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 혁신 신약은 급여 제한, 기존 치료제는 생산 중단 "쓸 약이 없다"
대한뇌전증학회, ‘세계뇌전증의 날 기념 심포지엄’ 개최...“가이드라인 무용지물 위기”
[의약뉴스] 첨단 신약이 도입되는 뇌전증 치료 환경 이면에 정작 환자의 생명을 구할 필수 응급 의약품은 수익성 악화로 시장에서 퇴출당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쓴소리가 이어졌다.
세계적인 의료 수준을 자랑하는 한국이지만, 뇌전증 환자들은 여전히 ‘치료제 품귀’와 ‘사회적 편견’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가난할수록, 늙을수록 뇌전증 위험 크다”
대한뇌전증학회(이사장 서대원)는 9일 삼성서울병원에서 ‘2026 세계뇌전증의 날 기념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서울의대 신경과 이우진 교수는 ‘뇌전증의 유병률과 연령별 발생 원인’을 주제로, 뇌전증이 더 이상 소아청소년만의 질환이 아님을 역설했다.
이 교수가 제시한 2024년 란셋(Lancet) 신경학회지 데이터와 국내 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선진국형 뇌전증 패턴을 보이고 있다.
체계적인 진단 시스템과 고령화로 인해 유병률과 발생률은 높게 나타나지만, 사망률과 질병 부담(DALY)은 감소하고 있다는 것.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환자 연령층의 이동이다.
이 교수는 “과거 ‘J자형’ 곡선을 그리던 유병률 그래프가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며 노년층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면서 “이는 뇌졸중, 치매 등 뇌혈관 및 퇴행성 질환을 앓는 노인 인구가 늘어나면서 후천적 뇌전증이 급증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건강 불평등’이다. 이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의료급여 수급자(저소득층)의 뇌전증 유병률이 건강보험 가입자보다 약 4.2배 더 높았다.
특히 경제 활동이 가장 왕성해야 할 30대 의료급여 수급자의 유병률이 전 연령대 중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 교수는 “30대 빈곤층에서 유병률이 치솟는다는 것은 뇌전증으로 인한 취업 제한 등 사회경제적 고립이 환자를 빈곤으로 내몰고 있음을 시사한다”며 “뇌전증은 단순한 의학적 질병을 넘어 사회적 불평등을 반영하는 지표”라고 지적했다.
◆응급 주사제 없는 응급실, 환자 생명 담보로 한 줄타기
충남의대 신경과 김재림 교수는 ‘한국의 뇌전증 치료 약물 현황과 현안’이라는 발제를 통해 필수의약품 공급망이 붕괴 직전에 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항발작제를 자동차 안전장치에 비유하며 “세노바메이트 등 3세대 신약이 도입되며 평소 발작을 예방하는 ‘안전벨트’ 기능은 강화됐지만, 정작 발작이 멈추지 않는 위급 상황에서 터져야 할 ‘에어백(응급 주사제)’은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의료 현장에서 가장 널리 쓰이던 디아제팜과 페니토인 주사제는 이미 생산이 중단됐고, 로라제팜 등 다른 필수 주사제들도 공급 불안정에 시달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국제 가이드라인이 있어도 약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며 “응급 주사제는 경구약으로 대체가 불가능해, 이대로라면 뇌전증 지속상태 환자들이 뇌 손상이나 사망에 이르는 것을 지켜봐야 할 수도 있다”고 역설했다.
특히 현행 '퇴장방지의약품' 제도의 한계를 지적하며, 응급 항발작제를 공공재로 관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수익성이 낮아도 환자 생명과 직결된 약물은 정부가 원가를 현실화하거나 직접 비축해 공급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와 함께 해외에서 보편화된 ‘비강 분무제’나 ‘구강 점막 투여제’의 신속한 도입을 촉구했다.
김 교수는 “발작 중인 환자에게 보호자가 주사를 놓기는 불가능하다”며 “코에 뿌리는 형태의 응급 약물이 도입된다면 병원 도착 전 골든타임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했다.
◆"아이 지능 지킬 표준치료제 국가가 책임져야”
마지막 발제자인 고려의대 소아청소년과 심병규 교수는 소아 뇌전증 중 가장 치명적인 ‘영아 연축(웨스트 증후군)’의 치료 공백을 조명했다.
그는 “생후 6개월 전후에 발생하는 영아 연축은 치료가 늦어지면 지적 장애나 자폐 스펙트럼 장애 등 영구적인 발달 퇴행을 남기는 ‘발달학적 응급’ 질환”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국제 표준 치료 가이드라인은 치료 성공률이 높은 ‘ACTH(부신피질자극호르몬) 주사 요법’을 1차로 권고하지만, 국내에서는 수익성 문제로 구하기 힘들어 효과가 떨어지는 대체 약물을 써야 하는 실정”이라며 “아이들의 평생 지능을 좌우할 수 있는 약물이 시장 논리에 의해 공급이 막히는 것은 비극”이라고 성토했다.
한편, 심 교수는 영아 연축 환아의 부모들이 죄책감을 겪고 있다면서, 부모의 잘못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뇌전증 원인의 60% 이상이 유전적 요인으로 밝혀지고 있지만, 이것이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전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대부분의 소아 뇌전증은 부모는 정상이지만 자녀의 발생 과정에서 우연히 유전자 변이가 생기는 ‘신생 돌연변이’가 원인으로, 최근에는 유전자검사를 통해 정확한 변이를 찾아내고 이에 맞는 정밀 맞춤치료가 가능해지고 있다”고 전했다.