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떠나기전 하선은 외할머니에게 작별을 고했다

2026-10-28     의약뉴스 이순 기자

[의약뉴스]

구. 백아는 10년 넘게 영어공부 중이다. 회화나 독해가 어느 정도인지 승길은 알지 못한다. 10년 1만 시간의 법칙만 기억할 뿐. 비틀즈는 아니어도 노래방 실력 정도는 기대하고 있다.

기대만 있을 뿐 오늘도 또 깜박했다. 월요일은 영어 가는 날이라는 걸.

"너무 무심한 거 아냐?"

백아가 쏘아붙였다. 승길은 머쓱했고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다음 주 월요일은 달라져야지. 영어 잘 갔다 와. 이런 말을 해줘야지.' 그러면 백아는 좋아할 것이다. 무슨 날이든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은 관심의 증거라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 백아가 목동 언니와 점심 약속을 했다. 사십 넘은 아들이 늦장가를 갔다고 했다. 어쩌면 사전에 연락도 안 했을까. 백아는 영어반 언니가 야속했지만 이해할만 했다.

"남에게 신세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거든. 점심 사주려고. 그냥 넘어갈 순 없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언니하고는 각별하거든. 그리고 들어봐야지. 결혼 성공담 같은 거."

결혼이라는 말을 할 때 백아는 민혁을 떠올렸다. '아들은 언제 가려나.' 가고 싶은데 짝이 나오지 않고 있다. 소개팅은 여러 번 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민혁은 미주알고주알 제 엄마에게 하루 일상을 보고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

엄친아, 그보다 더한가. 그럼 엄마 껌딱지 정도. 입이 무거운 것이 자고로 남자의 일이거를. 첫 만남부터 데이트 장소까지 속속들이 말한다. 그건 그만큼 가고 싶다는 증거라고 언젠가 백아가 말한 적이 있다.

갈 때도 됐다. 승길의 마음도 착잡했다. ‘꽃가마는 아니더라도 예쁘게 차린 신부를 맞을 때도 됐는데, 29살이면.’

"어, 급한 건 아는데 잠깐 봐줄 수 있어?"

승길이 나가려는 백아를 붙잡는다. 다음 호를 써야 하는데 영 진도가 안나간다. 한 마디 들으면 일사천리로 죽죽 풀릴 것 같다. 

"그럼 딱 10분만."

백아가 주저 앉는다. 그리고는 긴 한 숨소리. 핸드폰을 보니 정확히 10분. 그러면 몇 장 읽었나? 승길은 마저 읽어 주지 않는 백아가 야속하다. 그깟 약속 조금 더 늦으면 어디가 어때서.

하지만 그것만도 어디인가. 승길은 백아의 입을 쳐다본다. 읽었으면 어서 평을 하라는 듯이. 백아는 야무지게 입술을 오무린다. 해야 할 말을 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결국, 군대 얘기군. 재미없어. 안 팔려, 안 뽑아. 응모해봤자 최종심은커녕 언급도 안 된다고.”

백아가 이번엔 짜게 나왔다. 짠 정도가 아니다. 대차게 나온다. 그녀는 신인 다운 패기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신인이라는 말,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60 나이에 신인이라. 어쨌든 착한 그녀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나. 그건 백아 잘못이 아니다. 전적으로 승길의 문제다.

“새로운 게 있어야지. 군대 얘기는 80년대나 먹혀. 축구는 안 해?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

‘왜 안 하겠어, 해야지. 다음 장면에 준비하고 있었거든. 그건 두고두고 우려먹을 거야.’ 승길은 대들려는 마음을 억지로 참았다.

여기서 싸우면 대화는 끝이다.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니 일단 들어보자, 다음 말을. 다 듣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말을 자르면 참았던 화가 터질지도 몰랐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다.

'더구나 내 딴에는 제법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거든. 기대가 실망으로 갔을 때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면 소인배가 아니겠어?‘ 그래서 단전에 힘을 주면서 억지 미소를 지었다. ‘썩소’, 라고나 할까.

“나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어. 자꾸 배가 산으로 가는데 자를 수가 없네. 방향타를 어디로 돌려야 할지 감이 안와. 알고 있으면서도 못하는 이 심정 오죽하겠어?”

마음속과는 다른 말이 나왔다.

“뻔한 주제니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지만 내겐 소중한 삼대 이야기거든. 거기엔 인간의 생로병사가 담겨 있어. 다른 사람에겐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럼 일기장에나 적으라고? 그러기엔 경험이, 남들 안 한 경험이 많고...”

백아가 미안한지 한동안 원고에만 신경을 쓴다. 시간을 마땅히 더 투자해도 된다는 듯이.

“그래서 싹 지우고 다시 쓰라고? 벌써 이만큼 왔는데.”

“그러게 내가 아우트라인을 정하고 하라 했지. 마구 생각나는 대로 자판을 두드리면 결론을 내지 못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느냐고? 새로운 게 필요해. 참신한 것. 예를 들면 뭐, 한국신화와 현실이 접목된 거라든가. 뭐, 아무튼 남이 안 쓴게 필요해. 그게 뭔데, 라고 묻지 마. 나도 몰라. 나도 모른다고.”

처음엔 괜찮다던 백아가 표변했다. '엎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까. 아냐, 이것도 중요해. 완성만 하면 대박은 처음부터 없었어. 완성 자체가 목적이었으니까. 괜히 바람만 잔뜩 불어 넣었어. 기대가 큰 만큼 백아의 실망도 크겠지. 그래서 저렇게 저돌적으로나오는 것이고.' 승길은 나름대로 분석해 보았다. 

하지만 도리질을 멈추지 않는 백아. 어쨌든 이번 작품도 어렵다는 표현을 그런 식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승길은 포기하기는 아직 일렀다. 나름대로 기승전결이 머릿속에 있었고 끌고 가는 힘도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다,는 자체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건 니 생각이고, 내 생각은 다르거든.’ 머릿속의 말은 거두고 지금은 설득이 필요한 시간. 내 편이 필요하다. 승길은 자신이 생각해도 표정 바꾸기의 달인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굳은 얼굴을 펴고 환한 미소와 함께 다가 가는 승길. 

“들어봐, 이게 다가 아니야. 양념이라고. 여기까지는 맛을 내는 양념. 양념이 맛있으면 기본은 하는 거고 메인은 아직 등장도 안 했어. 그리고 읽기는 읽은 거야. 뒷장 여러 페이지는 그대로네. 넘긴 흔적도 없어. 줄은 왜 안 치는데. 기왕이면 붉은 사이펜으로 죽죽 긋지.”

마지막에 가서 승길은 자신을 드러냈다. 양념 까지는 좋았으나 다음이 문제였다. 소인배가 어디 가겠나. 참으려면 끝까지 참았어야 했다. 아내에게 에이포 용지를 뺏듯이 받아드는 승길.

원고가 찌그러지며 백아가 뒷걸음질 쳤다. 그게 또 백아의 장점이기도 했다. 상대가 붙으려고 덤비면 화해를 요청하는 기술이 있었다. 치고 빠지는 전술이라고나 할까.

“틈나면 볼게.”

“왜 오늘은? 원고도 얼마 안 되는데.”

기세를 잡은 승길이 공세를 취했다. 용병술은 나도 있어, 하는 심정으로. 그러나 실수였다.

“내 참, 월요일 영어 가는 날인 줄 몰라. 10년을 했어도 여전히 월요일이 내게 가장 바쁜 날인 걸 모르다니. 그리고 내가 점심 약속 있다고 했지? 방금전에. 그건 거기다 놔. 갔다 와서 볼게.”

미안했다. 이건 승길의 잘못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아내는 월요일마다 영어 모임에 간다고 앞서 말했다. 회화가 늘었는지 독해는 잘 되는지 의심이라는 말도. 그 새 까먹었다.

'이러다 치매 오는 거 아냐.' 겁먹은 승길. '내 인생이 그렇지 뭐. 그리고 까먹을 나이도 됐지 않은가. 당신 코만 석자인가.' 인생의 늘그막에서 진심으로 대하는 백아의 영어에 무관심한 승길은 또 후회를 한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면 곤란하다. 달력에 적어 놓자. 다신 실수 없기를 다짐하는 승길. 

'내 참, 정신 머리좀 봐, 미안해'  정도의 사과로는 부족하다. 내 원고만 생각하다 아내의 중요한 일과를 잊었다. 문을 열고 나가는 백아의 뒷모습에 서운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럴 수도 있다고 뭐 그런 것 가지고 그러느냐고 따져서는 안 된다. 한두 번이 아니거든. 지난 주에 다짐하고 또 잊다니. 차려 입을 때 알아 봤어야 했다. 10분만 부탁 한 걸 그새 잊다니. 이건 심각한 상황이다. 

아무리 급해도 내 발등의 불만 끄려고 했다. 스스로 고칠 순 없었나. 정 안되면 기계의 힘을 빌렸으면 어땠을까. 읽어 주고 나서 비문이나 다음 문장을 말해줘라,는 명령어를 넣으면 척척 알아서 해줄텐데. 알면서도 못하는 승길.

기계보다는 낫다는 자존심 때문이라고 해두자. 아니면 정말로 치매가 온 것인가. 치매의 전조 증상 혹은 치매 초기인가. 치매 검사 받아 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정신 좀 차리자, 이 머저리야. 승길은 제 머리를 쥐어 박는다. 후회를 오래 하고 싶다. 그래야 다음 번에 같은 실수를 않는다.

어디 가는지 알지 못하면 어디 가느냐고 묻는 대신 그냥 잘 갔다와 라고 했으면 모면을 할 수 있었다. 설령 영어 가는 날이 떠오르지 않았어도. 머리가 세기 시작한 아내의 유일한 낙을 그런 식으로 모욕했다. 영어모임은 그런 것이었는데.

"목동 언니와 점심 약속 있어." 

"영어는?"

뒤늦게 승길이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면.

"수업은 2시부터니까 충분해."

"인도에서 한 달 살고 온 거야? 목동 언니는?"

여행을 잘 가는 목동 언니에 대해 승길이 넘겨짚었다면.

"아들이 결혼했나봐. 그 말 내가 한 것 같은데?"

백아도 기억력이 썩 좋지 않다. 이럴 때는 우기거나 공격해야 한다. 기회를 잡았을 때 놓치면 후회한다.

“십 년을 매주 만나면서 그것도 몰랐어?"

나무라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고소하다 고소해를 외치는 비열한 승길.

“내색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손톱에 안 하던 매니큐어도 하고 머리 모양도 달라지고 화장한 티도 나고. 그래서 물어본 거지. 그랬더니 40넘은 아들이 결혼했다고 실토하대. 그래서 점심이나 사려고. 사정 이야기도 들어보고. 뭐 뻔하겠지. 그 언니는 남에게 신세 지는 걸 죽어도 싫어하거든. 돈 모아서 주면 난리 칠 거야. 강박증이라고 말하려고 했다면 취소해 줬으면 좋겠어.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순전히 부담 주기 싫어서야. 나와 가장 친한데 내가 그걸 모를까 봐. 그나저나 늦장가니 얼마나 좋았겠어?”

“좋았겠어?”

질문이면서 동시에 동의를 구하는 듯한 그 말은 민혁에 관한 대비의 말로 이해하면 된다. ‘당신 아들도 결혼을 해야 한다’, '어영부영 하다보면 30대 중반이 된다.'

▲ 하선의 인생은 작별인사를 떠나기전 만나본 외할머니로 인해 완전히 바뀌었다.

승길이 물었고 하선은 말했었다.

“아버지 결혼은 어떻게 했어요?”

“그냥 했지. 꽃가마 타고 네 엄마가 산넘고 물 건너서 왔다. 꽹과리와 장구도 쳤지.”

그 순간은 하선은 옥선이를 떠올리지 않고 아예 잊어버렸다. 이미 남의 여자가 된 옥선이를 생각하면 부아만 치민다. 하선은 포기하면서 다른 인생을 설계했다. 그것도 모르고 승길은 “혹 연애결혼 하셨어요?” 하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런 게 어딨니. 양가 부모가 서로 합의하면 끝이지. 네 엄마도 결혼식 당일 날에야 얼굴을 봤다. 그 때는 화장이라는 게 연지곤지 찍는게 전부였지. 그래도 지금 처녀들보다 예뻣다. 족두리는 또 어떻고? "

"족두리를 썼나요? 어머니도."

"그럼 가마 타고 왔다. 하객들은 그 모습을 보고 신이나서 장구와 꽹과리를 쳤다. 그 때는 그랬다. 지금보다 훨씬 재미가 있었다."

승길은 민혁의 각시가 가마 안에서 밖을 수줍게 내다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하선 말마따나 그 때가 지금보다 풍류에서 한 발 앞서고 있다. 이런 연출을 하는 결혼업체는 돈을 벌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머리와는 달리 입은 달랐다. 

'그럼 옥선이라는 그 분은?' 하마터면 승길은 옥선이는 어떻하고요? 라는 말을 꺼낼 뻔했다. 급히 나오려는 말을 수습한 승길. 

"어머니는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누가 중매를 섰나요?"

하선은 말할 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더니 이 참에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다는 듯이 결혼 당시의 상황에 대해 '썰'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하선은 당시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상태였다. 승길의 조부모. 따라서 양가 부모의 허락은 당연히 없었다. 전쟁에서 돌아오니 빈집은 폐허였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아버지 옆에 묻혔다. 작은 봉분 둘이 나란히 서 있었다. 잡초가 어지러웠다. 하선은 하직 인사를 했다.

“저 떠나요, 아버지 어머니. 정든 고향, 삼대가 살아왔다고 말씀하셨지요? 이제 끝이네요. 저에게 이곳은 이제 마음의 고향입니다. 서울로 가면 다시 오기 힘들어요. 하지만 잊지는 않을게요.”

그렇게 하선은 쓰러져 가는 집과 서너마지기 논을 처분한 노잣돈으로 집을 나섰다. 쓸쓸함과 외로움을 강조하려고 찬바람과 함께 흰 눈이 내리는 겨울날이라고는 표현하지는 않겠다.

그냥 평범한 겨울 어느 날이었다. 소나무가 우거진 송솔리 마을을 지나 길고 긴 오청재를 넘어 웅천역에 도착했다. 대합실에는 짐꾸러미를 맨 노인 두 세명이 있었다. 표를 끊으려다 승길은 잠시 머뭇거렸다.

역에서 5리 정도 떨어진 황길리에 사는 외할머니가 거슬렀다. 간다는 인사 정도는 하고 가야 할 듯싶었다. 이제 가면 돌아가시는 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내가 가는 것도 모를 어린 시절 함께 놀아준 외사촌에게도 작별 정도는 필요했다.

하선의 인생은 거기서 갈렸다. 서울로 그냥 갔으면 어땠을까. 가정은 역사만큼이나 가정사에서도 필요 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선은 때때로 해봤다.

외할머니 앞에 큰절을 올렸다. 하직 인사치고는 괜찮았다. 눈물 젖은 눈으로 외할머니가 말했다.

“가는 건 가는 거고 장가는 가고 가야지. 내가 산동네 사는 처녀와 다 말해 놨는데. 그 집 부모도 허락을 했어. 인편으로 너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다.”

‘장가라고, 장가. 내가 장가를 간다고. 장가라면 옥선이밖에 없었는데 옥선이 말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고.’

하선은 그 순간 귀가 확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막힌 귀가 열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선은 한 달 후 가마를 타고 산 넘고 물 건너서 온 18살 그 소녀와 결혼했다. 연지곤지 찍고 족두리 썼다는.

그 때가 23살 때였다. 전쟁이 끝나고 3년 후였다. 승길의 외가댁은 바닷가와 인접해 있었다. 그 안쪽으로는 논이 많았다. 어부 생활과 농부로 닥치는대로 하선은 일했다. 머슴처럼 일해 외할머니에 대한 은혜를 조금씩 갚아 나갔다. 

다행히 산골 소녀도 억척스러웠다. 단발머리 휘날리며 광산 김씨 그 소녀는 이고 지고 수시로 바다로 논으로 하선의 밥을 날랐다. 그 사이사이 아이가 줄줄이 생겼났다. 억척스러운 두 부부로 인해 아이들은 다행히 입에 풀칠하는데는 지장 없이 컸다.

“네 엄마, 그러니까 광산 김씨는 예뻤단다. 꽃가마를 타고 왔다는 말은 했지? 마당에 나가 기다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가마꾼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어. ‘길 비켜라. 황길리에서 제일 이쁜 신부 나가신다.’

”너 꽃가마 알지?

“네 아버지. 연속극에서 봤어요.”

“씨암탉도 잡았다. 외할머니가 은인이다. 고아에게 누가 딸을 주겠니?”

하선은 생전에 외할머니의 감사함을 이런 식으로 승길에게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