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생모는 떠나고 계모와 생활하다
나의 생모는 내 나이 만 3살 때 젖먹이 남동생을 업고 집을 나가셨다.
아버지가 첩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인자하기 그지 없으셨던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그런 황당한 일을 기꺼이 허용 하셨는지,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술 더 떠서 할아버지 왈“ 큰 며느리는 밥하고 작은 며느리는 국하면 좋겠네”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이상하게 아주 어린 아이때에 있었던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외가집에서 난리가 났다. 외할머니와 이모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야단을 치고 법석을 한동안 치더니 어머니는 이내 이혼 수속을 밟고는 집을 나가 버렸다.
나와 누나는 집에 놔두고 오직 핏덩이 젖먹이 동생만 들쳐 업고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아! 애닳프다.
포목 장사하시는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들하고 살았을 때는 참으로 행복 했었는데~~
그 두 서너살 때 어린 나이였는데도 나는 음악적 소질이 있었나 보다. 고모가 가르쳐 준 노래를 나는 아주 잘 부를 수 있었다.
도라지 캐러간 바구니 속에
나리꽃 그 꽃이 왠일인가요.
라라라 라라라 라라라라라
나리꽃 그 꽃이 왠일인가요.
하고 멋들어지게 한곡을 뽑으면, 온 식구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고 했는데~
그 어린 나이에~
어머니께서 나에게 고쟁이 바지를 입히는게 아닌가, 여름에는 고추가 축 늘어져 고쟁이 사이로 그것이 나왔다 들어갔다 영 체면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나의 수치심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때의 수치심은 지금도 선명하다. 하여튼 어머니가 뛰쳐나가자 나는 계모 밑에서 눈치 밥 먹고 살아야 했으니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계모 눈칫밥 신세가 되어 내 인생 망가지는가 싶었는데 때마침 6.25전쟁이 터졌다. 아버지는 계모만 데리고 남쪽으로 줄행랑을 쳐 버렸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고모네 식구들과 함께 살게 되었으니 계모 눈칫밥 신세는 간신히 면하게 되었다.
인자하신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극진히도 사랑 하셨고,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셨다. 가끔 할아버지께서는 긴 한 숨을 내쉬시며 하시는 말씀이 네 에비는 비정한 사람이란다. 하시며 나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시곤 하셨다.
인정 많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어쩌면 그렇게도 정반대의 성품을 타고 나셨는지?
할아버지께서는 샌님처럼 조용 하셨고, 그 분의 아버님, 그러니까 나에게는 증조할아버지를 무척이나 흠모 하셨다.
증조할어버지께서는 할아버지 나이 3살 때 증조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생홀아비 생활을 돌아가실 때까지 하셨고 오직 할아버지를 돌보는데만 정성을 다하셨단다.
마을 학당 훈장을 하셨는데 이웃 친지들이 재혼을 권하였으나, 당신께서는 우리 아들 녀석 불쌍해서 안된다며 어르신께서 만년 홀아비로 지조를 지키시며 나의 할아버지만을 정성으로 돌보셨단다.
나의 아버지는 한마디로 난봉꾼이요, 풍류객이었다.
친구들은 얼마나 많은지~
사랑방에 매일 저녁 술상 차려 놓고 그 시절의 술상 풍속을 대표 하는듯이 젓가락으로 상머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고, 돌아가면서까지 불러 재끼는데, 동네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동네가 다 떠내려 가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첩을 데리고 들어와서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 하는 것도 잊지 않았겠다.
친구들은 꽤나 부러워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성품이 증조할아버지나 할아버지와는 그렇게도 정반대로 닮으셨는지...
할아버지께서는 측은지심으로 손주인 나를 끔찍이도 잘 보살펴 주셨다.
추운 겨울에 행여 감기라도 들을까봐 한방울의 찬 공기도 침투하지 못하도록 이브자리를 내 목까지 꼭꼭 눌러 덮어주시니까 나는 금방 콧망울에 땀방울이 송송 맺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늘 “아들, 딸 낳고 쫓겨난 못난이”라 하며 나의 어머니를 흉보곤 하였으며, 그럴 때마다 엄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곤 하였다.
아! 불쌍한 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디에 계실까? 어머니를 생각하면 갑자기 가슴이 쪼개지는 것처럼 아렸고, 아팠다.
한달 동안 찾아 헤맨 끝에 어머니를 찾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소사 신앙촌에서 조금 떨어진 폐 농가 오두막에서 살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머니께서 살고 계신다는 황량한 벌판 속에 처 박혀 있는 아주 작고 허름한 오두막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방 하나 부엌 하나 방의 남쪽을 향한 작은 유리창 너머로 저녁 햇살이 기어들고 있었고, 그 옆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두손 모아 기도 하는 사진이 걸렸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주위에는 환한 불빛 같은 것이 둥그렇게 빛나고 있었다.
아! 찾았다. 여기가 맞아! 나는 육감으로 이곳이 나의 어머니의 집, 어머니의 냄새가 뭉클 풍겨나는 어머니의 은신처라는 것을 직감 할 수 있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가난한 자에 복이 있나니라 하셨는데 왜 이리로 시련을 주십니까? 기도가 아닌 절규였다.
새까만 얼굴의 소년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나의 동생이었다.
어머니가 업고 어디론가 사라지셨던 그 젖먹이가 이렇게 커서 소년이 되었던가?
동생도 금방 알아 보고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나는 동생을 보고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라 멍청히 어리둥절해 있었다.
나는 대뜸 어머니 어디 계시냐? 물었다.
성전에 가셨단다.
어머니는 신앙촌 상품 장사 하시다 보증금까지 다 까먹고, 신앙촌에서 쫓겨났음에도 사교에서 헤어나지 못하시고, 성전에는 그래도 열심히 다니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오실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는 말에 나는 벌판 언덕길로 나아갔다.
초겨울 바람은 건조한 흙먼지만 희뿌옇게 흩날리고 있었다. 벌판을 기억자로 가로지른신작로를 따라 저 멀리 한 여인이 이쪽을 향해 나풀나풀 걸어오고 있었다. 아! 엄마다. 나의 가슴은 유조선 엔진 피스톤처럼 뛰기 시작했다.
몇년만에 보는 어머니인가! 12년전이었던가!
6.25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첩과 남쪽 지방 대구인지 어디로 피난 갔고, 나의 어머니께선 걱정되어 외할아버지를 시켜 나와 누나를 충남 덕산 친정으로 데려오라 하였었다.
외할아버지는 키가 크고 골격이 장건 하신 분이었는데 지게 위에 큰 삼태기를 얹고 오셨다. 친 할아버지도 손자손녀의 안전이 걱정 되셨는지 쾌히 승낙하셔서 우리 두남매는 엄마를 만나러 외할아버지와 함께 피난 길에 올랐다.
나는 외할아버지의 지게 삼태기 위에 실렸고, 누나는 걸었다. 전쟁 초입이어서 인천 가는 화물 열차에 탔는데 피난민이 인산인해였다.
화물칸은 물론이고 기차의 지붕에도 입추의 여지없이 피난민으로 꽉 차 있었다.
외할아버지께서 사주신 주먹밥이 신기하기도 하고 얼마나 맛있는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크기가 어린 나의 주먹만 하였는데, 밥을 뭉친 겉에다가 깨소금을 뿌리고 참기름을 발라 반짝 빛나는 주먹밥은 지금의 맥도날드 햄버거는 저리가라였다.
우리 일행이 두어시간 걸려 하인천에 도착하고 보니 기차 연기에 끄을려서인지 할아버지, 누나 그리고 나 모두 콧구멍을 중심으로 얼굴이 까맣게 변해 있었다.
우리는 통통배를 기다리며 희뿌연 바닷가 돌 제방위에서 게 새끼들이 돌사이 구멍으로 잽싸게 이리 숨고 저리 숨는 모습을 보며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었다.
밤이 되자 우리는 조심스럽게 통통 배에 올랐다.
배가 통통통 소리 내며 밤안개를 뚫고 바다로 나갔다.
선실 안에는 스물대여섯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모두 다 무슨 근심 걱정이 있는지 긴장된 눈만 껌벅이고 있었다.
배는 밤새도록 달려 지금의 태안반도 어느 해안가에 닿았다. 벌써 이른 아침이었다.
일행이 넓은 길로 접어들었는데 갑자기 쌕쌕이 비행기가 우리가 있는 길 위쪽으로 급 하강 하더니 기관총을 따따따탕 콩 볶듯이 공격을 하지 않는가?
피난민들은 길옆으로 피해서 모두 땅에 엎드렸다. 두 대의 비행기였는데 한 놈의 사격이 끝나고 앞쪽으로 하늘 높이 날아오르면 다른 놈이 교대로 뒤에서부터 내리 꽂으며 따르르르, 계속 몇 바퀴를 돌더니 거짓말처럼 저 멀리 하늘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다행이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어 모두들 안심의 한숨을 쉬었다.
6.25 전쟁 덕분에 우리 남매는 드디어 어머니 가출 후 2년만에 진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본래 말을 잘 하지 않는 성품이셨다.
마음속으로만 생각할 뿐 겉으로는 표현을 잘 하지 않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아도 어머니에 대한 살가운 기억은 안 나지만 평화로운 덕산의 농촌 마을의 분위기는 나의 마음을 달콤하게 녹여 주었으며,
특히 외가집 삼촌들과 마을 사람들은 우리 남매만 보면 괜히 웃으면서 반겨 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역시 어린 동생을 업고 다니셨는데 머리에 떡모판을 얻고는 어디론가 멀리 떠나셨다가 밤늦게 돌아오시곤 했다.
어떤 때에는 감을 머리에 이고 동생은 등 뒤에 업고 어디론가 다니셨다. 어떤 감은 완전히 다 안 익었는지 쌀독 속에 얹어 두었는데 몇일 후에는 파란 감이 노랗게 변하고 어머니는 그 감을 모판의 다른 감들과 섞어서는 또 어디론가 출타를 하시는 것이었다.
노랗고 예쁜 감 나 하나 줄만도 한데 어머니는 한번도 나에게 그 감을 주시지 않았다.
하루는 어머니가 동생만 업고, 장사 나가는데 나도 따라 가고 싶어 어머니 치마 자락을 잡고, 매달리는데 엄마는 울부짖는 나를 뿌리치고 저 멀리 사라지셨다.
나는 울다 지쳐 잠들어 있었다. 꽤나 긴 시간이 지났는지 조용히 어머니께서 돌아오셨나 보다. 뜨거운 물방울이 나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의 얼굴 위에서 울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뜨거운 눈물,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미안했다. 아침에 괜히 심술을 부려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지금 회상해 보니 어머니는 전쟁 중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떡장사도 하고 감장사도 하며 우리 남매를 먹여 살리려고 혼자서 고군분투를 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9월28일 서울 수복이었다.
공산당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어머니는 우리 남매를 다시 시집으로 복구 시키셨으므로 그 이후로 어머니와는 또 기나긴 이별이 계속되었으며 나는 지금 이 순간 12년만에 어머니를 만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