5일 동안 병원을 업고 다닌 덕분에 회복되었으니 그 동안의 치료비를 보상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약물 부작용이란 진단이 담당 의사의 소견임을 내세우며 기고만장했다.
컴퓨터에 입력된 처방을 확인해 보았다. 환자는 약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문 훼이스(만월) 현상을 보인 할머니였다.
맨 처음 나의 약국을 찾던 날, 노인은 가까운 약국을 놔두고 굳이 길을 건너 왔음을 강조했다. 그런 경우, 감사의 마음보다는 미심쩍은 경계심을 두게 마련이다. 대개 약을 강하게 조제해 달라거나 자신이 단골임을 강조하는 환자일수록 뒤탈이 많기 때문이다.
해서, 이 노인의 조제록 글자 하나 하나까지 신경을 써 왔고 그런 인연으로 은연중 속마음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내가 어려서부터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란 탓으로 더욱 정을 베풀었던 노인 환자다.
이런 사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위와 딸은 무작정 나를 윽박지르고 있다. 물론, 그들에게 몇 푼의 치료비를 생각해 주면 입막음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 하나 편하자고 그럴 수는 없었다.
과거, 약화 사고를 당한 약사들은 지나치게 주위를 의식하며 우유부단한 대처를 했다. 때문에 약사와의 말썽거리는 시비에 상관없이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 왔음을 약사회 회무를 맡으면서 깨달았다.
이번 사건 역시 나의 행동 여하에 따라 선례로 남을 것만 같아 보상 문제는 내용을 확인한 후 연락하기로 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더라고 전문직인 의사가 어떻게 무지몽매한 환자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더욱이 처방 내용을 확인 조차하지 않고 약물 부작용이라고 단정을 내리다니---.
전화부를 뒤져 그들이 통원 치료를 받았다는 의원에 다이얼을 돌렸다. 그 의원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울분의 목소리를 애써 달래며 담당 의사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했다.
“예? 약물 부작용이라고 그랬다고요? 과거에 신경통 약을 오래 복용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그 부작용으로 몸이 부었으니 치료를 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인데요! 그 할머니는 혼자서 멀쩡히 걸어 왔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신이 아닌 이상 마비된 다리를 어떻게 5일만에 완치시킬 수 있겠습니까? 환자가 통증이 심해 약국을 찾았을 것이고 약사님이 조제한 약이 약하니까 병원을 찾아온 것뿐인데 치료비를 왜 약사님이 변상합니까? 그런 식이라면 어떻게 병원이나 약국을 경영하겠습니까?”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할머니를 약국으로 불렀다. 노인은 신경통의 통증마저 망각한 채 뛰다시피 달려와 치료비를 얼마나 줄 것이냐고 다그쳤다.
가슴이 콩콩 튈수록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힌 후 방금 전 담당 의사와 나눈 통화 내용을 이야기했다.
노인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나 역시 취조하듯 다그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해야 했던 노인의 모습이 애처로웠기 때문이다.
한참 후, 노인은 고해성사를 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신경통은 빨리 낫지 않고 딸과 사위는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기에 더 아픈 시늉을 하며 병원에 갈 돈을 달랬단다. 딸과 사위는 약국 약을 먹고 더 아프면 약사에게 돈을 받아 내야지 왜 제게 돈을 달래냐며 펄쩍 뛰더란다.
노인의 병은 청상 과부로 딸자식을 키우느라 온갖 궂은 일을 도맡다 보니 생긴 것이었다. 흘러간 청춘이 너무도 후회스럽고 서러워 버스를 타고 방황하다가 찾아간 곳이 그 의원이었다.
집에 돌아온 노인은 의사가 약물 부작용이란 소리를 했다고 딸에게 전해 주었다. 사위는 약국에서 지어 준 약을 복용한 후 생긴 부작용으로 알아듣고 옳다 거니 무릎을 치며 장모에게 용돈을 톡톡히 받아 주겠다고 제안했단다.
사위의 그럴듯한 꼬임에 넘어가 본의 아니게 연극을 꾸몄다며 노인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15년이 지난 지금 이 사건을 돌이켜 보며 만에 하나 노인의 말대로 담당 의사가 ‘약물 부작용’이라는 말을 했다면 의사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지금처럼 좋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병종구입(病從口入) 화종구출(禍從救出)’이란 말이 있다. 병은 입으로 들어가고 재앙은 입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이다. 이처럼 전문인이 환자의 앞에서 생각 없이 내 뱉은 말이 환자에게 병을 안겨줄 수도 있고 자신과 이웃에게 화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교훈을 체험한 후부터는 말 한마디마다 신중을 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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