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다발성경화증
자고 일어 나니 사지 마비가 된 여성이 있다.
물론 전조 증상이 있었다. 하지만 2001년 1월 31일을 잊을 수 없다.
그날 부터 사지마비가 됐기 때문이다. 김현주씨(35)는 사지마비가 오기 한달전 부터 등이 많이 아프다는 것을 느꼈다. 어떤 때는 감각이 없는 것 같기도 했고 몸도 예전처럼 활력이 없었다.
어느 날인가는 아침에 일어나면 소변을 봐야 하는데 저녁때까지 화장실을 가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1월 31일 밤 10시가 왔고 다음날 부터 김씨는 제 스스로 걷지 못하는 휠체어 인생이 됐다.
건강이라면 자신했던 그녀, 자고 일어나니 휠체어 위에
등이 제살같지가 않았다.
꼭 남의 살이 등이 붙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제 스스로 걷는 것은 물론 일어서지도 못했고 팔다리를 마음대로 휘두르지도 못했다. 김씨는 말했다.
" 발병이 있기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어요. 직장을 옮기는 문제도 있었고 아버지와 별 것 아닌 것 같고 심한 의견차가 있었지요. 또 병원에서 방사선사로 일했으니 방사선 노출이 원인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
하지만 하루 아침에 사지마비 환자가 됐다는 것을 설명하기 힘들었다.
자신보다 훨씬 더 오래 근무한 동료 방사선사 가운데 자신과 같은 증세를 보였거나 보이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이런 스트레스와 근무여건이 위험인자에 기름을 부은 것으로 판단했다.
극심한 스트레스 오랜 방사선사 근무 발병원인 의심하기도
어쨋든 그날 이후 김씨는 건강했던 여성에서 하루아침에 휠체어 인생이 됐다. 늙은 어머니가 병수발을 들고 화장실을 따라 다니고 밥을 먹여 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술 담배를 피했고 방탕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감기한 번 걸리지 않을 정도로 건강에는 자신했던 그녀 였기에 충격은 컸다. 왜 이런 끔찍한 일이 자신에게 왔는지 하루에도 여러번 자문해 봤지만 집히는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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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주씨. 오래전에 찍은 사진이다. 김씨는 현재 발가락만 조금 움직일 수 있는 상태이지만 재활에 대한 희망으로 활기찬 하루를 보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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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했고 건전했으며 활력 넘쳤던 그녀에게 감당 못할 고통이
김씨는 잠다가 깨면 울었다. 대소변을 엄마가 받아 줘야 하는 현실은 죽음으로써 벗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진 것이 목숨이라고 김씨는 어떻게 해서든 이 위기를 극복해 내려고 애썼다.
자신이 근무하던 충북 청주의 병원 원장은 일반외과 출신으로 신경외과가 전공이 아니었다. 따라서 김씨의 병명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항생제나 진통제 등을 처방했고 김씨는 그렇게 하루 하루를 보냈다.
병명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예전 처럼 건강한 몸으로 돌아 올 것으로 믿었다.
병세는 좋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몇 개월 간의 재활 치료로 난간을 잡고 일어서거나 걷는데 도움을 주는 의료기기인 워커를 이용하면 몇 발짝씩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녀는 용기를 냈다.
그러나 그해 4월 병균은 다시 그녀의 온몸에 침입했다.
재발된 것이다. 특히 다리 부분에 집중됐다.그래서 워커를 이용해 걷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다시 사지를 엄마에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이번에는 동네병원이 아닌 충남대병원으로 옮겼고 거기서 다발성경화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김씨는 " 병명을 들었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병명을 알았으니 치료법도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눈에도 침범, 절망했으나 의지로 극복해 내고
고용량의 스테로이드가 처방됐다. 5-7일간 집중적인 치료를 받으니 조금 몸에 힘이 돌아왔다. 다시 4개월 정도 집중적인 재활치료를 받았다. 그런 와중에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정밀진단을 받았다.
서울대 신경과 김광우 교수는 혹시 휴그렌 등 다른 자가면역질환은 아닌가 하고 이것저것 한달에 걸쳐 많은 검사를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다발성경화증을 확진했다. 이때도 김씨는 내가 진짜 죽나? 하는 의구심 같은 것이 들지 않았다고 했다.
지루한 재활치료를 다시 4개월 쯤 받았다.
그런데 12월 이번에는 눈으로 재발이 왔다. 달력을 보면 숫자가 건너 띄어서 보이기 시작했다. 실명까지 오면 정말 죽어야 하는 구나 하고 김씨는 당시 상황을 기억해 냈다. 걷지도 못하는데 실명까지 오면 삶의 끈을 잡고 있기에 너무 힘들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씨는 용기를 냈다. 당시 레지던트는 "걱정마라, 실명은 없다"고 안심시켰고 다행히 고용량 스테로이드로 병마는 물러갔다. 이후 7년간 급작스런 재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김씨는 사지의 힘이 많이 약해져 있어 재발이 왔을 당시 처럼 제 스스로 걷거나 움직 일 수 없다.
팔도 제대로 움직이는 것이 힘들다. 아무리 재활을 해도 일어 설수 없게 된 것이다. 발의 신경은 거의 다 죽어 지금은 발가락만 조금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지금은 국립암센터에 다니고 있다.
아버지와 화해 하고 희망의 꿈을 움켜 쥐다
의사들은 의학적으로 죽은 신경을 되살릴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자꾸 열심히 운동하고 꾸준히 하면 좋아질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김씨는 "머리는 멀쩡해요" 하고 웃었다. 오랜 병마로 김씨는 시집가기 위해 벌어논 3,000만원을 다 까먹었다. 지금 그녀는 1종 수급권자로 보험혜택을 받고 있다. 하지만 약값 40만원은 비보험이라 고스란히 들어간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이라 힘이 든다. 하지만 김현주씨는 재발할 때보다도 훨씬 더 활발하고 쾌활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대전에 있는 오빠네에 있으면서 귀여운 조카들의 공부를 봐주기도 하고 독서도 하고 컴퓨터도 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 아버지 하고 화해 했느냐고요? 벌써 했지요. 아빠도 아마 딸이 아프고 나서 커다란 심적 고통을 받고 계세요. 제가 효도 해야 지요. 엄마 등골 빼먹는 딸이 아니라 기쁨 주는 딸이 되고 싶어요."
김씨는 웃었고 그 웃음 속에서 희망의 싹이 움터 났다. '신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에게 시련을 준다'고 했던가. 김씨가 건강한 몸으로 재활에 성공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