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찾는 치유의 음악
재일동포가수 이정미
노래가 몸을 울리고 나오는 이상, 그 몸이 겪은 인생의 고난을 통해 도달해 있는 수준에 따라 감동의 크기도 달라지지 않을까? 이정미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엄청난 노래의 힘을 느꼈고 거기서 느끼는 감동의 차원은 여타의 노래와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해온 부모님에게서 1958년 태어난 이정미는 고물상을 경영하는 7남매의 막내였다. 고물상집 딸이라는 콤플렉스를 벗어나기 위해 성악가가 되어 상류사회로 진출할 꿈을 꾸었다.
일본사회의 한국인의 차별 때문에 한국인의 이름으로 학교를 다니기가 힘들었을 때도 이정미는 자신의 한국인 이름을 고수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음대에 진학해 성악을 전공할 당시 한국에서는 광주사태가 일어났다.
끔찍한 현장을 TV로 보며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 구명 집회 등에 참석해 ‘아침이슬’ 등 한국 포크를 처음 접했다. 그 인연으로 1986년 김민기 노래 13곡을 모은 카세트 음반 ‘김민기를 부른다’를 발간했다.
그 때부터 그녀는 자신이 지향하는 음악세계가 과연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대에서 노래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해 1988년 28세 때 노래를 그만두게 된다.
서른 살 때 고층빌딩 유리를 닦으면서 체험한 노동의 기쁨 속에서 그녀는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가 다시 노래의 강렬한 욕구를 느꼈을 때는 1994년 일본의 저명 시인 야마오 산세이(山尾三省)의 시 ‘기도’를 들으면서부터였다.
이정미는 “약사여래에게 만인의 아픔을 치유할 것을 청하는 그 시를 듣는 순간 처음으로 노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온 마음을 채웠다”고 털어놓았다.
이때부터 이정미는 내면에서 저절로 차올라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작사 작곡을 해나갔다. 이런 노래를 들고 1996년부터 그녀는 공공기관 주최의 행사, 각종 집회, 지방의 초등학교 등에서 1년에 100회 이상 공연을 펼치는 활동을 해왔다.
이렇게 이정미는 음악전공과정을 통해 훈련된 목소리를 얻었고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는 방황을 통해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됐다. 이런 과정에서 다시 태어난 그녀의 노래는 가사에서는 화합과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있고 소리에는 긍정과 치유의 기운이 가득하게 됐다.
이런 느낌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요소는 노래가 실리는 리듬이다. 마치 산들바람을 타듯 부드럽고 느리게 움직이는 리듬을 타고 그녀의 노래를 따라가다 보면 평온한 기운이 가득 찬 따뜻하고 아름다운 내면의 동산에 도달해 있는 우리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2003년 7월 초 이정미는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한국 최초의 단독공연을 가졌다. 공연 전반부에서 자신의 대표적인 곡들을 쏟아부었다. 첫 곡 ‘나는 노래한다’는 이정미의 주제가라 볼 수 있는 곡이다.
세 번째로 노래한 ‘케이세이센’은 그녀의 고향을 지나는 전철을 말하는데 그녀가 살아왔던,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을 노래한다. 공연에 참가한 기타연주자 야노 토시히로의 만돌린 연주가 훌륭하다.
중반부의 ‘먼 길’은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찾는 길을 꿋꿋이 헤쳐나감을 다짐한다. 다른 곡들과는 달리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의 곡인데 연주의 역량이 총동원되어 절정을 이룬다.
이정미의 공연을 보면서 또 하나 놀란 점은 일본 대중음악의 역사는 오래되고 포크도 한국보다 먼저 시작했지만 일본사회가 지니는 독특한 보수성 때문에 자아성찰적, 비판적 포크의 전통은 전반적으로 미약하다는 점이다.
이정미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은 느낌을 준다. 눈을 돌려 한국을 보면 과연 여자 통기타음악가수 중에 이정미 정도의 내공을 보여주는 가수가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아쉬운 느낌이 든다. 그녀가 제일동포라는 점에서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