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었지만 날은 작업하기에 딱 알맞은 날씨였다
[의약뉴스]
사. 명당대신 흉지를 택했을리 없었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곳이 길지는 아닐까 승길은 생각했다. 명당이 아니라면 그토록 생이 길 수가 있나, 죽음은 짧고. 9988234를 하신 것이니 이보다 호상은 없다.
죽음에 슬퍼할 이유 없고 상갓집에 곡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누가 울겠는가, 생각해 보라. 100세 노인의 장례식장은 한시름 놓았다는 안도감이 지배했다. 손님들도 죽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다.
상주와 인사하고 밥을 먹고 그만 가보겠다고 하고 와줘서 고맙다는 인사가 주류였다. 덧붙이는 경우는 마지막 까지 버틴 것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었다, 는 것 정도.
맞다, 그들의 말이. 이제 외삼촌의 정신은 떠나고 육신은 한 줌 재로 변해 납골묘 속으로 들어갔다. 하늘나라에 간다는 표현 그대로 영혼은 날아 높은 곳 어디쯤 도착해 있을 것이다, 지금쯤.
그런 마음이 들자 승길은 남아 있는 후손들이 앞으로는 잘살지는 못해도 그럭저럭 살겠다 싶었다. 생전의 효도나 불효와는 상관없이.
서울로 돌아오면서 승길은 인생에 대한 관찰기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진부했으나 마리아가 물어본 사자성어 생로병사가 떠올랐고 그와 연관된 이야기는 소설가가 하면 그럴듯해 보였다. '논문보다는 소설이지.'
소설가는 차고 넘쳤으나 그걸 하는 사람이 승길 자신이고 싶었다. 이미 많은 작품이 나왔지만 승길이 또 쓴다고 해서 나무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순수 창작에 한계는 없고 누군가는 또 그걸 뛰어 넘는다.
무엇보다도 그걸 쓰기 시작하면 이대로 하루를 마치지 않을 것 같았다. 점집을 찾을 만큼 무언가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승길에게는 마침 찾아온 좋은 기회였다. 때맞춰 외삼촌이 돌아가셨고 아버지 돌아 가신지도 삼 년이 흘렀다. 김여사의 생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죽을 사'를 표현한는데 어려움이 없을 터.
아버지는 요양원이 아닌 일반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사망진단서를 떼는 게 간단했다. 사망진단서를 받았을 때 승길은 의사가 사인으로 쓴 '폐렴에 의한 심부전'이라는 단어에 눈길을 두었다.
'결국 아버지는 숨을 쉬지 못해 돌아가셨군. 돌아가실 때는 누구나 숨을 쉬지 못하지.' 원무과 직원은 장례식장을 어디에 둘 건지 물었고 사망통지서에서 눈을 뗀 승길은 웅천 장례식장으로 모시겠다고 대답했다. 돌아가신 병원 장례식장 대신 시골집에서 가까운 장소에 빈소를 차린 것이다.
삼일 동안 승길은 아버지를 추억하려고 애썼으나 잘 되지 않았다. 임펙트 있는 그 무엇이 없었다. 아버지의 삶이 그랬다. 성실하게 하루 하루 살다 보니 죽음에 이른 것이다. 성실하지 않았다면 그 시절을 어떻게 넘겼겠는가.
성실했던 아버지 하선. 제 아버지라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것은 아니었다. 성실한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었다. 승길은 발인 전날 본 하선의 마지막 모습에서 그걸 발견하려고 했으나 얼굴 어디에도 성실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죽으면 끝인거야.'
승길은 장례 지도사가 가시는 아버지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라고 했을 때 말 대신 손으로 얼굴을 만졌다. 차갑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그래서 얼른 손을 떼려고 했으나 잠시 그대로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 외삼촌 손의 감촉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죽음이 임박한 사람과 죽은 사람의 체온은 비슷하구나, 승길은 또 생각했다.
그러다 승길은 문득 자신이 있을 곳은 안치실이 아니라 밖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서 나가야 했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죽은자의 영혼이 산자 때문에 괴로울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나가기 전에 승길은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하고 마치 다음에 또 볼 사람처럼 인사했다.
입도 입술도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유리 벽 밖에서 지켜보던 친척들은 승길이 아무 말도 없이 고인과 작별하고 있다고 여겼다. 작별의 절차가 하나씩 진행됐다. 거기에는 빨리 끝났으면 하거나 아니면 느리게 진행했으면 하는 시간 개념이 없었다. 하나가 끝나면 다른 하나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곳 관계자들은 일 솜씨가 능숙해 지체되는 법이 없었다.
시신은 어느 순간 리무진으로 옮겨졌다. 뒷자리에 탄 승길은 10분 거리에 있는 선산을 떠올렸다. '거기 작업은 끝났을까. 기다리는 사람 가운데 내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도착하고 나면 마무리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불편할 것 같았다.
동네 어귀에 도착챘다. 승길은 여기서 잠깐 멈추어 달라고 운전사에게 부탁했다. 우측으로 돌면 평생 하선이 살던 집이 있다. 리무진은 길어서 집 마당까지는 갈 수 없어 승길은 큰 길가에 차를 세우고 하선이 자신의 집에 잠깐 머물 시간을 주었다. '살던 집을 보라고. 다시 보지 못할 집을. 손수 땅을 파고 나무를 깎고 서까래를 올려 지은 집을.'
이건 어디서 본 장면이다. 영화인가, 텔레비전인가는 잘 모른다. 하여튼 마을로 들어오는 작은 고개를 차가 넘었을 때 은행나무 아래서 잠깐 서 달라고 부탁해야지 생각을 했고 잊지 않고 그렇게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잘한 결정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사를 가지 않은 집이 그리울 것이다, 필경. 승길은 20번 넘게 이사한 자신과 하선을 비교해 봤다. 생전에 하선은 이 터에서 태어나서 이곳에 집을 짓고 단 한번도 이사한 적이 없다고 자랑인지 잘못을 뉘우치는 것인지 알지 못할 애매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차는 다시 출발했고 곧 멈췄다. 운전사는 능숙하게 관을 처리했고 땅에 닿은 관은 들고 가기 쉽게 양쪽에서 네 명씩 균형을 맞췄다. 관을 들고 옮기는데는 조카들이 많아 큰 어려움은 없었다.
아버지는 관을 상여에 싣고 가기를 바랐지만 상여집이 사라진지도 오래전의 일이었다. 당연히 시신을 실을 상여는 없었다. 만장도, 그걸 뒤따르며 부르는 아이고 아이고 하는 애절한 곡도 없었다.
상여는 아니어도 아버지의 마지막 길은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화장이 99프로인 지금 아버지는 두 번 죽는 일은 절대 반대라고 생전에 화장 반대에 대해 수 십차례 말했기 때문에 승길은 그것만은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십여 년 전에 본인 스스로 해논 가묘 덕분에 일은 화장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관을 내려놓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포크레인이 벌써 구덩이 작업을 마쳤고 인부 몇 명과 먼저 와 있던 친척들이 묘지 주변에서 운구행렬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겨울이었지만 날은 조금 쌀쌀한 정도였다. 작업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누군가 무리해서 서두를 필요가 없는 날씨를 칭찬했다. '가시기에 좋은 날이구나. 날짜 한 번 제대로 잡았네. 마지막까지 아버지는 자식들을 편히 해주네.'
승길의 마음을 알았는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불효자식을 탓하는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관을 넣고 흙을 덮었다. 승길은 애써 담담하려고 했고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구순 넘게 건강하게 사시다가 마지막 한 달 정도만 병원을 들락거렸으니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는 아니었다.
모두가 호상이다, 호상이다라고 할 만한 초상이었다. 다만 병원 신세를 지던 그 마지막 한 달은 승길과 정을 떼는 시간이라고 생각할 만큼 승길이 생각해도 조금 벅차기는 했다. 하선과의 작별이 그렇게 쉽지 만은 않았던 것이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고 그때마다 서울에서 보령으로 야간이든 새벽이든 승길은 차를 몰았다. 아버지는 쉽게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외삼촌처럼 생의 끈을 놓기 어려워했다.
살고자 하는 욕망. 어쩌면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이 정도면 괜찮겠지', 시험을 해보려는 듯, 어깨를 들썩이고 발을 뻗고 목을 돌렸다. 누웠다가도 일어나서 침대 난간을 잡고 아내로 내려오려고 애썼다. 간병인은 질색했고 간호사도 나무랐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 있기를 바란 것은 김여사도 마찬가지였다. 김여사 혼자서 하선을 감당할 처지가 못됐기 때문이다. 한 번은 하선이 집 옆의 밭고랑에 쓰러졌다.
일어나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안 됐다. 소리를 질러도 목소리는 고랑을 타고 지나갈 뿐 누구도 와서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나중에 아버지는 아무리 소리를 쳐도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내가 이제 죽는구나 하고 포기했었다. 그래서 잠을 잤던가 보다."
지친 하선은 잠이 들었고 기적처럼 깨어났다. 입으로 개미들이 들어가 있어가서 입천장을 물어 뜯고 있었는지 하선은 그 바람에 눈을 떴다. 제일 처음 한 일은 입안에 가득찬 무언가를 뱉어 내려고 애쓰는 일이었다.
겨우 어떻게 개미들을 처리하느라 있는 기력마저 소진한 하선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오후 3시경 쓰러진후 3시간 정도 지난 저녁 무렵이었다. 장에 갔다 온 김여사는 하선이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하선은 없었다. 정말 죽었나. 겁이 난 김여사는 이리저리 하선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 텃밭에 쓰러져 있는 하선을 발견했다. '어떻게든 들여 놓으려고 하는데 꿈쩍도 안해. 얼마나 무거운지. 그래서 옆집 조카를 불렀지.' 마침 담배를 피러 나왔던 근처에 사는 조카가 그 소리를 듣고 겨우 방안으로 모셨다.
또 한 번은 행길에서 쓰러지셨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우체부가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했다. 그걸 생각하면 노지 객사 대신 병원에서 돌아가신 것은 잘된 일이었다. 잘 됐다고? 승길은 간혹 이런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의 죽음은 잘 된 것인가, 정말로.
죽음을 생각하면 승길은 나태해지려는 마음을 다 잡는다. 말하자면 다른 누구의 죽음이 아닌 바로 하선의 죽음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는 마음가짐이랄까.
아무튼 개인병실의 간병인을 구하는 것이 거짓말 같지만 당시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지금은 더 심하다는 말을 들었다. 간호간병 통합 얘기가 나온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대기를 걸어 놓고도 한 달 이상 걸릴 거라는 말이 나왔다. 그 병원의 간병인들은 어느 회사 소속이었는데 쉬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부득이 4인실로 옮겨야 했다. 거기도 기다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마침 대기하고 있던 사람이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바람에 운 좋게 하선의 차지가 됐다.
다행이었다. 간병인을 구하지 못해 하루 회사를 그만둔 승길이 이틀 연속으로 회사를 빠질수는 없었다. 승길은 다음 날 일찍 다인실로 아버지를 옮기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이야. 정신이 말짱했는데.' 떠나올 때 승길은 병상 아래에 붙은 이름표를 들고 이렇게 물었다.
“누구 이름이에요?”
“내 이름이구먼.”
“내 이름이 누구인데요?”
“이하선.”
“잘 아시네요. 아버지. 주말에 내려올 테니 잘하고 계세요. 필요한 거 있어요?”
대답 대신 아버지는 물끄러미 승길을 쳐다봤다.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시선 교환이었다. 화요일 저녁에 올라갔는데 목요일에 사망 통지를 받았다. '이렇게 빨리', 라고 화가 났다가 돌아가셨구나, 잘 가셨어, 하고 승길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화를 내고 따지고 든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쌓아 놓은 흙이 관을 다 덮었다. 발로 흙을 다지면서도 승길의 머릿속은 병원과 사망 통지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작업 인부가 그때 끼어들었다.
“삽, 이리 주시고요. 상주분들은 뒤로 빠지세요.”
답답했던지 인부는 삽을 받자마자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기가 막힌 삽질로 삽시간에 주변을 깨끗이 정리했다. 봉분을 쌓고 돌로 테두리를 두르는 작업은 그야말로 예술이 따로 없었다.
역사에 남을 건축물을 만드는 장인처럼 인부들은 한 치의 오차도, 시간 낭비도 없이 묘 하나를 완성했다, 뚝딱. 한 시간 조금 지나서 작업이 끝났다.
마지막 제사도 지냈다. 그렇게 제사에 연연했던 아버지가 제사상을 받았다.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 승길은 홀로 남아 묘 주변을 돌았다. 해는 서쪽으로 지고 있었고 바닷가 쪽에서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눈이 내릴 모양이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언제나 새벽에 일어났던 하선. 맞는 말이었다. 농사를 천직으로 알았다는 비석의 글씨. 하선은 죽기 전 그 비석의 글씨를 소리 내서 여러 번 읽었다. 가장 최근에는 추석이었다. 비석에 묻은 때를 만지며 "평생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사셨다"는 승길이 쓴 문장을 큰 소리로 읽었던 것이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한마디로 하선의 삶을 승길은 이렇게 정의했다. 그게 다인가.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은 어떤가. 소설로 쓸 만한 대단한 인연은 아니었다.
흑백 사진 속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인다, 고 승길은 생각했다. 영정 사진은 아니다. 젊을 적 사진을 정리하다 하나 챙겨서 액자에 넣어서 서울로 가져온 것이다. 책상의 맞은편에 걸어 놓고 수시로 본다. 그저 무덤덤하게. 간혹 잘 게시지요? 가벼운 인사 정도.
삼일장 내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그저 무덤덤하게. 하지만 하선을 생각하면 할 말이 없을 수 없었다. 구십 오세까지 사셨으니 많아도 아주 많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