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험 필수의료 1440건ㆍ중과실 심의 가이드라인 첫 윤곽
대한의학회, 의료분쟁조정법 하위법령 연구 중간발표...12대 중과실 사례 84%가 ‘예외’
[의약뉴스] 내년 5월 시행을 앞둔 개정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의료분쟁조정법)’의 핵심 하위법령인 고위험 필수의료행위 목록과 12대 중과실 심의 가이드라인의 초안이 공개됐다.
대한의학회(회장 이진우)는 30일 대한의사협회 회관에서 개최한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에 따른 연구용역과제 중간결과 발표회’를 통해 고위험 필수의료행위 목록 선정안, 시행령 조문 구성안, 중대한 과실 심의 가이드라인, 불가항력 국가 보상 확대방안을 공개했다.
연구진이 수개월간 방대한 자료를 취합해 도출한 실증 분석 데이터를 공개한 가운데, 지정토론에서는 가이드라인의 법리적 충돌과 제도의 실효성을 둘러싼 격론이 이어졌다.
◆고위험 필수의료 1440여 건 압축, “목록 오르면 자동개시 덫” 딜레마
'고위험 필수의료행위 및 중과실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첫 번째 발표를 맡은 이용주 의료위원장(연세의대 소아과학교실)은 법정 요건을 임상적 지표로 전환한 ‘고위험 필수의료행위 목록 선정(안)’을 발표했다.
개정법 제2조 제9호는 중증ㆍ소아ㆍ응급ㆍ분만ㆍ외상 등 생명과 직결된 분야 중 지체 없는 의료적 개입이 필요하거나 난이도가 높은 의료행위를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위임했다.
연구진은 이를 1단계 법정 분야 요건, 2단계 전문진료질병군(AADRG/KDRG v4.7 A군) 및 응급중증도(KTAS) 1~2등급 충족 여부, 3단계 예외 소명의 3단계 틀로 구조화했다.
이용주 위원장은 학회 의견 조회를 거쳐 최종 1926행이 접수됐고, 동일 행위와 질환 단위를 정비해 총 1440여 건의 목록안을 도출했다고 밝혔다.
이 중 전문질병군과 KTAS 1ㆍ2등급 등 객관적 기준을 충족하는 비율은 90.4%에 달했다.
진료과별로는 흉부외과가 339건으로 가장 많았고 소아청소년과 319건, 내과 283건, 외과 230건, 응급의학과 186건 순으로 중환자 진료 비중이 높은 과에 집중됐다.
이 위원장은 “목록에 포함되면 기소제한 등 형사특례를 기대할 수 있지만, 동시에 개정법 제27조 제9항에 따라 분쟁조정 절차가 무조건 열리는 자동개시 대상이 된다”며 “목록이 너무 좁으면 현장 보호가 안 되고, 너무 넓히면 의사들이 매번 자동개시 분쟁에 휘말려 피곤해지는 양날의 칼이라 연구진과 학회 모두 극심한 딜레마를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의학회, 2년 주기 고시 개정안 제시
'고위험 필수의료행위 및 중과실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법리적 모순과 시행령 구성 방안을 조명한 박형욱 법률위원장(단국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의학회 부회장)은 특히 정부가 표방한 필수의료 보호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개정법상 기소제한 특례를 받으려면 고위험 행위 해당, 12개 중과실 부존재, 설명의무 이행, 책임보험 가입, 손해배상금 전액 지급이라는 5중 요건을 통과해야 한다”며 “임의적 형 감면 역시 기존 응급의료법 제63조가 단순히 중과실이 없을 때 판례로 감면하던 것에 비해 12개 중과실 배제와 설명의무, 보험 가입까지 덧씌워져 오히려 응급의료 종사자에게 요건이 대폭 가중됐다”고 지적했다.
법 체계상의 구조적 문제도 짚었다.
박 위원장은 “의료분쟁조정법상 고위험 행위는 필수의료특별법상 필수의료를 모법으로 두는데, 특별법상 필수의료는 복지부장관 고시로 정하게 돼 있다”며 “대통령령인 시행령의 범위가 하위 고시에 종속되는 기형적 입법”이라고 꼬집었다.
이 가운데 학회가 제출한 세부 술기들을 18~19개 대표 행위 범주로 압축한 뒤 두 가지 시행령 구성안을 제안했다.
시행령 본문에 19개 범주를 두고 구체적 목록은 복지부장관 고시로 위임해 2년마다 의무 개정하도록 규정하는 제1안과, 시행령 별표에 18개 범주의 구체적 목록을 직접 명시하는 제2안이다.
그는 “의료 현장의 의구심 때문에 현재 목록은 완벽할 수 없다”면서 “의료기술 발전과 현장 의견을 신속히 환류하고 의사ㆍ환자 등 이해관계인의 절차적 참여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복지부장관 고시로 위임하는 제1안으로 입법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2대 중과실 사례 777건 중 84%가 예외, 8단계 심의절차 정립
연구용역 총괄책임자인 대한의학회 김지홍 필수의료정책이사(연세의대 소아과학교실 교수)는 형사특례 배제 기준인 12대 중과실의 임상적 재해석과 심의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김 이사는 “선진국은 중과실을 법률에 일률적으로 열거하지 않고 추상적 규범과 판례에 맡기는데, 우리 법은 12개로 유형화해 버렸다”며 “이 유형들은 민사상 설명의무나 경과실까지 얽혀 있어, 법문 그대로 적용하면 필수의료를 살리겠다는 법 취지가 무색해질 수 있다”고 전제했다.
이 가운데 연구진이 26개 학회로부터 수집한 777건의 임상 현장 사례를 분석한 결과, 중과실에 해당하지 않는 예외 사례가 654건으로 전체의 84.0%를 차지했다.
반면, 전형적인 중과실에 해당하는 사례는 123건(16.0%)에 그쳤다.
그는 “수집된 사례 10건 중 8건 이상은 겉보기엔 12개 유형처럼 보여도, 소아 암 수술 중 돌발 대량출혈로 사전 동의 범위를 넘어 혈관을 절제했거나 야간 당직 전문의 1명이 중환자 4명을 보느라 처치가 지연된 경우처럼 환자 구명을 위한 불가피한 재량이거나 시스템적 한계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사후적 결과 편향을 배제하고, 통상 수용되는 기초 진료지침을 기준으로 삼아 개인의 태만과 시스템적 한계(인력ㆍ장비 부족, 전원 불가)를 엄격히 분리 심사하는 ‘8단계 표준심사절차’와 위원용 실무 체크리스트를 정립했다.
이 가운데 김 이사는 “제7호부터 제9호까지의 단서 조항인 중대한 신체 손상의 법적 기준이 공백 상태여서 조속한 합의가 필요하다”며 “가이드라인을 지속해서 개정하는 완충 장치를 두되, 궁극적으로는 포괄적 개념주의로 법을 재개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무과실 국가 보상, 소아ㆍ응급 등 114개 행위로 확대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제도 고위험 필수의료행위 도입 연구'를 주제로 발제를 이어간 이순민 의료위원장은 기존 분만사고에 한정됐던 불가항력 의료사고 국가보상을 소아와 응급 등 고위험 필수의료 전반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위원장은 “최근 필수의료 현장에서는 불가항력적 사고임에도 10~16억 원대의 고액 민사 배상과 형사 유죄 판결이 이어지며 진료 인프라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면서 “과실 책임을 면제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의학의 한계로 인한 불가피한 위험을 국가가 사회적으로 분담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이 가운데 연구진은 전문가 델파이 분석을 거쳐 소아청소년과 28개, 외과 14개, 내과 10개, 신경외과 9개, 산부인과 8개, 응급의학과 6개 등 소아ㆍ응급 영역의 114개 후보 의료행위를 선별했다.
보상 한도는 분만사고와의 형평성을 감안해 사망 시 최대 1억 원, 중증장애 1억 5000만~3억 원, 경증장애 5000만~1억 원으로 차등화하는 안을 내놓았다.
아울러 안건 급증에 대비해 보상심의위원회를 기존 단일 11인 구조에서 공통위원 6인(복지부ㆍ조정위원ㆍ감정위원ㆍ소비자단체)에 분야별 전문 의료위원 5인(분만ㆍ소아ㆍ응급 Pool제)이 결합하는 형태로 전면 개편하는 안을 마련했다.
◆의협 “처벌 문턱 여전” vs 환자단체 “특례 자체로 진전”
이어진 패널 토의에서는 법안의 실효성과 보호 범위를 두고 격론이 오갔다.
대한의사협회 박명하 상근부회장은 연구진이 사후적 편향 배제와 시스템적 한계를 개인 과실과 분리한 점은 적극 지지하면서도, 법률 자체의 구조적 한계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아주대병원 소아응급센터 압수수색으로 의료계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고, 오늘 아침에도 경찰청 앞 1인 시위와 기자회견을 열었다”며 “현재 법안은 기소를 면하려면 고위험 행위여야 하고, 중과실이 없어야 하고, 10일 내 설명해야 하고, 보험 가입에 배상금 전액 지급까지 요구해 응급의료법보다 문턱이 훨씬 높다”고 지적했다.
이어 “목록에 오르는 순간 강제조정(자동개시)에 끌려가 분쟁이 폭증하는 구조로, 의료계가 연구에 참여한 것은 법에 찬성해서가 아니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며 “시행령에 심의 가이드라인 준수 근거를 명시하는 한편, 중과실을 포괄적 개념으로 바꾸고 전액 배상 조건과 자동개시 연동을 폐지하는 법 재개정 로드맵을 즉각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백경희 조정위원장은 법체계적 정합성에 한계를 지적했다.
백 위원장은 “형사특례가 적용되는 고위험 필수의료는 특별법상 필수의료보다 협소한 분자 개념이어야 하는데, 장관 고시와 대통령령 간의 층위 충돌이 발생하고 있다”며 “중증이라는 개념이 질환의 위험인지 악결과의 정도인지 명확한 기준 정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응급의료법 개정으로 응급환자 사망 시 필요적 면제 조항이 신설된 만큼 두 법률 간의 위계 조율과 다기관 합동 시뮬레이션도 제안했다.
반면 환자단체는 의료계의 시각을 경계하며 특례 도입 자체의 의미를 강조했다.
한국선천성심장병환우회 안상호 대표는 “환자가 크게 다치거나 사망해도 중과실이 없고 전액 배상하면 검사가 기소조차 못 하게 막아주는 형사특례는 의료인에게 대단히 큰 혜택”이라며 “환자에게 설명하고 자동차보험처럼 책임보험에 드는 것이 과도한 족쇄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실례로 “소비자원에 가면 원래 동의 없이도 조정이 개시되는데 자동개시를 덫이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 않다”며 "단 한 명의 필수의료 의사라도 형사처벌 위험에서 건질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첫걸음으로 평가하고 제도를 안착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중증질환연합회 채수장 이사는 환자의 치료받을 권리와 의료인 보호가 대립하지 않는다고 짚었다.
그는 “중증ㆍ암 환자에게 가장 절박한 권리는 병원에 갔을 때 나를 살려줄 의사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며 “의사들이 형사처벌이 두려워 현장을 떠나 진료 인프라가 붕괴하는 것 자체가 환자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권리 침해다. 필수 의료를 지키는 것과 환자 권리를 지키는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정부 측 패널로 참석한 보건복지부 한영규 의료기관정책과장은 연구진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며 현장 중심의 하위법령 제정을 약속했다.
한 과장은 “소송으로 인한 소모적 대립을 줄이고 필수의료진의 형사 부담 완화와 환자의 신속 구제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것이 입법 취지”라며 “의학회 연구를 통해 모호했던 고위험 행위 판정 기준과 중과실 심의 가이드라인, 불가항력 보상 기준을 매우 구체화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복지부가 의료사고심의위원회 구성, 수사기관 출석 조사 자제 요청권 구체화, 중재원 감정 기능 확대, 책임보험 도입 등 종합적인 제도 패키지를 준비 중이라며 “의료계와 환자단체가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안전한 의료환경을 만들기 위해 하위법령 제정 과정에서 지속해서 의견을 수렴해 큰 그림을 제시하겠다”고 전했다.
한편, 대한의학회는 이번 공청회에서 수렴된 각계 의견과 추가 조사를 거쳐 다음달 중순 행위 목록과 심의 가이드라인을 최종 확정하고, 보건복지부와 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최종 연구용역 보고서를 제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