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 탓할 기분이 아니다, 그냥 먹는 것만도 만족
[의약뉴스]
26. 사이렌 소리가 멀찍이서 들려 온다. 점차 가까이 오고 바로 뒤에 붙었다. 낙오자를 도로에서 인도로 토끼몰이하는 몰이꾼? 아닌데, 지금 잘 달리고 있는데, 이 페이스는 아닌데. 사이렌은 몰이꾼이 아니었다.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앞쪽에서 사람들이 원을 그리고 모여있었다. 다리 사이로 사람이 보인다, 쓰러진 사람. 대회 참가자가 분명하다. 달리다 쥐가 나는 경우가 흔해 그런 거라고 여기는 승길. 하지만 누군가 인공 호흡하는 모습을 보고는 아닌데, 심장 마비가 왔나? 배가 나온 사람인가? 호기심이 발동했으나 경찰에 맡기고 계속 달리는 승길. 멈칫해서인지 새로운 기운이 돈다, 쓰러진 사람은 그새 잊었다. 제때 왔으니 병원에 가면 되겠지. 하지만 커피숍에서 들은 내용은 달랐다. 그가 죽었다는 것. 소음을 일으키며 들어온 완주 턱걸이 패들이 죽었다고 떠벌였다. 사실일까. 그들이 어떻게 알까. 물어볼 걸 그랬나. 설마 죽기까지야. 더구나 젊은 청춘인데. 이 사실을 그들의 부모나 가까운 친지들은 알고 있을까. 달리다가 죽다니. 올림픽 금메달을 다투는 것도 아닌데. 그에게는 그 보다 더 값진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잘 알지도 모르면서 막 생각하지 말자. 커피는 예상대로 썼다. 저질 원두, 너무 태운 원두를 여전히 쓰고 있다? 커피 맛을 안다고 느낄 때부터 그곳의 커피는 쓰디 썼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하지만 그걸 탓할 상태가 아니다. 지친 몸을 녹여주는 것만도 감지덕지. 거기에 빵까지 먹었다. 이제야 몸이 살았다는 신호를 보낸다. 여유를 찾은 승길. 하선의 달리기를 생각한다. 그도 달리다가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을까. 말이라고 해, 당연한 걸. 주변은 뒹구는 시체뿐. 죽음의 목격은 흔했다. 물이 고인 논에 엎어져 등을 하늘로 향하고 있는 젊은 죽음들. 달려가다 정면에서 맞았겠지. 달리다가 맞았으니 충격이 더 컸다. 그래도 또 달리고 달렸다. 그러다가 푹 앞으로 고꾸라졌겠지. 하선은 총알을 잘도 피했다. 잘 달렸기 때문일까. 내가 달리는 것은 하선의 유전자 때문일까.
하선도 달렸다고 했다, 언제는 안 달렸다고 하더니. 저 논둑길을 달렸다고 했어, 분명히 들었거든, 내 귀로. 설사 기억의 오류가 있다고 해도. 아니면 노망기로 아닌 것을 긴 것처럼 여긴다 해도 어쨌든 승길은 하선이 나도 달렸다, 는 말을 들은 것은 분명하다고 여겼다.
내가 잘못 들었나? 당신도 요즘 깜박깜박 한다는 백아의 말을 이럴 때 곱씹을 필요는 없다. 전쟁터에서 안 달렸으면 그게 이상한 거다. 달린 거 맞다, 당연히.
승길은 확신했고 젊은 하선이 논두렁을 향해 달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잘 달렸을까. 내 달리기는 아버지의 유전 때문일까.
전쟁이 한창이다. 병력의 일부가 소이산을 내려와 북쪽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탱크도 없이, 방어막도 없이 그저 달려나갔다, 무방비 상태로 가슴팍을 방패삼아.
일부는 달리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도 했다. 논둑은 폭이 좁고 미끌 거렸다. 넘어섰다 일어난 병사는 얼굴에 진흙을 묻히고 따라잡기 위해 논으로 첨벙첨벙 뛰어들기도 했다.
따라잡아야 한다. 낙오는 죽음보다 더 큰 두려움이다. 뭉쳐 있어야 한다. 죽어도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 무거운 엠 왕을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균형을 맞추면서 하선도 뛴다.
돌격 앞으로, 계속 돌격 앞으로. 쉬지 말고, 멈추면 죽는다. 소대장이 된 분대장의 외침. 그 소리는 살려거든 무작정 앞만보고 달려나가라는 말.
사방에서 포탄이 떨어진다. 정말 포탄이 날아오는 모습이 보일까. 아냐, 포탄은 빨라서 보이지 않아. 그건 하선의 거짓말이거나 헛것을 본 것이 틀림없다.
승길은 대학생 교육대 시절 탱크 포의 빠르기를 실감했다. 학생들은 횡대로 늘어선 일곱 대의 탱크 이십 미터 후방쯤에 줄을 맞춰 앉았다. 그 앞에 승길을 포함한 조교들이 있고 그 옆으로 구대장과 탱크 부대 요원들이 자리 잡았다.
깃발을 신호로 1번 탱크부터 7번 탱크까지 차례로 포가 발사됐다. 지축이 흔들린다는 표현은 바로 그런 것이다. 꽝으로는 부족하다. ‘꽝 펑 꽝’이 동시에 함께 울렸다. 글로 적기에 적합한 단어가 없는 괴상한 폭발음.
그리고 수백 미터 앞 산의 흰색 표시선 안에 흙먼지가 순차적으로 일었다. ‘꽝 펑 꽝’ 소리가 나고 불과 수초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지막 탱크포에서 포가 발사됐을 때 학생 하나가 벌떡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파편이 튄 것이다. 다행이 전투복 위로 스쳐 지나갔고 부상은 없었다. 탱크 포의 후폭풍은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포신에서 뿜어져 나간 포의 궤적을 눈으로 따라갈 수는 없었다. 더구나 포사격은 곡사가 아닌 직사.
당연히 날아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탱크 포의 발사 속도가 얼마인지 승길은 알지 못하지만 초당 수백 미터일 거라고 추측한다. 식스틴 보다는 느리겠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속도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탱크포 사격 훈련을 참관한 학생들은 기가 바짝 죽었다. 양키용병교육 결사반대의 함성은 잦아들었다. 전방 교육의 효과는 이런 것이다. 군복을 갈아 입히고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인 이유를 알 것이다.
연습이지만 이건 실제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 현장 아닌가. 누구도 탱크의 위력 앞에 시쳇말로 기가 빨릴 수밖에 없다. 그게 다가 아니다. 이번엔 포신 아래의 캘리버 오공 기관단총이 기다리고 있다.
순간적으로 수십 발이 후두둑 후두둑 발사된다. 총열이 춤을 추고 탄피가 벌건 상태로 쏟아져 내린다. 간접 체험으로도 학생들은 주눅이 들었다. 교관은 포의 가격과 총알의 가격을 이야기했다. 당시 쌀값과 비교해.
다들 입을 딱 벌린 기억은 있으나 값이 얼마인지는 기억에 없다.
‘아버지, 대포알이 빠르거든요. 그래서 안 보이거든요.’
승길은 찻잔을 들었다. 새까맣게 탄 원두라서 입맛이 썼다. 하지만 맛있다를 복창하고 입안으로 검은 액체를 밀어 넣었다. 하프 완성 후 마시는 커피를 달다 쓰다 평가할 수 있을까, 하는 심정으로.
땀벅된 몸이 마르고 마음이 진정되자 뱃속에서 탄수화물을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백아가 일어선다.
“난 후라이 있는 걸로.”
“준비하고 있었나 보네.”
그때 승길의 등 뒤로 한무리가 우르르 몰려와 앉는다. 우리 팀이다. 우리라니? 대회에 같이 참여했다는 이유 만으로 그런 동지애를 느낀다.
지금 들어오다니, 나보다 한 참 저조하군. 겨우 커트라인 넘겼나. 2시간 30분대 선수들치고는 의욕이 넘친다. 떠드는 소리가 큰 것은 숫자가 많다는 반증이다. 떼로 밀어붙이겠다?
승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나 그들이 점잖게 행동해 주기를 바랐다. 그 순간 그 사람 죽었어, 하는 말이 들렸다. 더 큰 소리로.
승길은 의자를 뒤로 밀면서 귀를 그들 쪽으로 가까이 붙였다.
"젊은 사람인데, 배가 좀 나오기는 했지만. 마침 우리가 거길 지나갈 게 뭐야. 사람이 죽었는데 우리는 컷오프를 생각했고. 참 마라톤이 뭐라고, 심장 마비겠지."
"야, 우리도 조심하자."
여기까지 듣고 승길은 의자를 당겼다. 들려 오더라도 다음 말은 억지로라도 듣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동료 하나가 죽었구나. 가뭄에 콩 나듯 대회 사망자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리얼 서울 레이스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그 장면을 승길은 지나쳤었다. 내 책임일리는 없지만 그래도 약간의 미안함이 들었다. 그는 행복했을까. 죽을 때 완주 못한 것을 아쉬워했을까. 첫 도전이었을까.
커피맛은 여전히 썼다. '다음부터는 물이나 마셔야겠어.'
“뭘 또 혼자 중얼거려?”
빵을 내려놓으며 백아가 말했다. 승길은 뒤를 돌아봤다. 패거리들은 창가 쪽이 비자 그쪽으로 또 몰려갔다.
“뉴스 좀 봤어. 사망자가 나왔나 봐.”
아직 속보는 뜨지 않았다.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 떠벌이 들이 지레짐작하고 한 말일 수도 있잖은가. 미리 애도할 필요 없다. 인공호흡으로 그가 깨어났기를 바랐다. 완주는 못했어도 살아 있으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대회는 해마다 수십 개, 수백 개가 있으니.
“당신도 조심해. 빨리 달리다 골로 가는 수가 있어.”
말이 심하다. 죽은 사람 이야기하는데. 백아가 요즘 과격해 졌다. 말이 좀 세졌다. 나이 탓인가, 여하튼 먹자, 먹어. 비닐을 뜯고 한 입 베어 문다. 잘 들어간다. 쓴 커피도 달게 먹는다.
어떤 상황이든 인간은 이겨낸다. 배가 불러온다. 주먹만한 위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일어나기 싫다. 다리가 완전히 풀렸다. 대회가 진행될수록 완주가 점점 힘들어진다.
기록은 깼으나 그만큼 체력은 고갈됐다.
"조금 있다 갈까? 아니 지금 가자."
쉬고 싶다. 눕고 싶었기 때문에 승길은 백아를 재촉했다. 조변석개라고 흉봐도 어쩔 수 없다. 사람 마음은 그런 것 아닌가. 탓할 일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