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로 고치고 로봇으로 잇는다” 서울 폴리처학회, 난청 재활에 새 지평
38개국 630여 명 집결...노인 보청기 시범사업ㆍ청력보건법 촉구
[의약뉴스] 유전자 수준에서 난청의 근본 원인을 교정하는 첨단 치료제부터 달팽이관 손상을 극소화하는 로봇 인공와우, 나아가 청신경이 없는 환자의 뇌간을 직접 자극하는 청성뇌간이식(ABI)까지 난청 재활의 전 스펙트럼을 조망하는 국제 학술의 장이 서울에서 펼쳐졌다.
대한이과학회는 4일부터 7일까지 나흘간의 일정으로 서울 용산구 서울드래곤시티에서 ‘제35차 폴리처학회(Politzer 2026 Seoul)’를 개최했다.
폴리처학회는 근대 이과학의 기틀을 마련한 오스트리아 아담 폴리처(Adam Politzer) 교수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귀ㆍ청각ㆍ평형 분야 최고 권위의 국제학술대회다.
한국 개최는 지난 2005년 고(故) 김종선 교수가 유치한 25차 대회 이후 21년 만이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6일 학술대회 현장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글로벌 이과학 연구의 패러다임 전환과 함께, 초고령사회를 맞은 한국 사회가 시급히 풀어야 할 난청 정책 과제를 제시했다.
◆41개국 630여 명 참가 성황, “유전자치료, 가능성 넘어 표준화 논의”
이번 학술대회에는 41개국에서 634명의 등록자(해외 참가자 약 500명)가 참가했으며, 7개 세션 룸에서 총 97개 세션, 697편의 연제를 발표하는 등 성황을 이뤘다.
학술 프로그램의 핵심 축은 ▲유전자치료 ▲차세대 청각 임플란트(로봇ㆍ완전이식형) ▲인공지능(AI) 기반 진단ㆍ재활로 구성했다.
특히 주목받은 분야는 선천성 유전성 난청의 원인을 교정하는 유전자치료다.
이번 대회에서는 청각 신호 전달 단백질 결핍 질환인 오토펄린(OTOF) 유전자치료의 최신 임상 데이터와 글로벌 가이드라인이 중점적으로 다뤘다.
컬럼비아대 로렌스 러스티그 교수는 이중 AAV1 벡터 기반 OTOF 치료제(DB-OTO)를 투여받은 소아 24명을 48주 이상 장기 추적한 CHORD 임상을 통해 언어 발달 개선 효능을 입증했다고 발표했다.
상하이자오통대 연구팀의 내유모세포 타깃 신규 벡터(AAV-WM04) 소량 주입 임상과 푸단대 일라이 슈 교수가 주도한 ‘유전성 난청 유전자치료 국제 합의안(30개 항목)’도 공개했다.
문인석 학술위원장은 “2년 전 기획 당시만 해도 상용화 가능성에 물음표가 붙었던 유전자치료와 일체형 임플란트, AI 진단이 실제 임상 현장에 빠르게 진입하고 있다”며 “글로벌 석학들과 함께 최신 연구의 결실을 한국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됐다”고 소개했다.
◆“유전자치료 만능주의 경계해야” 인공와우와 공존ㆍ안전성 최우선
학회는 난청 유전자치료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지나친 낙관론이나 기존 재활 기기와의 대립 구도는 경계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최병윤 공보이사는 “안과 희귀질환 치료제 ‘럭스터나’의 경우 마땅한 대체 치료가 없어 빠르게 진입했지만, 난청은 이미 성공률과 만족도가 입증된 인공와우와 고성능 보청기가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며 “유전자치료가 기존 표준 치료인 인공와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훨씬 엄격한 기준과 안전성이 담보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난청 유발 유전자는 150~200개에 달하지만, 현재 인체 유효성이 확인된 것은 OTOF 단 1개뿐이며, 이 역시 미국 FDA에서 조건부인 가속 승인(accelerated approval) 단계”라며 “현재 보고된 최장 추적 기간은 2년~2년 반 수준에 불과하고, 완전 정상 청력이 아닌 보청기를 착용해야 하는 40dB 수준으로 개선되는 것이 평균 데이터”라고 한계를 분명히 했다.
또한 “최근 해외에서 AAV 바이러스 벡터 고용량 투여로 인한 간독성 사망 사례 등이 보고되며 안전성 이슈가 부각되고 있다”면서 “언어 발달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유전자치료만 기다리며 인공와우 수술을 미루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며, 두 치료는 환자 상태에 맞춰 결합하는 상생의 길로 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로봇ㆍ완전이식형 인공와우부터 뇌간 직접 자극하는 ABI까지
수술적 재활 분야에서는 잔존 청력을 보존하기 위한 정밀화 기술을 집중 조명했다.
베른대 카베르사초 교수의 키홀(Keyhole) 로봇 수술(HEARO)을 비롯해 초당 0.1mm의 초저속으로 전극을 삽입해 달팽이관 손상을 줄이는 로봇 기술, 전기와우도(ECochG) 기반의 실시간 모니터링 기법을 공유한 것.
수영이나 수면 중에도 24시간 청취가 가능하고 외부 노출에 따른 사회적 낙인을 없앤 완전이식형 인공와우(TICI)와 국내 기술로 개발된 32채널 인공와우 ‘설리번’의 초기 데이터도 이목을 끌었다.
달팽이관이나 청신경 형성 부전, 종양 손상으로 인공와우나 유전자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를 위한 청성뇌간이식(ABI) 임상 결과도 제시했다.
상하이자오통대 하오 우 교수는 비종양성 선천성 난청 소아 136명의 코호트 분석을 통해 조기 수술(3세 이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초고령사회 진입, 노인 보청기 지원은 복지 아닌 기본권”
학회는 이번 학술대회에서 논의한 첨단 의학의 혜택이 소수에게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국내 고령 난청인을 위한 보건 정책의 일대 전환을 촉구했다.
대한이과학회 박시내 회장은 “공부 잘하는 아이를 하버드에 보내는 첨단 연구도 중요하지만, 보통의 학생들을 대학에 진학시키는 보편적 교육처럼 기초 난청 재활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국가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학회에 따르면 국내 70대의 26.3%, 80대의 52.8%가 보청기가 필요한 중등도 이상 난청을 앓고 있으나, 착용률은 4.7%에 불과하다.
주된 원인은 비용 부담이다. 난청은 치매 유발의 대표적인 가역적 위험 인자로 지목되지만, 현행 건강보험 제도는 청각장애 등록자에 한해서만 보청기 급여를 지원해 초기ㆍ중등도 난청 노인들은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 있다는 것.
박 회장은 “난청을 방치해 발생하는 치매와 사회적 고립은 건보 재정과 국가 돌봄 체계에 막대한 부담을 준다”며 “단기적으로 건보 재정 외 지자체나 일반 회계 등을 연계한 ‘노인 보청기 지원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장기적으로는 생애주기 검진과 진단ㆍ재활을 포괄하는 ‘청력보건법’ 제정을 위해 국회 및 복지부와 긴밀히 소통하고 있다”고 전했다.
구자원 대회장(대한이비인후과학회 이사장)은 “이번 서울 대회 공식 슬로건은 ‘전 인류의 귀 건강을 위하여’”라며 “유전자치료와 로봇 등 최첨단 치료의 길을 개척함과 동시에, 보청기 한 대조차 쓰지 못하는 고령층까지 모두가 장벽 없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데 학회가 앞장서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