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심을 멍들게 하는 것들

2011-08-19     의약뉴스
흔히들 속세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수단으로 농사를 상상한다. 야박한 인심과는 거리가 먼 순박한 시골에서 이런저런 간섭을 받지 않으며 노력하는 만큼 수확을 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세상인심이 변한 만큼 농사를 짓는 일도 녹록치 않게 되었다.

공휴일, 활터에 나가면 사원(射員)의 대부분이 농민이기 때문에 영농 자문을 구한다.

나는 농약을 뿌려도 해충의 피해를 막을 수 없다며 ‘무농약’의 비결을 묻곤 한다.

그들은 순진하게 그 말을 믿느냐며, 자기 가족들이 먹을 채소는 상품성이 떨어져도 상관없어 수확하기 며칠 전부터 농약을 살포하지 않지만 판매용은 외양을 우선하기 때문에 출하하는 날까지 농약을 뿌리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농작물을 식탁에 올리기 위해 주말농장과 텃밭에 농사를 짓는가 보다.

수년 전, 토지 보상금으로 농지를 매입했다. 물려받은 농지는 조상님들의 것이니 보관하고 있다가 자손들에게 물려주고 이승을 하직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매입한 농지는 주택가 주변이어서 생활 쓰레기와 건축 폐기물 투기를 막기 위해 철망으로 담장을 치고 장마를 대비해 배수로 공사를 해야 했다.

파란만장한 작업 과정을 거친 후 봄이 되자 묘목을 심을 수 있었다.

묘종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벚나무로 정했다. 선산을 관리하는 종친회에서 거래해 온 업자를 소개해 주었고 그들이 벚나무를 추천해 주었기 때문이다.

묘목가게 여주인은 벚나무를 추천하며 “키워 놓으면 없어서 못 판다”고 호언장담했다.

그 말을 믿고 모든 작업을 그들에게 맡긴 것이 잘못이었다.

굴착기로 땅을 파 뒤집고 덩어리 흙을 잘게 고른 후 묘목을 심어야 하는데 그들은 굴착기 기사와 인부들의 일정에 맞춰야 한다며 땅을 파 엎자마자 큰 흙덩이 사이에 묘목을 꽂다시피 했다.

게다가 묘목을 심는 순간 즉시 물을 공급해야 함에도 물을 실러 간 살수차는 매 번 함흥차사이고, 인부들은 간식 때가 되면 아예 손을 놓고 있어 밤늦게야 겨우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묘목 500주는 굵기가 손가락 중 약지만도 못하게 부실한데 가격은 시중가의 두 배나 되어 그 이유를 물으니 인건비 등 모든 비용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훗날 청구서에는 묘목에 포함되었다던 인부들의 인건비가 또 청구되어 있었다.

소나무는 대량 재배 시 토질이 적합한가를 확인하기 위해 시험용으로 저렴하고 작은 묘목을 몇 주 주문했는데 그들은 매상을 올리기 위해 4배나 비싼 큰 나무를 14주나 심고 만 원 짜리 묘목은 겨우 4주를 심었으면서도 10주 값을 청구했다.

어이없는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농약을 뿌려도 벚나무 가지에 거미줄이 걸리고 잎이 고사한다고 하소연을 했으나 괜찮다고 한다. 하지만 단순한 거미줄이 아니라 무서운 해충이란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영양제를 탄 농약을 줘야 한다며 700여 평의 땅에 불과 몇 분 정도 고압 분무기로 허공을 향해 대충 뿌렸을 뿐인데 20만 원이나 요구했다.

정작 장마 후 송충이를 박멸하기 위해 농약을 뿌려달라고 요구했을 땐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다.

결국 벚나무 500주의 절반은 고사했다. 빈자리에 새로운 묘목을 심어도 또 죽어 땅을 깊이 파보니 매립 당시 바위만한 돌까지 묻어 이를 일일이 파내느라 고생을 해야 했다.

삼년이 지나 제법 보기 좋게 자란 벚나무를 판매하려 문의하니 애당초 심을 때 “없어서 못 판다”는 말과는 달리 인건비 등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손사래를 친다.

듬성듬성 남아있는 벚나무를 한 쪽으로 옮겨 심고 각종 과일나무를 심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과실수를 키웠더라면 따먹는 재미라도 있었을 것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니 사농공상(士農工商)이니 하며 농업을 중시하던 시절은 옛말이 되었고 요즘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이 되었다. 농사를 지을수록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삿속에 빠져 농심을 멍들이는 묘목 판매상들의 작태는 태풍 피해 이상으로 농업 발전을 저해시키는 큰 요인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