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학자의 말을 듣고 식단을 짰다

2026-10-19     의약뉴스 이순 기자

[의약뉴스]

55. 오늘의 운세를 본다. 인공지능은 척척 답해준다.

"무슨 일을 벌렸다면 조바심내지 말고 인내심으로 기다려라."

내친김에 재물운도 본다.

"말년까지 그럭저럭. 번 돈을 함부로 쓰지 말고 아끼면 거지꼴은 면한다."

만세력을 간혹 본 적이 있어 놀랍지는 않다. ‘거지꼴 면하려면 아끼기만 하면 되잖아. 그렇다면 아끼지 뭐.’ 행운수는 어떤가. 운수대통?

"일단 로또 당첨 같은 큰 걸 기대하지는 말라. 하지만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하는 작은 행운들은 연속으로 찾아온다."

이런 대답이라면 누구는 못할까. 승길은 장난을 쳐본다.

"그렇다면 나에겐 언제 노년이 찾아오나? 생물학적 나이 말고."

"삶의 질문이 달라질 때."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인생을 어떻게 써야지?"

"그건 사람마다 다름."

"하하하. 그렇군."

이제부터 질문을 달리해볼까. 언제까지 달릴 수 있을까? 아니 그거 말고. 달리기와 삶? 싱겁다. 그건 그때그때 다르니까.

▲ 민혁은 바쁜 와중에도 승길의 첫 마라톤 풀코스를 예약했다. 백마강을 따라 달릴 때 승길은 함께 했던 하선과의 추억을 떠올린다. (사진은 쳇 지피티 이미지.)

화길은 말했어. 사주팔자는 에이아이가 낫다고. 하지만 인간의 신점은 기계가 따라오지 못한다고. 그렇지. 다른 건 다 사라져도 무속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현대과학 어쩌고저쩌고해도 불안한 인간은 늘고 있다. 오지 않는 미래는 불안을 먹고 산다. 이렇게 또 시간은 간다.

디데이로 알려준 날짜가 왔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뉴스에서도 별일이 없는 그저 평범한 날이었다. ‘이날이 아닌가벼.’ 승길은 가벼운 농담처럼 혼잣말을 했다.

'아니면 화길이 다른 날짜를 건넸나? 화길도 틀릴 수 있지. 화길을 의심하다니. 아니 그건 아니지. 주최 측의 변심이겠지. 아니면 다른 날짜를 받았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랬을리가.'

어쨌든 정국의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여야 대립은 더 심하면 심했지 화해의 분위기는 없었다. 힘을 가진 쪽은 힘을 사용한다. 야당도 힘이 있어 맞대결을 펼친다.

강과 강이 부딪치면 한쪽은 부러진다. 그게 싸움의 이치다. 승자가 있고 나서야 패자가 있다. 서로는 패자를 원치 않는다, 특히 더 힘을 가진쪽은. 공권역을 쓸 것이다,라는 예측은 점점 힘을 얻고 있다.

불안은 스펀지의 물처럼 여의도로, 용산으로 스며들고 있다. 무엇이든 터지지 않으면 그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가스를 잔뜩 머금은 공기가 불을 그리워하고 있다. 누군가 꽁초를 버리기만 하면 폭발한다.

승길은 그날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와서는 안돼, 였다면 지금은 언제 오나? 하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고 있다. 백아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굳이 미리 알아서 불안을 조성할 필요가 없었다.

어영부영 시간이 흐르면서 민혁의 결혼도 순조롭게 끝났다. 사돈댁도 며느리처럼 평범했다. 모난 데가 없는 듯싶어 다행이다 싶었다. 승길이 칠순 기념으로 어디 여행이라도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식장에서 들었으니 말이다.

며느리의 배는 남산만큼 불러왔고 곧 출산할 것이다. 아들인지 딸인지 묻지 않았다.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제 사병로생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 소설도 막을 내려야 한다. 극적인 어떤 것을 기대하기에는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평범했다. 느닷없이 무슨 변고로 끝낼 생각은 없고 그렇게 끝난 소설이라면, '완성하기만 하면 대박'이라는 공식은 성립될 수 없다.

큰소리쳤으나 이번 소설은 완성 그 자체에 만족해야 한다. 대박은 아무나 치는 것이 아니다. 승길은 자신의 문장력, 상상력, 세상을 보는 눈, 그리고 독자의 수준을 작가가 따라가지 못한 것을 절감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막바지로 갈수록, 소설의 마침표가 다가올수록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화길이 말한 디데이는 틀림없는데 움직임은 없다. 화끈한 거를 주문하고 싶다. 강중장에게 아니면 박대표에게라도 건의해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 당시 승길의 심정은 그랬다. 

불안은 서서히 승길의 영혼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일어나야 불안이 사라질 정도로 그날 만을 기다리고 있다. 뇌의 모든 감각이 디데이로 모아지고 있다. 잠들기전에 내일을 외쳤고 날이 밝으면 또 내일을 되내었다. 

그런 날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승길은 체념했으나 아예 끈을 놓지 않고 뒤로 미루는 전략을 택했다. 딱 내일이 아니어도 그 다음날 일수도 있고 일주일 후일 수도 있다,는 쪽으로.

후퇴의 여지를 남겨둔 것은 잘 한 일이다. 그렇게 마음먹자 마음이 한결 편했다. 이건 억지 설정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럴만한 조짐들이,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그런 낌새 같은 것을 승길은 느껴졌던 것이다.

박봉길 의원을 만났을 때 디데이가 있는 것은 확인했다. 여당 대표실에서 대표 였다가 대통령이 된 사람의 사진을 올려다 보고 있던 그는 무척 상기돼 있었다, 는 사실을 승길은 상기했다. 

죄송하다는 둥 내가 먼저 연락했어야 했다는 둥 죽을죄를 지었다는 둥 너스레를 떨고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환하게 웃었으나 그 순간에도 붉게 상기된 얼굴을 박봉길 대표는 승길에게 감출 수 없었다.

단지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의 주인공이 자신이 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붉어진 얼굴이 아니었다. 그도 무언가 커다란 것이 다가오고 있고 그것을 막을 수 없고 아니 막기보다는 둑을 허무는 일을 하고 있다는데 흥분돼 있었다.

숱한 생사의 고비를 넘겨왔으나 이번 일은 그 전의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센 것이라는 것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박대표는 이번에도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고 옳기를 바랐다.

아니 그래야 했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당 대표는 그래야했다. 일부 반발하는 의원들을 제압하고 하나로 뭉치는데 앞장서야 한다. 깃발을 들고 나를 따르라, 가 우두머리의 역할 아닌가.

그날은 피바람이 불 수도 있고 피한방울 흘리지 않을 수도 있다.

‘성공이냐 실패냐 그것이 문제로다.’ 지뢰 사고로 대대장의 발목이 절단된 사건을 화제에 올리다 그가 갑자기 신파극을 연출했다.

승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디데이가 얼마 안 남았죠?"

갑자기 굳은 얼굴의 박대표가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는 듯이 승길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금새 얼굴색을 바꾸며 되받았다. 

“그날이 오면 우리 다 같이 만세를 부릅시다. 이 말인가요? 맞죠? 이병장님.”

“아마도 그럴 겁니다.”

“에이 그런 대답이 어딨어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고 흔들면서 “우리 이제 한배를 탄 몸입니다” 하고 의식적으로 잡은 손을 흔들어댔다.

“사실 내가 먼저 묻고 싶었어요. 이병장님과 통화하고 나서 강중장과 만났거든요.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이병장님 소식이 나왔고 서로는 깜짝 놀랐지요. 이렇게 연결될 줄은 몰랐거든요. 사실은 긴가민가하긴 했어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내가 아는 그 사람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지요. 하지만 말을 할수록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거에요. 철원 교육대며 조교며 소대장이며 당시 수색 중 터진 지뢰 사건까지 다 맞는거에요.”

“그러다가 디데이로 방점을 찍었군요.”

“역시 글 쓰는 분이시라 표현이 남다르군요. 방점을 찍다, 맞아요. 방점을 꽉, 하고 찍은 거지요. 야당의 공세가 너무 가혹해요. 이건 내 말만이 아니라 누구나 공감하는 정치 현실이고요. 뒤집어서 일거에 척결해야지요. 그런데 자꾸 미뤄지는 것 같아요.”

“그러게요. 내 느낌엔 이미 지난주 수요일이어야 했는데.”

거기에 박 대표는 또 한번 놀랐다. 디데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이 있나 하는 듯한.

“아니 어떻게?”

“그냥 짐작해 봤어요. 목요일이 본회의 투표일이잖아요?”

“아, 그렇군요.”

“언론에서도 하도 떠들어 대니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승길은 박대표의 의구심을 이렇게 털어냈다. 그가 대표 당선후 만든 손목시계를 선물했다. 당대표 박봉구라는 이름이 선명했다.

“당대표가 아니라 대통령 박봉구라면 좋을텐데.”

승길의 농담에 그의 입이 하품을 하는 하마처럼 벌어졌다.

“역시 이병장님은 영원한 내 편이요, 내 편입니다. 하하하.”

승길은 아니 만나니만 못한 박대표와의 만남을 후회했다.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만난 것에 의미를 둔 것이라면 크게 후회는 없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했다. 디데이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다.

헤어지면서 박대표는 자신에게 한자리 부탁하지 않는 사람은 이병장님 뿐이라며 그럴 줄 알았지만 섭섭하다고 말했다. 전혀 섭섭하지 않은 표정으로.

보좌관이 따라 오면서 뭔가 종이가방을 쥐어 준다. 제법 무겁다. 와서 보니 탁상 시계와 편지봉투 크기의 벽걸이 시계였다. '이런 젠장, 손목시계까지 시계만 세개네.' 

승길은 달린다. 생애 첫 풀코스 도전. 완주가 목표다, 당연히. 다섯 시간 안에 들어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 대회 한 달 전부터 식단도 관리했다. 생전 처음 하는 일이라 서툴다.

식단 관리를 우습게 여겼으나 이번에는 꼼꼼히 따졌다. 그만큼 완주 의욕이 높다. 달걀 노른자를 버리고 흰자만 먹는다. 남들이 추천하는 건 다 해본다. 입에 들어가지 않더라고 억지로 밀어 넣는다.

민혁이 어깨를 넓히고 가슴을 키울 때도 그런가 보다 했으나 그것도 챙긴다.

“아빠, 근육키우려면 닭 가슴살 먹어야 해.”

'너나 먹어' 가 아니라 "오케이."

“운동하면 붙어야지 되레 빠지네.”

백아의 잔소리에도 '응 근육만 있으면 돼, 라고 응수했으나 이 역시 "좀 챙겨줘, 사정없이 먹을 게" 로 바뀌었다.  

이번은 다른다. 반드시 완주, 필히 완주. 영양학자를 우습게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승길. 마음속으로라도 칼로리 어쩌고저쩌고에 조소를 날린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괜히 전문가겠어?’ 옹호하고 나선다. 유튜브 속의 그 전문가가 짜준 한 달 마라톤 풀코스 완주 식단, 을 따라 한다. 어쩔 수 없다. 노년의 승길이 해내려면 따라야 한다.

심지어 제주도 런트립도 갔다. 그만한 정성없이, 비용 들이지 않고 완주가 가능해? 자문하면서. 돌아와서는 생애 첫 38킬로를 뛰었다. 대회는 아니었다. 달리기 앱으로 확인한 시간은 4시간 13분 턱걸이.

턱걸이라고 했지만 대단한 기록이다. 오로지 두 발 만으로 해낸 것이다. 걷지도 않았다. 쉬지 않고 달렸다. 달릴 때는 느려도 땅을 박차고 나갔다. 땅에 닿는 운동화 발소리를 들으면서. 척척 척척.

겨울이 가고 봄이 왔으나 디데이는 없었다. 풀코스 마라톤 일정도 미뤄졌다. 봄 대회는 자격 미달로 실패했다. 동마는 그전의 풀코스 기록을 내야했다. 그게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가을 대회에 참가해야 한다.

공부백제마라톤. 잘됐다 싶었다. 고향에서 풀코스는 의미가 있다. 보령이 고향이지만 같은 충남인 부여는 지척이다. 부여에서 뛴다. 부여라는 말만 들어도 승길이 가슴이 뛰었다.

하선과 뱃놀이를 했던 곳이다. 낙화함은 여러차례 갔으나 뱃놀이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 해가 가고 95세가 되자 눈에 띄게 거동이 불편해진 하선. 노인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다고 하더니 아버지 걸음이 확연히 다르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몸과 균형을 잡지 못하는 발걸음. 이번이 어쩌면 마지막 여행인가. 유유히 흐르는 물길. 멀리 낙화암이 보인다. 가까이 갈수록 드러나는 붉은 글씨.

그걸 읽어보려고 노력하는 하선. 저 모습이 사후 기억해야 할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여기 어때?" 

승길은 민혁에게 공부백제마라톤은 언급했다.

"예약 좀 해."

민혁은 힐끗 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으나 며칠 지나서 카톡으로 링크 주소를 보내왔다.

"고맙다, 아들."

"아빠 이번엔 풀코스지?"

미심쩍어서 물어본다.

“예스, 당연히 예스지.”

걸음마를 시작한 종대. (종대는 민혁의 아들, 승길의 손자 이름이다.) 챙길게 많을텐데 아빠 마라톤 신청까지 해주니 눈물겹다. 대회 전날에 공주에 내려갔다. 민박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른 아침 공주시민운동장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백아가 동행했다. 떨린다. 첫 하프 도전 때처럼. 그보다 심하다. 출발선에 선 승길. 가을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온다. 출발 총소리 대신 D그룹 출발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연신 들려온다.

'D그룹 출발, D 그룹 출발.' 경쾌한 음악이 따라 붙는다. 어떤 음악이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뒤이어 건타임 아닌 넷타임 방식을 설명하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바닥의 매트를 힘차게 밟고 지나간다. 고향의 냄새와 아우성. 출발과 동시에 승길을 빠르게 추월해 나가는 주자들. 자꾸 뒤로 밀리는 승길. 아랑곳 않고 제 페이스를 유지하는 승길.

사진작가들이 카메라를 높이 든다. 손을 흔드는 승길, 두 손들고 만세도 부른다. 여유가 넘친다. 그러다 자세를 고친다. 앞으로 몸을 밀어내려고 고개를 숙인다. 그런 자세로 달리면 덜 지치고 속력도 난다는 말을 들었다.

머리가 먼저 나가고 가슴이 뒤따르고 발도 따라나선다. 상쾌 통쾌 유쾌하게. 백마강을 따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어린 시절 고향을 찾을 때 탔던 완행열차의 창문으로 획획, 지나가던 풍경이 슬로모션으로 반복된다.

느리게 느리게. 승길이 추월하는 주자는 한 명도 없다. 계속 추월만 당한다. 그래도 좋다고 손을 흔드는 승길. 기록이 아니라 완주가 목표니까. 강물에 파란색의 음료수병이 떠내려 온다. 저걸 먹어야 한다. 언제 먹을까.

십 킬로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말자, 다짐하는 승길. 출발한지 얼마나 됐다고 발이 무겁다. 여전히 무겁다. 휘두르는 팔에 탄력이 붙지 않는다. 언제나 초반은 이렇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다. 여기서 더 느릴수는 없다. E그룹 주자들이 치고 나온다. 빠르다. 저 그룹에 속할 페이스는 아니다. 아니면 나처럼 첫 풀코스인가. 저렇게 완주하면 서브 4는 충분하겠다 싶었다.

10킬로를 지날 무렵 더 이상 추월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미 갈 사람은 다 앞질러 갔다. 그렇다면 이 속도만 유지하자. 벌써 걷는 주자가 보인다. 그들을 가볍게 따돌린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걷는 사람에게 뒤질 수는 없다. 이마에 땀이 난다. 가랑비 때문에 쓴 모자를 벗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