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감상했다.
12년 전에 관람한 ‘사랑과 영혼’ 이상으로 나의 양 볼을 눈물바다로 만든 작품이었다.
주인공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구두 닦기 청년에 불과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가족을 사랑한 평범한 가장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학도병에 강제 징집된 동생을 구하기 위해 함께 입영한다.
태극무공훈장을 받으면 동생을 제대시켜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상관의 약속을 믿고 목숨을 건 전투에 참가했지만 그 약속은 후퇴 작전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오히려 새로 부임한 상관은 개인적인 약속은 있을 수 없다며 명령 불복종한 동생을 가둔 창고를 소각시킨다.
검은 재로 변한 창고에서 불에 그을린 시체와 동생의 만년필을 발견한 주인공. 설상가상으로 반공 청년단은 주인공의 사랑하는 약혼자마저 처형시킨다.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하루살이 같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인민회의에 참석했다는 이유에서다. 배신감과 충격을 받은 주인공은 공산군으로 전향하여 피의 복수를 한다.
한편, 소각직전 창고에서 탈출해 살아난 동생은 국군의 공산군 섬멸 작전 소식을 듣고 형을 구하기 위해 적진 속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동생이 사망한 줄 알고 있는 주인공은 동생을 알아보지 못하고 총부리를 겨누며 격투를 벌인다.
다행히 동생의 존재를 확인한 주인공은 목숨처럼 아끼던 동생이 무사히 남쪽으로 탈출할 수 있도록 공산군을 향해 총알을 난사하다가 생의 최후를 마감한다.
흔히들 6. 25 전쟁을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라 일컫는다. 권력에 눈이 먼 지도자들이 이념의 분쟁을 일으킨 탓으로 어린 학생들과 젊은 남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전쟁터로 끌려나가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누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6. 25 사변이 일어나기 12일 전에 인천 만수동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생후 16일이 되던 날 부친을 잃었다. 어이없게도 부친은 국군의 총탄을 맞고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그 군인은 자신이 군에 불려간 사이 부인이 가출하도록 외간 남자를 소개시켜 준 사람이 자전거포 주인이었다는 소문을 듣고 나의 부친을 찾아왔다. 당시 나의 부친을 만수동에서 자전거포를 하고 있었지만 그가 찾는 또 다른 자전거포 주인은 이미 피난을 간 후 이었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하소연했지만 복수의 칼날을 세운 군인은 나의 부친을 주원 고개로 끌고 나와 방아쇠를 당겼다.6.25 사변이 나자마자 가족과 친지들이 부친에게 피난을 권했지만 ‘전쟁은 군인들끼리 하는 것이지 설마 선량한 백성을 죽이겠느냐’며 만수동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게다가 2년 후인 1952년 6월 4일, 학도병이었던 삼촌의 전사 소식이 전해져 왔다.
지금도 나는 해병 8089부대 1068부대 3중대 3소대 김승덕 소대장이 보낸 빛 바랜 편지를 가끔 꺼내 보곤 한다. 그 때마다 지뢰를 밟고 병상에서 고통을 삼키던 삼촌의 신음소리가 귓전을 맴도는 듯 하다.
전쟁으로 인해 누가 덕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의사들이 모두 피난을 떠난 탓으로 생후 3일만에 발병한 관절염을 치료받지 못해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다.
부친과 삼촌을 한 번에 잃은 나는 농촌의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동생을 먼저 졸업시키기 위해 홀어머니의 농사일을 도우며 8년 만에 대학을 졸업해야 하는 등 헤아릴 수 없는 시련을 겪어야 하는 피해자가 되었다. 가슴속 깊이 한 맺힌 내 인생을 그 누가 보상해 주겠는가.
이런 사연으로 ‘태극기 휘날리며’를 관람하던 나의 두 볼엔 그 누구보다 더 뜨거운 눈물이 홍수를 이루었는지 모른다. 강대국의 나눠먹기 식 전쟁놀이, 그 강대국을 등에 업고 권력을 쟁탈하기 위한 동족상잔은 더 이상 인류 역사에서 사라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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