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악의 꽃(1857)- 악마의 꽃 혹은 아름다운 꽃

2026-09-11     의약뉴스 이순 기자

[의약뉴스]

“사람들은 말한다, 짜증 나는 일은 망각의 우물에 흘려보내든가 아니면 무덤에 파묻는 게 최고라고. 악에 대한 책을 써서 그것을 되살려내면 후세의 미풍양속을 해치게 된다고. 그러나 나는 믿지 않는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 초판 첫머리에 나오는 테오도르 아그리파 도니볘 ‘비창’ 2권에 나오는 인용구다.( 하지만 2판에서는 없어졌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는 과연 악에 대한 책을 썼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꽃 이름 앞에 악을 붙였다. 악과 꽃의 대비는 선명하다. 언뜻 사람들은 생각한다. '악의 꽃'은 병든 꽃인가, 아니면 시든 꽃인가. 땅에 버려져서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꽃인가.

악의 꽃은 그런 꽃인가. 시집을 읽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악에서 피워낸 한 줄기 빛이라고나 할까. 지옥의 고통과 타락, 어둠과 추악에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시체, 우울, 질병과 부패 속에서도 삶의 의욕은 볼 수 있다. 따라서 ‘악의 꽃’은 제목만 놓고 보면 모순 그 자체다. 선의 꽃 혹은 생명의 꽃 정도가 어울릴까. 후세의 미풍양속을 해치기는커녕 그것을 지키는데 한몫 단단히 하지 않았을까.

시집 두 번째에 소개된 ‘알버트로스’를 보자. 새는 날개가 커서 우아한 몸짓이 돋보인다. 하늘의 제왕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늘이 아닌 땅에서도 그럴까. 배의 갑판에 알버트로스가 앉는다.

그 순간 창공의 왕은 치욕스런 몸짓으로 커다란 흰 날개를 가련하게 질질 끈다. 한때 참으로 멋있던 새가 흉하고 우스꽝스럽게 된다. 그뿐인가 선원들은 담뱃대로 부리를 툭툭 건드리고 어떤 사람은 절뚝거리면서 불구 흉내를 낸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다. 멋진 폼으로 하늘을 호령하던 왕도 속세의 땅에 떨어지면 거창한 날개는 걷는 데 걸림돌이 될 뿐이다. 야유로 가득 찬 세상이 아닐 수 없다. 현실은 추하고 시인은 아름답다 뭐, 이런 건가.

‘썩은 고기’를 보자. 표제 ‘악의 꽃’과 어울릴 만큼 악취 가득한 제목이지 않은가. 상쾌하고 아름다운 어느 여름날, 연인과 함께 거리에 나섰다. 그런데 거기에 음탕한 계집처럼 두 다리 쳐들고 독기 뿜어대는 몹시도 끔찍한 썩은 고기를 오솔길 어느 모퉁이에서 보았다면.

마침 떠오른 해는 배때기를 드러낸 시체 위로 떠올랐다. 활짝 핀 꽃이라도 되는 듯 하늘은 화려한 이 시체를 보고 있다. 파리 떼는 들끓고 까만 구더기 떼로 기어 나왔다. 형상은 지워지고 남은 건 꿈뿐.

그리고 세상은 기이한 소리를 냈다. 그대 또한 오물이다. 내 눈의 별이며 내 마음이 태양인 그대조차도. 하지만 백골로 고해성사 끝내고 백골로 썩더라도 그대, 어여쁜 여왕.

그런가 하면 서정성 가득한 ‘가을의 노래’도 있다.

“머지않아 우리는 차가운 어둠에 잠기리/ 안녕, 너무도 짧았던 우리 여름의 빛이여!/ 나는 벌써 듣는다, 안마당 돌길 위로/쓸쓸하게 울리며 떨어지는 장작 소리를./”

1절만 보면 그렇다. 하지만 곧 장작 소리는 단두대를 세우는 소리, 누군가 급하게 관에 못을 박는 소리다. 몸서리치며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짧은 파업이여! 무덤은 기다린다-그것은 굶주렸다! /아! 나로 하여금 그대 이마에 머리를 묻고,/ 새하얗게 작열하던 여름날을 아쉬워하며/ 따스하고 노란 늦가을의 빛을 찬양하게 해주오!/”

마지막 연은 또 이렇게 변한다. 단두대나 관이나 무덤의 삭막함이 어느덧 희망의 빛으로. 마치 릴케의 시를 읽는 기분이다.

▲ 악의 꽃은 악을 퍼트리는 꽃이 아니다. 되레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선한 꽃 혹은 선을 퍼트리는 꽃. 보들레르는 시인의 손으로 악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다.

‘쾌활한 망자’를 읽을 때는 나도 저 망자처럼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다. 유언도 싫고 무덤도 싫어 남의 눈물 구걸하지 않고 산 채로 까마귀 떼 불러 몸 구석구석 쪼아 피 흘리게 하고 싶다는.

귀도 눈도 없는 더러운 친구 구더기들에게 자유롭게 쾌활한 망자가 찾아왔다고 알린다. 주저하지 말고 송장을 파먹어라, 대신 가르쳐 달라. 넋 없는 이 늙은 몸에 아직 무슨 고뇌가 남아 있는가를!

처절한 아름다움이란 이런 걸까. 쾌활한 망자처럼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죽음은 정말로 쾌활할 터.

“내겐 천년을 산 것보다 많은 추억이 있다”고 시작하는 ‘우울’(우울에서 아름다움이 피어난다는 역설.)이나 빅토르 위고에게 바치는 시도 깊이 있는 울림이 있다.

“아내가 죽었다, 나는 자유다!/이로써 실컷 마실 수 있다./ 빈털털이로 집에 돌아오면/ 그녀의 고함이 내 가슴을 찢었지. 왕만큼 행복하여라./ 공기는 맑고 하늘은 감탄스럽고.../내가 아내한테 반한 때도 이런 여름이었지./

이렇게 시작하는 ‘살인자의 술’은 입맛을 당기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생명, 삶, 향기가 얼핏 얼핏 서려 있다. 보들레르가 말한 ‘악의 꽃’은 악마의 꽃이거나 악을 퍼트리는 꽃이 아닌 그 반대 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악의 꽃은 선한 꽃, 선을 퍼트리는 꽃인지도.

시를 모르는 독자든 아는 독자든 어렵지 않게 읽힌다, 몇 번 읽다 보면. 삶이 시들하고 인생이 덧없을 때 ‘악의 꽃’을 집어 들면 그래도 인생은 살만하다, 이런 의욕이 생긴다. 죽을 때까지는.

결론 적으로 너도 썩고 나도 썩지만 내가 ‘시’로서 영원히 살려낸다는 그런 속 깊은 의미도 있을 터.

팁: 마지막 연의 시 ‘여행’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은 죽기까지의 여행이기에. 특히 좌파들은 환영해 마지않을 터. 보들레르는 1858년 친구 아슬리노에게 막심 뒤깡에게 보내는 긴 시를 썼다는 편지를 보냈다.

바로 ‘여행’이다. 여기서 보들레르는 자연을 특히 진보사상을 사랑하는 자를 전율케 하는 시라고 ‘여행’을 정의했다. ‘여행’의 시작과 중간, 끝 부문을 소개한다. (일부이기에 보들레르의 참뜻을 알려면 전부를 읽는 것이 좋다.)

“지도와 판화를 사랑하는 소년의 마음에/우주는 원대한 식욕과 같은 것./ 아! 등불 아래 비치는 세계는 얼마나 드넓은가!/ 추억의 눈으로 본 세계는 그토록 작은데./ ... 그러나 참다운 여행자는 오직 떠나기 위해/ 풍선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훌쩍 떠나는 사람들./ 어차피 숙명에서 빠져나가지도 못하면서 / 까닭도 모른 채 그들은 늘 외친다, 자! 떠나자./ ...떠나야 할까? 머물러야 할까?/ 머무를 수 있으면 머무르고 떠날 수 있으면 떠나라./ 어떤 이는 달리고 어떤 이는 주저앉지만,/ 모두 빈틈없이 지키는 역겨운 원수, ‘시간’을 지키기 위함이다!/ 불쌍해라! 개중에는 쉬지 않고 달리는 자도 있다./... 오, ‘죽음’이여 늙은 선장이여, 때가 되었다, 닻을 올리자!/우리는 이 땅이 지겹다. 오, ‘죽음’이여! 출항 준비를 하자!/ 하늘과 바다는 비록 먹물처럼 검으나/ 네가 속속들이 아는 우리 마음은 빛으로 가득하다./

보들레르에게 여행은 '죽음도 여행'이다.

‘악의 꽃’의 표제는 악의 찬미처럼 들린다, 고 여전히 의문을 갖는 독자가 있을 터. 그러면 그런 것이다. 악의 찬미라고 해도 무방할 만 것도 있으니.

한편 처음에 하려고 했던 저승이라 레스보스의 여인들 대신 ‘악의 꽃’이 표제로 선택된 것은 저자 자신이 ”신비로운 표제나 폭발적인 표제“를 원했기 때문이지 악을 찬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1857년 출간된 초판은 1,320부가 인쇄됐고 2판은 1861년 1,550부가 발행됐다.

출간 후 당대 최고의 작가였던 플로베르나 위고는 이 시집을 찬양했고 저자 역시 ”불길하고 차가운 이 책은... 바이런의 시와 더불어 교양있는 독자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만족감을 표했다.

하지만 시집은 간행 직후 풍기문란죄로 기소되고 6편을 삭제하라는 판결을 받기도 했다.

보들레르가 죽은 뒤 30년 후 1896년 비평가 레드 미 구르몽은 “현대 문학 특히 상징주의로 불리는 문학은 모두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후대에 이르러 '악의 꽃'은 ‘진정한 근대 운문시의 금자탑’이라는 찬사가 덧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