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시라노(1897)- 사람은 신파극을 잊지못해
[의약뉴스]
막이 열리고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주인공 시라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마음속으로 이렇게 결정한다. 조금이라도 희망이 보이면 즉시 편지를 꺼내야겠다고.
여기서 희망은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닌 정성스럽게 쓴 편지를 사랑하는 사촌 녹산에게 전달하는 것. 거기에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 가득한 밀어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한다.
녹산이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시라노에게 고백했기 때문. 그 누군가가 자신은 아닐까 시라노는 잠시 환상에 빠져 보지만. 녹산은 이어서 말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빠 부대에 근무하고 있는 크리스티앙이라고.
재치와 천재성이 있고 무엇보다도 용감하고 잘 생겼다는 것. 잘 생겼다는 말에 시라노는 충격에 빠져 그만 편지를 꺼낼 용기를 얻지 못한다. 위축된 그는 자신을 돌아본다. 특히 추한 얼굴 한 가운데 박힌 커다란 코에 생각이 멈추자 숨도 멈출 지경이다.
시라노의 이런 마음을 알지 못한 채 녹산은 연적인 크리스티앙을 도와주고 보호해 달라고 간청한다. 시라노는 그러겠다고 약속한다. 녹산은 잘생긴 외모만큼이나 크리스티앙이 말도 섬세하게 잘하고 편지를 쓴다면 세상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아름다운 시어로 가득 차 있을 거라는 환상을 품는다.
장면은 바뀌어 어느 가을날 고생 창연한 집들이 늘어서 있는 마레지구의 한 벽돌담 아래. 담쟁이는 덩굴로 벽을 기어오르고 재스민 향기는 발코니를 사로잡는다. 분위기는 익어가고 있으나 크리스티앙은 전쟁에는 재치가 있으나 사랑의 말에는 잼병이다.
시라노가 대타로 나선다. 목소리를 흉내 내 대신 말하고 자신이 쓴 편지를 대신 낭독한다. 녹산은 녹아들고 두 남녀는 입을 맞춘다. 시라노의 가슴은 찢어진다. 하지만 사랑하는 녹산을 위해 그녀의 사랑을 얻게 해준 것에 만족해야 한다.
시간은 흘러 전쟁이 벌어졌고 크리스티앙이 속한 연대도 출병해야 한다. 결혼 첫날밤은 뒤로 미뤄졌다. 전쟁터는 참혹하다. 크리스티앙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자고 있다. 굶주림으로 그는 형편없다. 이때 시라노가 구원병으로 등장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을 통과해 매일 녹산의 편지를 크리스티앙에게 전달한다.
누군가에는 고작 편지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힐난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녹산이 사랑하는 크리스티앙을 위해 쓰는 편지이니 그만한 가치가 있다.
망설였던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마다할 시라노가 아니다. 그는 쓴 편지를 읽어 주는데 저도 감동에 젖어 눈물을 흘린다. 얼마나 구구절절하고 애정이 깃든 편지인지.
그는 생각한다. 죽는 건 두렵지 않다. 하지만 그녀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하는 건 차라리 죽음만 못하다. 그리움에 사무친 녹산도 전쟁터를 방문한다. 사랑하는 내 남편 크리스티앙은 잘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시라노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편지를 쓴 것을 안다. 녹산은 눈치챈다. 편지를 쓴 것은 크리스티앙이 아니고 녹산이라는 것을. 그 편지를 읽고 또 읽고 마침내 실신했다고. 편지는 훨훨 나부끼는 당신의 영혼. 외모는 잠시 허울뿐이다. 난 외모가 아닌 영혼을 숭배한다.
눈이 번쩍 뜨인 시라노는 묻는다. 정말이냐고. 추남이라도 그게 가능하냐고. 크리스티앙도 이제는 녹산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닌 시라노인 것을 안다. 크리스티앙은 녹산을 보며 시라노에게 사랑을 털어놓으라고 다그친다.
내 얼굴을 봐라. 이 지나치게 큰 코를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타박한다. 그녀는 추남이라도 사랑한다고 했다. 그런 터무니 없는 말 믿지 말라. 옥신 각신. 그러는 와중에 크리스티앙은 전투 중에 죽는다.
죽을 때 그의 손에 든 편지는 시라노가 녹산에 쓴 편지. 녹산의 사랑을 확인한 시라노는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 연적을 위해 편지를 쓴 시라노의 아이러니. 녹산은 잘 생신 외모보다는 영혼이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는다.
팁: 시간은 훌쩍 지나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파리 수녀원에 가을이 왔고 뜰에는 단풍이 물들었다. 수녀들은 즐거움을 주는 시라노를 위해 국수를 만든다.
시라노는 외롭고 가난하다. 더구나 하인이 휘두른 장작에 맞아 피투성이다. 그도 죽을 운명이다. 하지만 여전히 녹산을 사랑하고 있다. 그는 녹산에게 말한다. 나는 죽음의 문턱에 서 있지만 여전히 크리스티앙은 미남이었다고.
녹산은 외친다. 죽지 말아달라. 당신을 사랑한다. 내가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뒤늦게 후회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말한다. '그녀가 날 바라보는 것 같군. 감히 내 코를 바라보다니, 내 들창코를'.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는 먼발치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라노의 애절함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연적을 위해 기꺼이 편지를 쓰고 낭독하는 시라노의 마음을 지금 사내들은 감히 이해할 수 있을까.
자기희생도 이런 희생이 없다. 귀부인을 숭배하는 중세 기사도 정신이 이런 것일까. 철 지난 신파극은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 진정한 사랑은 화려하거나 아름답기보다는 희생 속에서 피어난다는 진리를 다시 확인하게 하는 힘이 ‘시라노’가 가진 위대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